3장 부흥운동의 전개
3장 부흥운동의 전개
668년 9월 고구려 도성인 평양성이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게 함락되면서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면서 고구려 고지(故地)를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제 고구려인은 망하여 없어진 나라의 백성이라는 의미인 유민(遺民)으로서 삶을 살게 되었다.
멸망 과정에서 살아남은 고구려 유민은 생존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일부 유민은 당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고구려에서 누려왔던 세력기반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당의 지배체제에 순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에 비해 당의 지배를 피해 다른 지역이나 국가로 이주하는 등 소극적인 형태로 저항하였던 유민도 있었고, 적극적으로 반당(反唐) 항쟁을 전개하였던 인물과 세력도 존재하였다(김현숙, 2004).
이 글에서는 고구려 유민이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펼쳤던 활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구려의 재건을 추구하였던 유민은 고구려 고지를 지배하고자 시도하는 당 세력의 축출을 선결 과제로 삼았을 것이다. 따라서 반당 항쟁은 전쟁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고구려 유민의 반당 항쟁을 부흥전쟁이라는 용어로 부르는 것이 가능하다(방용철, 2018). 다만 ‘한성 고구려국’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일시적이나마 국왕을 세우고 외교활동을 하는 등 국가체제를 복원하는 단계까지 다다르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구려를 다시 일으키기 위한 여러 활동을 모두 수렴할 수 있는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부르고자 한다.
부흥운동 관련 문헌사료가 단편적이고 고구려 유민 스스로가 남긴 기록도 매우 소략하기에 관련 연구가 심화되기 어려웠다. 근래 중국에서 당으로 귀부한 고구려 유민이나 고구려 고지에서 활동한 당 관인의 묘지명이 지속적으로 출토·보고되면서 당의 고구려 고지 지배 양상, 고구려 유민의 동향 등을 파악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최근에는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이 고구려 고지 대부분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되었음이 밝혀졌다(여호규·拜根興, 2017; 방용철, 2018; 김강훈, 2022).
고구려 유민은 각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며, 서북한 지역에서는 나당전쟁과 결부되어 신라와 협력관계를 구축하며 고구려 부흥을 도모하였다. 결과적으로 부흥운동은 실패하였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만주 지역의 부흥운동은 발해가 건국되는 것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구려 부흥운동은 그 자체로 고구려사의 연장선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7세기 후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이 주요 구성세력으로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