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요동·부여·책성 지역의 부흥운동
3. 요동·부여·책성 지역의 부흥운동
요동 지역에서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대표적인 곳은 안시성이었다. 안시성은 요하 방면 군사요충지 중 하나였으며 645년 고구려-당 전쟁에서 치열한 전투 끝에 당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결국 당군의 퇴각을 이끌어 낸 곳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인에게 안시성은 당에 대한 저항과 승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었을 것이다. 이는 고구려 멸망 이후 안시성이 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안시성에서 언제 부흥운동이 발생하였는지, 그리고 얼마나 지속되었는지 불분명하다. 670년 1월 요동 지역 주현 개편에 따른 반발로 안시성에서 저항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정원주, 2024). 당은 검모잠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670년 4월 고간과 이근행을 파견하였지만, 당군은 곧바로 서북한 일대로 진입하지 못하고 먼저 요동 일대에서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진압해야 하였다. 고간이 지휘하는 당군이 안시성의 고구려 유민을 격파한 시기가 671년 7월이다. 따라서 안시성을 중심으로 한 요동 일대의 부흥운동은 적어도 1년여 동안 지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669년 실시된 강제 이주로 요동 지역 고구려 유민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상당히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안시성에는 ‘반란병’이라 일컬어질 정도의 고구려부흥군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안시성의 지방군을 기반으로 하였을 것이다(오진석, 2021). 그리고 안시성의 부흥군을 지휘하였던 인물은 안시성의 지방관을 역임하였던 인물이거나 재지 유력자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안시성에는 중외(中外)의 재이(災異)를 말하는 승려가 있었다. 아마도 이 승려는 자연재해와 이변 현상을 해석하고 전파하면서 고구려 부흥의 성공 가능성과 당의 재앙을 선전하였을 것이다(방용철, 2013). 따라서 안시성은 요동 일대 부흥운동의 군사적 거점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유민사회를 심리적·정신적으로 뒷받침하는 공간이었다(김강훈 2022).
고간은 안시성 공략에 앞서 안동도호부의 치소를 평양성에서 요동주(遼東州)로 옮겼다. 고구려 유민의 저항으로 평양성이 안동도호부 치소로 기능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안동도호부가 고구려 유민의 반당 항쟁에 대응하는 군사거점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은 요동성을 거점으로 요동 지역의 부흥운동을 차례로 진압하였다. 671년 요동 지역의 부흥운동과 관련하여, 당이 설인귀를 계림도총관에 임명한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설인귀는 안동도호로 활동하다가 670년 4월 토번 전선의 책임자로 투입되는데, 그해 8월 토번에게 크게 패배하며 제명(除名)되었다. 그런데 고구려 유민들이 잇달아 다시 저항하자, 당은 설인귀를 계림도총관에 임명하여 경략하게 하였다. 설인귀가 671년 7월 26일 계림도총관의 자격으로 신라 문무왕에게 외교문서를 보냈기 때문에, 계림도총관 임명시기의 하한은 671년 7월이다(여호규·拜根興, 2017). 설인귀가 파견된 지역은 대체로 백제 고지로 이해하고 있지만, 파견 이유를 고구려 유민의 저항으로 밝히고 있기에 671년 전반 고구려 고지의 정세와 관련하여 해석할 필요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당 관인이었던 곽행절(郭行節)의 묘지명을 주목하기도 한다. 그는 계림도총관 설인귀 휘하에서 수송업무를 담당하는 부대를 지휘하였는데, 671년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하면서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런데 묘지명에는 그가 익사한 장소를 요천(遼川)으로 밝히고 있다. 여기서 요천을 요하(遼河)로 비정하면서 곽행절은 요하를 통행하며 군수물자를 수송하던 중 익사하였다고 보고, 이를 통해 계림도행군은 고간, 이근행의 행군과 함께 안시성을 공격하였다고 이해하는 것이다(植田喜兵成智, 2014). 이러한 해석이 타당하다면, 671년 전반 당은 요동 지역의 부흥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세 개의 행군을 운용한 셈이 되며, 이는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 유민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는 반증이 된다. 그러나 요천은 요하 동쪽 지역을 두루 일컫는 표현으로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권덕영, 2017), 묘지명의 요천을 근거로 계림도행군이 요동 지역에서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고 보기에는 추가적인 논거가 필요하다.
한편 검모잠이 처음 부흥운동을 일으킨 지역을 막연히 평양 일대로 파악하는 연구동향을 비판하며, 검모잠이 요동 지역에서 거병하였다고 이해하는 연구가 있다(이상훈, 2014). 검모잠의 거병지역을 요동 지역으로 본다면 『신당서』 고려전에서 검모잠이 당의 변경을 침입하였다는 기록이 자연스레 이해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당의 행군명(行軍名)을 또 다른 근거로 삼는다. 행군명은 일반적으로 원정 목적지를 가리키는데, 동주도행군(東州道行軍)의 동주는 요동주(遼東州)의 준말로, 연산도행군(燕山道行軍)의 연산은 지금의 북경 일대로 이해된다. 따라서 검모잠의 거병에 대응하여 당이 요동과 요서 지역으로 행군을 파견하였다는 점에서, 검모잠의 거병지는 요동 지역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검모잠과 요서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고구려 유민 간에 연계가 이루어졌다고 추정하기도 한다(김강훈, 2016). 다만 음운의 유사함이나 방증자료를 통한 추정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논의의 진전을 위해서는 새로운 자료가 축적될 필요가 있다.
송화강(松花江) 유역의 부여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발생하였던 정황은 이타인묘지명에서 확인된다. 이타인은 요동(遼東) 책주인(柵州人)으로 책주도독(柵州都督) 겸 총병마(總兵馬)를 맡아 고구려의 12주를 주관하고 말갈 37부를 통솔한 인물이었다. 책주는 고구려 동북방의 거점인 책성으로 지금의 두만강 유역 혼춘(琿春) 일대로 비정되며, 그가 역임한 도독은 고구려 최고위 지방관인 욕살(褥薩)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타인은 두만강 일대인 책성 출신으로 책성 지역을 통솔하는 최상위 지방관을 역임한 인물인 것이다(안정준, 2013; 余昊奎·李明, 2017).
그런데 그는 당에 투항하여 고구려 멸망에 기여한 대가로 종3품의 우융위장군(右戎衛將軍)에 제수되었다. 이타인묘지명에는 장군직 제수에 곧이어 “강유(姜維)가 화를 일으켜 다시 성도(成都)를 어지럽혔듯이, 수혈(穟穴)에 요사한 기운이 뻗쳐 갑자기 예(穢)의 땅을 뒤집었다. 공이 다시 조서를 받들어 부여로 나아가 토벌하고 우두머리를 거듭 베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수혈은 『삼국지』 고구려전에서 신성한 제의공간인 국동대혈(國東大穴)을 지칭하는데, 여기서는 고구려를 의미한다. 즉 앞서 언급하였듯이 중국의 강유가 촉의 재건을 시도한 바와 같이 고구려 고지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孫鐵山, 1998). 특히 그가 출정한 지역이 부여이므로 고구려 부흥운동이 부여 지역에서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타인은 675년에 사망하므로 부여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난 시기는 그 이전이 된다. 검모잠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당 행군에서 이타인이 활동하였다고 이해하면서, 부여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전개된 시기를 670년으로 보기도 한다(孫鐵山, 1998; 김종복, 2005; 拜根興, 2010; 안정준, 2013; 이민수, 2018).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시기에 부여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발생하였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앞에서 살펴본 ‘목록’이 고구려 멸망 이후에 작성된 자료에 근거한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목록’의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성’ 중 하나인 북부여성주를 근거로 고구려 멸망 직후부터 부여 지역이 당의 지배에서 이탈하였다고 파악하는 것이다(김강훈, 2018).
또한 669년 8월 1일 당 고종이 양주(涼州)로 순행한다는 조서를 내리자, 관료들이 순행을 만류하면서 내건 명분에 주목하기도 한다. 내공민(來公敏)은 “고구려를 비록 평정하였지만 부여에서 아직 저항이 거세다”는 이유를 앞세우며 순행을 반대하였고, 결국 고종은 이를 수용하였다. 따라서 669년 후반 부여 일대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당의 지배에 저항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김강훈, 2017a).
부여 지역의 부흥운동이 당 조정의 현안 논의 과정에서 언급되고 최종적으로 황제가 순행을 포기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규모가 작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속말말갈이 부여 지역 부흥운동에 참여하였을 가능성도 있다(孫鐵山, 1998; 김종복, 2005). 송화강 유역은 속말말갈의 거주지였으며 보장왕의 부흥운동과 벌노성(伐奴城)전투 등 고구려 멸망 이후에 고구려 유민이 말갈과 연계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부여 지역은 고구려-수·당 전쟁에서 요동 지역의 배후기지 역할을 수행하였고 지리적으로 말갈, 거란, 돌궐과 연결되는 곳이었다. 따라서 부여 지역의 부흥운동은 다른 고구려 고지뿐만 아니라 북방세력에도 파급력을 지닐 수 있었다. 따라서 당은 이타인을 파견하여 부여 지역 부흥운동에 대한 진압에 나섰던 것이다.
부여 지역의 부흥운동이 이후 어떻게 진행되었고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는 파악하기 쉽지 않다. 다만 이타인묘지명에 따르면, 이타인은 부여에서 개선하고 돌아와 종묘에 승리를 고하였고 동정원(同正員)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으로 승격되었기에 부여 지역의 부흥운동이 이타인의 군사활동에 의해 종식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이민수, 2018). 하지만 출정을 전후하여 이타인의 관직은 명칭만 달라졌을 뿐 동일하며(拜根興, 2010; 안정준, 2013), 묘지명에 고구려 멸망 시 이타인의 활약상은 구체적으로 기록된 데 비하여 부여 지역에서의 공로는 간략하기에, 부여 지역의 부흥군이 완전히 소멸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김강훈, 2022). 이후 부여 지역에서 고구려 유민의 활동을 보여주는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판단 내리기는 쉽지 않다.
두만강 유역은 고구려의 주요 지역 중 하나였으며, 그 중심인 책성에는 최고위 지방관인 욕살이 파견되었다. 요동 지역과 서북한 지역은 70여 년간의 고구려-수·당 전쟁으로 피폐해졌고 멸망 후에는 대규모 사민으로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다. 그에 반해 두만강 유역은 직접적인 전쟁의 피해를 겪지 않았기에 다른 지역에 비하여 사회경제적 여건이 양호한 편이었다(盧泰敦, 1981b).
고구려 최말기 두만강 유역을 총괄하였던 인물은 책성욕살 이타인이었다. 그가 당군에 항복하고 고구려가 멸망하면서, 책성 일대는 당의 체제에 편입되었다. 고구려 멸망 후 두만강 유역의 동향은 당 고종과 무측천(武則天) 시기 무장으로 활동한 양현기의 묘지명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양현기묘지명에는 양현기가 668년 검교 동책주도독부 장사에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동책주도독부를 고구려 책성 일대에 둔 당의 기미부로 비정하는 데 신중하자는 입장도 있고(방용철, 2018), 동책주도독부는 도상 계획에 불과할 뿐이었으며 당이 두만강 유역을 직접 지배하지 못하였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이민수, 2018).
하지만 양현기가 반수령(反首領) 고정문 등을 주살하고 정양군공(定陽郡公), 식읍 2,000호에 봉해졌다고 한 것에서 당이 책성 지역을 동책주도독부로 재편하여 기미지배를 시행하였고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呂九卿, 2008; 余昊奎·李明, 2017). 당시 유공자를 기미부주 장관에 임용하는 원칙에 따라 동책주도독은 이타인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는 당에 입조하여 현지에 부재하였다. 따라서 도독 이타인을 대리하여 도독부의 부관(副官)인 장사 양현기가 실질적으로 동책주도독부의 통치를 맡고 있었다(김강훈, 2017b). 당이 기미지배를 시행하면서 표면적으로는 고구려 유민의 자치를 허용하고 고구려 유민과 당 관리가 함께 통치한다고 표방하였지만, 실제로는 당 관리들이 두만강 유역에 대한 통치를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책성 지역에서 고구려 유민의 저항이 발생하였다.
양현기묘지명에는 양현기가 “반수령 고정문 등을 주살하였다”고 한다. ‘반수령’이라는 표현은 고정문이 책성 지역의 유력자 출신으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음을 시사한다(여호규·拜根興, 2017). 당대 율령에서 ‘반(反)’은 천자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행위, 조정을 향해 정면으로 공격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따라서 고정문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안동도호부체제에 저항하는 군사활동을 펼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대에 수령은 이민족집단의 장이나 재지 세력가를 지칭하는 용어로, 고정문은 일정한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지녔던 재지 유력자이거나 지방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김강훈, 2017b).
양현기가 동책주도독부 장사로서 고정문 등이 이끈 부흥세력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므로, 고정문이 거병한 지역은 책성 일대, 즉 두만강 유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타인이 부여 지역의 부흥운동을 진압할 때 양현기가 이타인을 보좌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이해하면서, 고정문이 부여 지역에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민수, 2018). 하지만 이타인묘지명과 양현기묘지명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진압한 사실을 기술한 부분에 차이가 있으며, 부흥운동을 진압한 후 전과에 따라 내려진 포상에도 다른 점이 엿보인다(김강훈, 2022). 따라서 고정문이 이끈 부흥운동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출현하기 전까지는 거병지역을 책성 일대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양현기묘지명에는 고정문이 부흥운동을 일으킨 시기, 부흥운동의 전개 과정, 활동범위, 존속시기, 당군과의 전투양상 등 구체적인 실체를 밝힐 수 있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양현기가 “반수령 고정문 등을 주살하였다”라고 하여, 고정문이 주도한 책성 일대의 부흥운동이 당군에 의해 좌절되었다는 결과만 확인할 수 있다. 양현기는 공을 인정받아 정양군공에 봉해졌다. 당대 9등급 봉작 중에 군공(郡公)은 네 번째에 해당한다. 설인귀는 고구려 멸망과 관련하여 무공을 세우고 평양군공(平陽郡公)에 봉해졌다. 양현기가 검교 동책주도독부 장사에 재임하고 있을 때 설인귀는 고구려 고지 운영의 최고책임자였다. 이를 고려한다면 당은 양현기의 공적이 설인귀에 버금간다고 인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김강훈, 2017b). 여기서 고정문이 주도한 부흥운동이 책성 일대 유민사회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