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당의 지배정책 변화와 보장왕의 부흥운동
4. 당의 지배정책 변화와 보장왕의 부흥운동
고구려 유민의 저항은 서북한 지역, 요동 지역, 송화강 유역 일대, 두만강 유역 일대 등 고구려 고지 거의 대부분에서 일어났다. 특히 서북한 지역의 부흥운동은 일시적이나마 고구려의 부흥을 달성하였으며 673년까지 전개되었다. 서북한 지역의 부흥세력이 당군에 패하며 신라로 귀부하자, 당과 신라는 임진강~한강 유역에서 본격적으로 대결하였다. 신라군은 675년 9월 매소성에서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을 격파하였고 676년 11월 금강 하구의 기벌포에서 설인귀가 지휘하는 당군에게 승리하였다. 이로써 나당전쟁은 종결되었다. 당군이 한반도에서 물러나면서 당의 고구려 고지에 대한 지배권은 요동 지역으로 한정되었고 당은 고구려 고지에 대한 지배정책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盧泰敦, 1981a).
당은 먼저 안동도호부에 파견하였던 관인을 모두 철수시키고, 676년 2월 안동도호부의 치소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겼다. 당이 안동도호부를 요동 지역으로 옮긴 이유에 대해서는 한반도를 방기하는 정책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으로 이해하거나(津田左右吉, 1915; 池內宏, 1930) 한반도 재침을 준비하기 위한 전략적 후퇴로 보는 입장이 있다(古畑徹, 1983; 김종복, 2003). 또는 토번이 변경을 위협하자 당군이 한반도에서 토번 전선으로 이동하면서 안동도호부가 함께 옮겨갔다고 보기도 한다(陳寅恪, 1982; 黃約瑟, 1997; 拜根興, 2002). 당의 동방정책, 나당전쟁, 당-토번 관계 등에 주목해야겠지만, 고구려 유민의 동향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안동도호부의 이동에 앞서 당 관리가 철수하였다. 여기서 당 관리는 기미지배에 참여하였던 관리들로, 이들의 퇴각은 고구려 고지에 대한 통제와 감독을 완화하겠다는 의도로 시행된 것이었다(盧泰敦, 1981a; 김종복, 2003). 이는 고구려 유민의 동요를 무마하고 회유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따라서 당 관리 철수와 연동하여 시행된 안동도호부의 이전도 고구려 유민의 움직임과 관련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 인용된 『실록(實錄)』의 “의봉 원년(676) 2월 갑술,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반란을 일으키자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겼다”라는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고구려 유민의 항쟁으로 안동도호부가 요동 지역으로 퇴출되었다거나(梁炳龍, 1997), 요동 지역에서 발생한 반당 항쟁을 진압하고 유민사회를 진정시키기 위해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옮겼을 가능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金康勳, 2013).
677년 2월 당은 보장왕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 조선군왕(朝鮮郡王)에 임명하여 요동으로 파견하고 당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던 고구려 유민을 함께 귀환시켰다. 그리고 안동도호부의 치소를 다시 신성으로 옮겼다.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의 귀환은 토착민의 자치라는 전형적인 기미지배로 전환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같은 해 연남생은 당 황제의 칙명을 받아 요동으로 파견되어 주현을 개편하고 구휼 실시, 조세 경감, 농경지 획정 등을 추진하며 안동도호부의 통치를 담당하였다. 그는 고구려 유민이 아니라 당 관인의 자격으로 파견된 것이었으며 요동으로 귀환한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결국 676~677년의 조치는 표면적으로 고구려 유민의 자치를 허용해주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보장왕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유민세력의 자치와 연남생을 정점으로 하는 당의 감독과 통제가 양립하는 구조였으며, 당은 이들의 상호 견제를 통해 고구려 고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盧泰敦, 1981a; 김종복, 2003; 여호규·拜根興, 2017).
그러나 당의 기대와 달리 고구려 유민의 저항은 지속되었다. 보장왕이 말갈과 통모하여 고구려 부흥을 도모하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679년 1월 29일 연남생이 사망하면서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사회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679년 10월 돌궐이 당에 항거하기 시작하는 등 북방 정세가 변동하였다. 보장왕은 679년에 일어난 대내외적 변화를 기회로 삼아 고구려의 부흥을 시도하였던 것이다(김종복, 2004; 권은주, 2010).
보장왕이 부흥운동을 도모하면서 말갈과 연대를 시도한 점이 주목된다. 말갈의 정체에 대해서는 『구당서』, 『신당서』 안동도호부조에 기재되어 있는 기미부주의 차이에 주목하여 철리(鐵利), 불열(拂涅) 등의 말갈 세력으로 추정하거나(金康勳, 2013), 고구려 멸망 전후 영주 지역으로 옮겨진 친고구려적 성격의 말갈 세력으로 파악하는 연구(임금표, 2022)가 있지만, 대체로 속말말갈(盧泰敦, 1981a; 김종복, 2004)로 이해하고 있다. 보장왕의 요동 귀환과 함께 새롭게 안동도호부 치소가 된 신성이 요동 지역의 고구려 유민과 송화강 유역의 속말말갈의 교섭을 차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盧泰敦, 1981a).
보장왕의 부흥운동은 거병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당에 발각되었다. 당은 681년 보장왕을 지금의 중국 사천(四川) 지역에 있는 공주(邛州)로 유배 보내고 관련자들을 다시 당 내지로 강제 이주하였다. 그 결과 고구려 고지에는 빈약자만 남게 되었다. 강제 이주는 당의 지배에 비협조적인 유력자들을 제거하여 고구려 유민의 저항을 방지하려는 목적에서 실행된 것이었고, 결국 고구려 고지에 대한 당의 지배정책은 다시 677년 이전으로 되돌아갔다(여호규·拜根興, 2017).
한편 강제 이주의 대상에는 보장왕과 통모한 말갈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여기에 훗날 발해를 건국하는 핵심세력인 대조영 집단과 걸사비우 집단이 포함되어 영주 일대로 옮겨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김종복, 2004). 그렇다면 보장왕이 계획한 부흥운동에 이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발해 건국 주도세력은 고구려 부흥운동에 참여했던 역사적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진충의 난을 계기로 요서 일대가 혼란에 빠지자, 이들은 고구려 고지로 되돌아와 발해를 건국하는데, 그 배경에는 고구려 부흥을 도모했던 경험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김강훈, 2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