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통사

4장 신라–당 전쟁의 전개와 고구려 유민의 활동

  • 저필자
    이준성(경북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4장 신라–당 전쟁의 전개와 고구려 유민의 활동

동아시아에서 7세기는 전쟁의 시기였다. 신라와 당 사이에 군사동맹이 체결되었고, 그에 의해 백제에 이어 고구려도 멸망하였다. 보장왕을 비롯한 고구려의 지배층은 당 태종 이세민의 무덤인 소릉(昭陵)에 포로로 바쳐졌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설치되었고, 당은 설인귀(薛仁貴)로 하여금 2만의 병사를 이끌고 이곳에 주둔토록 하였다(노태돈, 2009).
고구려 사회가 뿌리째 흔들렸고, 많은 이들이 자의 및 타의에 의해 삶의 터전을 떠나 다른 국가(지역)로 이주해야만 했다. 먼저 고구려의 유력한 2만 8,000여 호는 당의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 외 일부는 이전부터 교류하던 돌궐 지역이나 말갈족의 거주지, 그리고 일본 등지로 흩어져 들어갔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로 합류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신라로 유입된 이들 중에는 원주지가 신라에 병합됨에 따라 함께 귀속되거나 전쟁포로로 잡혀온 집단도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에 의해 집단적으로 내투하거나 부흥운동의 과정 속에서 당군에 밀리게 되면서 신라로 유입된 이들도 있었다. 고구려 유민의 신라 내투는 신라와 당의 전쟁이 일단락된 676년 이후까지도 소규모로 이어졌다.
한편, 신라와 당 사이에 내재되어 있던 갈등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드러났다.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려는 당의 야욕과 옛 백제 지역 및 대동강 이남의 고구려 영역을 확보하려는 신라의 전략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양자 사이의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신라-당 전쟁은 당시 동아시아 전체의 판도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특히 이 전쟁에는 멸망 이후 신라의 지원을 받으며 부흥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들도 참여하였다. 이 글에서는 신라-당 전쟁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에 대한 신라의 정책을 염두에 두면서 고구려 부흥운동의 전개와 소멸을 살핀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4장 신라–당 전쟁의 전개와 고구려 유민의 활동 자료번호 : gt.d_0007_002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