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라의 고구려 유민정책과 고구려 고지 지배
3. 신라의 고구려 유민정책과 고구려 고지 지배
1) 신라의 고구려 유민정책 변화
670년대 고구려 유민의 항쟁 의지와 신라의 대당전쟁 전략이 만나는 지점에서 양자는 연합하였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전략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를 통해 당과의 갈등상황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움직임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아울러 변화하는 국내외정세 변화에 맞춰 이들을 안정적으로 통제하면서, 동시에 적절하게 활용하기 위한 유민정책을 펼쳤다(김수태, 1994; 최희준, 2020).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구려 유민이 꿈꿨던 목표는 점차 흐릿해졌고, 신라의 이해관계 내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신라의 대고구려 유민정책 변화를 시기별로 살피도록 한다.
신라가 처음부터 고구려 유민과 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것은 아니다. 신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세력이었으므로, 처음부터 부흥운동을 지원할 수는 없었다.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는 한동안 당과의 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다만 신라에 유입된 고구려의 유민이 늘어가면서 신라는 유입되는 유민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향후 전황에서 유리할지를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였다(최희준, 2020).
신라는 전쟁 과정에서 투항하였거나 포로가 된 고구려 유민 중에서 영향력 있고 상징성을 지닌 주요 인사들에 대해 적극적인 포섭을 하였다. 연정토가 집단적으로 내부하자 이들에게 의복과 식량, 가옥을 제공하고 왕경과 주·부에 나누어 안치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이후 신라는 668년에 연정토를 당에 사신으로 보내 외교전에 활용하였다. 전투 과정에서 잡힌 고구려 유민 중 일부는 그 지위와 능력을 헤아려 신라의 관리로 등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관직을 받은 후에는 다시 전쟁에 투입되었을 것이며, 여러 통로로 충성심을 증명한다면 파격적으로 승진할 기회를 부여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백제의 경우에서 유추할 수 있는데, 660년 황산벌전투에서 잡혀 포로가 된 후 총관직을 제수받았던 충상(忠常)이 이듬해 661년 출정군으로 참가할 때는 아찬(阿飡)으로 승진한 사례가 확인된다(김수태, 1999; 최희준, 2020). 하지만 이는 일부 사례에 불과하고, 그 외 대다수의 포로들은 고구려 정벌 과정에 전공이 있는 장수들에게 상으로 분배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고위층의 고구려 유민을 중심으로 포섭하여 활용하던 신라의 정책은 당과 전쟁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고구려부흥군을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당과의 군사동맹을 파기한 신라는 고구려부흥군과 연계하여 670년 3월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는 같은 해 7월 웅진도독부를 전면적으로 공격하고 백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이어진 전쟁 기간 동안에도 신라는 고구려부흥군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만일 당과의 일전에서 패한다면 백제 고지를 다시 내줘야 함은 물론, 신라 자신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항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는 당과의 전쟁 과정에 국가의 역량을 총집결시켜야 했고, 이를 위해 고구려 유민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크고 작은 도움을 받길 기대했다.
안승으로 대표되는 고구려 유민들이 670년 집단적으로 내부한 것은 신라 유민정책이 앞선 시기와 달라지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고구려 멸망 후 안승이 신라에 의탁하게 되었을 당시 거느리고 온 유민은 무려 4,000여 호에 달했다. 이에 대해 신라는 몇 년 전 연정토 세력이 투항했을 때와는 대조적으로 그들을 백제 고지 중에서도 요충지라 할 수 있는 금마저에 안치하면서 국통(國統)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신라가 전쟁 과정에서 발생한 투항세력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면서 활용했던 것이다(조법종, 2015). 신라 문무왕이 안승을 금마저에 안치시키면서 고구려왕으로 책봉한 것은 형식적으로나마 신라 국왕과 당 황제가 대등한 존재임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상징적인 행위였다. 또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안승 무리를 금마저에 안치한 데에는 당과 웅진도독부, 그리고 백제 유민의 연결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신라의 목적이 기저에 깔려 있었다(최재도, 2015; 이미경, 2015).
당과의 전쟁이 종결된 이후, 신라의 유민정책은 다시 한 번 변화했다. 이제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유민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진행된 전쟁으로 말미암아 분열하고 무너져 가던 신라 사회를 재건하고 확대된 영토와 백성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통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정책목표가 전환되어야 했다. 신라는 ‘일통삼한(一統三韓)’을 내세우며 이전과 다른 차원에서 백제와 고구려 유민에 대한 통합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삼국이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었다는 의식을 새롭게 강조해 나갔으며, 685년에 전국을 크게 9주로 구획함으로써 신라에 의해 삼국이 하나로 통합되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천명하였다. 즉, 고구려 고지에 3주, 백제 고지에 3주, 가야를 포함하여 옛 신라의 영토에 3주를 배치한 것이다(변태섭, 1985; 노중국, 1988).
그 외 분야에 대해서도 통합을 내세우는 정책의 재편이 이어졌다. 먼저 신라의 제사체계 내에 기존 백제와 고구려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산천을 포함시키는 방식으로 사전(祀典)체계를 편제하였다. 신라는 전국의 주요 명산대천을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체계화하였는데, 대사는 본래 신라 지역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중사인 5악(岳)·4독(瀆)·4진(鎭)·4해(海)는 전국에 걸쳐 분포시키면서 지역의 제사 대상을 국가의 제사체계 내로 흡수하고 신앙적 통합을 꾀한 것이다.
신문왕이 즉위한 이후에는 왕권을 전제화하는 과정에서 지방제도, 군사제도 등에 대대적인 정비가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의 마지막 정체성이 남았던 보덕국도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백제 고지를 모두 확보하고 당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한 신라의 입장에서 더 이상 보덕국을 존치시키고 대우해 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로서는 적당한 시점에 보덕국을 해체하고 그 땅과 백성을 흡수하고 통합해야 했다.
결국 683년에 이르면 보덕왕 안승을 왕경으로 불러들여 소판의 관등과 김씨 성을 하사함으로써 보덕국을 통합하였다. 이듬해인 684년 안승의 조카 대문이 금마저에서 모반을 꾀한 혐의로 주살당하였고, 그를 따르던 무리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바로 진압되었다(임기환, 2003; 정선여, 2013). 이후 686년에 고구려 유민에 대한 신라 관등의 사여가 단행되었는데, 이는 보덕국의 통합과 반란의 진압 이후 제시된 일종의 회유책이라 할 수 있다. 이때 신라의 관등을 수여받은 고구려 유민은 안승을 따라 신라 왕경으로 이주한 사람에 더하여, 666년 연정토와 함께 신라에 귀부한 사람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정선여, 2010).
2) 신라의 고구려 고지 지배범위
『구당서』에는 668년 고구려 멸망 당시 당이 그 영토에 대해 취한 정책이 정리되어 있다. 고구려는 멸망 전에 5부로 나뉘어져 176성, 69만 7,000호가 있었는데, 멸망 후 “그 땅을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하고, 또 안동도호부를 두어 통관(統管)케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추장(酋長) 가운데 공이 있는 자를 뽑아 도독(都督)·자사(刺史) 및 현령(縣令)을 제수하여 화인(華人)과 함께 백성을 참리(參理)하게 하였”으며,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유인궤를 보내어 군사를 통괄하고 진무케 하였다”는 조치가 나열되어 있다.
같은 책 설인귀전에는 “고구려가 항복하자 설인귀에게 조서를 내려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유인궤와 함께 평양을 유수(留守)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당은 새로 차지한 고구려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고구려 옛 수도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면서 설인귀를 도호에 임명하였고, 고구려 정벌의 부사령관이었던 유인궤에게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또한 지방에는 도독·자사·현령 등 토착인 관리를 두고 도호부로 하여금 그들을 통괄하게 하였다(김종복, 2010; 장병진, 2016).
이후 신라와 당 사이에 전쟁이 진행되고, 676년 당이 후퇴한 이후 신라는 백제 고지뿐 아니라 고구려의 영토까지도 관할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라가 관할하게 된 고구려 고지의 범위는 어디까지였을지에 대해서 의견이 나뉜다. 고구려 멸망 이전 신라의 서북쪽 경계에 대해서는 568년에 북한산주를 폐지하면서 설치한 남천주(南川州)가 한강의 이북을 관할하고 있었고, 동북쪽 경계와 관련하여서는 668년 설치한 비열홀주(比列忽州)가 원산만 일대까지 관할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676년 신라와 당 사이의 전쟁이 종결된 이후 신라의 북쪽 경계가 얼마나 확장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문제는 최근 재차 논의되고 있는 삼국통일전쟁론 및 백제통합전쟁론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삼국사기』 신라본기8 신문왕12년 기사에 대한 해석이 중요하다.
[신문왕 12년(692)]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그러나 생각하건대,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질고 덕망이 있었으며, 더구나 생전에 어진 신하인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사(政社)를 돌보아 일통삼한(一統三韓)하였으니 이룩한 공적이 많지 않다고 할수 없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 내용은 무열왕에게 태종 존호를 추존한 경위를 밝힌 답신의 일부이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일통삼한’이라는 표현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는 근거로 자주 이용된다. 삼한이 곧 삼국을 뜻하며, 신라가 삼한을 일통했다는 것은 삼국을 통일했다는 의미라고 보는 것이다.
일통삼한에 대해서는 관련된 문자자료가 제시되고, 그에 대한 해석 문제도 논의되었다. 먼저 임해전지(臨海殿址)에서 출토된 ‘의봉4년개토(儀鳳四年皆土)’ 명문기와에서 나온 ‘개토’ 표현이 주목을 받았다. ‘의봉 4년’은 문무왕 19년(679)에 해당하며 ‘개토’는 불교 경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국토(國土) 혹은 전토(全土)와 같은 말로 보아, 신라가 삼국 통일을 기념하여 674년에 월지를 축조하고 679년에 임해전을 중수한 것으로 파악하였다(大坂金太郞, 1969).
한편 청주운천동사적비(淸州雲泉洞寺蹟碑)의 ‘합삼한이광지(合三韓而廣地)’에 대한 검토도 이뤄졌다. 비에 등장하는 ‘수공2년(壽拱二年)’은 686년(신문왕6)으로, 이해는 보덕국이 해체되고, 9주와 5소경이 정비된 해이다. 이와 연관하여 ‘합삼한이광지’라는 구절은 삼국의 통합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가 통합정책을 취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삼국 백성의 동질성에 기반한 일통의식으로 파악했다(노태돈, 1982).
한편 두 문자자료를 둘러싼 반론도 제시되었다. 먼저 ‘의봉4년개토’ 명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개토’의 ‘토’를 오행과 관련하여 시간성을 반영한 표현으로 보면서, 기와 제작의 연월일이 납음(納音)의 오행에서 ‘모두 토(皆土)’에 해당하는 것을 말해준다는 새로운 해석도 제시된 바 있다(이동주, 2013). 아울러 청주운천동사적비에서 확인되는 독자적인 천하관은 당에 사대적이었던 신라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삼한일통을 달성한 고려 태조의 업적에 부합하며, 비의 건립시기 역시 686년경이 아니라 나말려초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제출되었다(이기동, 2005).
이상의 논쟁이 여전히 진행 중인 상황이지만, 신라가 확보한 고구려 고지의 범위가 어디까지였을까 하는 문제는 이와 별도로 검토 가능하다. 이 문제는 고구려 ‘남쪽 경계’가 어디였을지의 문제와 관련되는 것이며, 결국 신라의 영역이 대동강 이남을 포함하였을까의 문제로 귀결된다.
신라가 확보한 고구려 고지의 범위를 명확하게 알려주는 사료는 없지만, 『삼국사기』 신라본기7 문무왕15년 2월조에는 “백제 땅을 많이 차지하고 마침내 고구려 남쪽 경역까지 주와 군으로 삼았다”고 하였고, 『신당서』에도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차지하여 마침내 고구려 남경(南境)에 이르게 되었다. 상주·양주·강주·웅주·전주·무주·한주·삭주·명주의 9주를 설치하고, 주에는 도독을 두어 10군 내지 20군을 통솔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신라와 당 사이의 전쟁이 끝나갈 무렵 신라가 차지한 영토가 고구려의 남경에 이르렀고, 그 지역을 대상으로 주군으로 삼은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한다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그 영토가 대동강-원산만 선에 이르렀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다만,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한데, 이 사료는 두 방향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신라가 675년 고구려의 ‘남쪽 경계’에 이르기까지의 영역을 주군으로 삼았다고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675년 신라가 백제 고지뿐 아니라 고구려의 ‘남쪽 경역’까지 차지하고 이를 주군으로 삼았다는 것이다(김영하, 2014). 이와 같은 해석의 차이는 당 태종과 김춘추의 협상 과정에서 신라에게 할양하기로 한 “평양 이남 백제 토지(平壤已南 百濟土地)”에 대한 이해와도 결부된다.
고구려의 남경(南境)은 김유신이 한강과 칠중하를 건넌 후 진입한 고구려의 ‘남쪽 경계’로서 임진강 일대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군과 거란군, 말갈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리던 신라가 675년에 당군과 교전한 전선도 천성(泉城), 매소성(買肖城), 칠중성(七重城), 석현성(石峴城) 등 임진강 일대에 형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보면 당시 신라의 서북경이 대동강 일대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신라가 “마침내 고구려 남경에 이르렀으므로 주군을 삼았다”는 『삼국사기』의 표현은 “남경에 이르게 되었다”는 내용과 “9주를 설치하였다”는 내용이 구분되어 있는 『신당서』의 해당 부분을 하나로 엮어 서술하면서 오해의 여지를 남기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신라 동북경의 경우 원산만에 이르고 있었다고 본다. 675년에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요새를 설치하고 철관성(鐵關城)을 축조한 뒤 아달성(阿達城), 적목성(赤木城)에서 말갈군과 교전했으며, 676년에는 당 군대가 도림성(道臨城)을 내침한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신라가 이 지역을 영역화한 것은 735년에 당으로부터 패강 이남 영유를 허락받은 뒤의 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 이전 신문왕 대에 지방통치체제 및 이와 연동되는 군사제도를 일제히 정비하였을 당시에도 신라는 한강 이북에 많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당의 지배력 약화를 틈타 694년 송악성(松岳城)과 713년 개성을 축조하였지만, 이 경우도 해당 지역에 대한 영역화라기보다는 소극적인 진출로 평가할 수 있다. 735년 이후가 되어야 대동강 이남을 영유하게 된 신라는 경덕왕 대(742~764)와 헌덕왕 대(809~825)에 이르러 예성강 북쪽과 대동강 남쪽 사이에 14개 군현을 설치하였고, 782년에는 발해에 대한 방위책으로 패강진(浿江鎭)을 설치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토대로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전의 영역과 신라-당 전쟁 이후 영역을 비교해보면, 신라의 북쪽 경계가 크게 개척된 것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김영하, 2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