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고구려 멸망의 역사적 의미
5장 고구려 멸망의 역사적 의미
오늘을 살아가는 이 땅의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든 ‘고구려’라는 나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큰 숨을 가다듬어 보았던 경험을 누구나 한 번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고구려가 역사의 기억 저편에서 마치 신기루처럼 아른거리는 나라이면서, 소 심줄처럼 강하면서도 질기게 버티어 온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전사들의 나라라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박경철, 2004).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이러한 고구려의 최후를 “보장왕(寶藏王) 27년(668) 가을 9월 이적(李勣)이 평양(平壤)을 함락시켰다. …그 5일 뒤 신성(信誠)이 성문을 열자, 이적이 군사를 풀어 성 위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성에 불을 지르게 하였다. 남건(男建)은 제 손으로 목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왕과 남건 등을 사로 잡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고구려의 멸망에 관하여 유교주의적 교양에 젖어 들어가던 김부식(金富軾)을 비롯한 고려 지식인들의 시대적 한계가 노출된 ‘사론(史論)’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이강래, 1998),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와 관련된 의미 있는 논의(震檀學會, 1968; 鄭媛珠, 2012)는 매우 아쉬운 편이다. 이러한 우리 학계의 동향은 신라의 ‘통일전쟁론’과 ‘삼국통일론’의 유의미성을 천착함에 그 관심의 초점이 모여짐에서(국사편찬위원회, 1981; 李萬烈, 1985) 비롯된 결과일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우리 학계에서의 고구려사의 전개에 관련된 여러 논의가 주로 정치사적 측면에서 이루어져 오고 있음(여호규, 1997; 임기환, 2007; 김현숙, 2007)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이 글은 이러한 성과들에 유념하면서도 새로이 ‘전쟁’이라는 준거 시점에 입각하여 고구려가 걸어온 700여 년 궤적을 되새김질함으로써 7세기 동아시아 국제전쟁의 소용돌이를 마무리지었던 고구려 멸망의 역사적 의미에 대한 고민을 풀어나가 보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