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7세기 동아시아 국제전쟁과 고구려의 멸망
2. 7세기 동아시아 국제전쟁과 고구려의 멸망
6세기 말 이래 중국은 진·한 제국에 이은 한족 세력의 제2 팽창기를 맞게 된다. 곧 수·당 제국은 중원을 재통일하고 자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세계체제 및 그 질서를 주변 여러 국가와 세력들에게 강요하게 된다. 이제 수·당 양국은 조공·책봉을 매개 기제로 동아시아 세계체제 질서, 곧 중국을 중심으로 한 억압적 평화체제(pax-sinica system)를 정립함으로써 자국의 궁극적 안전보장을 담보코자 하였다.
7세기 초 수에 갈음하여 중원을 재통일한 당의 세계정책 또한 자국의 우월한 군사역량을 바탕으로 하는 동북아 세력구도의 재편을 위해 추진되고 있었다. 당이 국초의 소극적 대외정책에서 보다 적극적인 그것으로 점진적으로 이행해 나갔음은 수와 마찬가지 수순을 밟았다고 볼 수 있다. 곧 수·당은 국초 북아시아 방면의 돌궐과 동북아 쪽의 고구려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국의 대외정책 모두 어느 정도 국내정세가 안정됨에 따라 공세적으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양국은 먼저 돌궐을 군사적으로 제압한 후, 그 힘을 동북아 방면으로 투사하기 시작했으며, 그 주 타격 대상은 고구려였던 것이다.
아울러 6세기 중반 이래 한강 유역 영유권 문제를 빌미로 신라와 백제의 매상공벌(每相攻伐) 상황이 연출되고, 고구려와 신라 간에 주적관계가 성립된 상황하에서 신라는 대당 경도(傾倒) 정책을 국가 생존전략으로 선택하게 된다. 이렇게 격화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의 상쟁은 당으로 하여금 동북아 지역의 세력균형자를 자임케 함으로써 자국의 전략적 위상을 더욱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박경철, 2006).
5세기 집권적 지배체제의 정립 이후 잠재·내연되어 오던 지배집단 간의 갈등은 그 제국적 지배질서 및 체제가 이완·약화되는 시점에 이르러 내부 무장충돌로 현실화되어 나타나면서 제국적 지배구조의 동요·와해를 재촉하는 실마리가 되었다(林起煥, 1992; 鄭媛珠, 2012; 박경철, 2018). 6세기 중반경 양원왕(陽原王) 즉위 시 발생한 지배집단 내부의 유혈충돌은 그러한 현상의 첫 번째 표출이었고, 642년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집권은 그것을 마무리하는 정변이었다.
곧 6세기 중반 고구려는 귀족연립정권의 운영을 통해 그 갈등의 해소책을 구했던 것이다(林起煥, 1992; 盧泰敦, 1993; 鄭媛珠, 2012). 그러나 7세기 중반 연개소문의 정변은 그러한 과도기적 체제의 파탄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물론 논자에 따라서는 연개소문의 집권이 영류왕(榮留王)의 왕권강화 기도에 대한 반동이었다고 보기도(鄭媛珠, 2012) 한다.
연개소문 정권은 642년 유혈쿠데타(coup d'Etat)로 집권한 이래 군사적 팽창정책의 지속적 추진만이 국가 및 그 지배집단의 생존기반을 안정적으로 담보할 수 있다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종래 대륙정책 관철을 추구하는 연장선상에서 대당 강경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당 태종이 고구려 정벌 의지를 노골화하기 시작한 시점이 연개소문 정변 이듬해인 643년인 점도 이런 연개소문의 성향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 연개소문이 주도하는 당과의 전쟁은 몇 가지 내재적 취약점을 갖고 있었다. 먼저 이런 정치체제는 당시 국가권력 정통성의 표상인 국왕권을 허구화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연개소문 정권은 국가권력 기제의 실질적 운영 주체이지만, 그 권력행사상의 정당성(legitimacy)에 있어 상당한 하자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이런 체제는 국가권력 집중현상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의 자율성(state autonomy)이 훼손되는 심각한 파행상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孫浩哲, 1989). 따라서 위기관리체제를 자임한 연개소문 정권 아래서 여당전쟁의 실효적 수행을 담보하는 국가적 통합도가 눈에 띄게 약화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여당전쟁을 수행하던 고구려 군민이 간헐적으로 보여주는 무력함과 적전 분열상은 이전 여수전쟁 당시 그들이 보여준 전의(戰意)와 확연히 분별되고 있음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치체제의 정당성의 하자(the crisis of legitimacy)는 그 체제의 효율성을 저하시키고(the crisis of efficiency), 나아가 국가의 생존 문제 즉 정체성의 위기(the crisis of identity)마저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孫浩哲, 1989).
한편 국내정세의 불안은 대외적 갈등행위를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李相禹, 1987). 어쩌면 연개소문 정권은 국내에서 여러 집단의 반발을 무마하는 수단으로 대외적인 갈등을 부각시켜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함으로써 자기체제의 안정과 결속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대당 강경정책은 당 측의 집요한 고구려 공멸(攻滅) 기도가 충분한 빌미를 제공해주고 있었던 것임은 물론이다(朴京哲, 2005a; 朴京哲, 2007a; 鄭媛珠, 2012; 박경철, 2018).
동몽골(東蒙古) 지역은 현 중국 내몽골자치구 대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 남쪽 기슭이다. 동몽골은 북위·수·당 대의 요해(遼海), 현 내몽골 적봉시(赤峯市) 영성현(寧城縣)이 중심인 송막(松漠) 지방, 그리고 보다 후대에 ‘열하(熱河)’로 불린 북경(北京) 동북부 지방인 승덕(承德) 일대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훗날 청대에까지 몽골 지방 제압과 만주와 서번제융(西蕃諸戎)에 대한 패권의 안정적 관철을 담보함에 있어 ‘천하지뇌(天下之腦)’가 되는 지역이라고 인식된 바 있다(閔斗基, 1963). 고구려의 요해 지역 진출 노력은 군사전략적 측면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이 지역을 매개로 한 요해·송막 지방 → 내몽골 → 외몽골 → 서역(西域, silk road)으로 이어지는 교역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다는 지적(鄭媛珠, 2012)도 있다. 따라서 고구려는 일찍이 이 동몽골 지방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이 방면에서의 세력 확산에 부심했던 것이다(朴京哲, 2005b; 朴京哲, 2007a; 鄭媛珠, 2012).
6세기 말 수·당 세계제국 성립을 주도한 세력은 무천진(武川鎭) 군벌, 즉 관롱집단(關隴集團)이었다(柳元迪, 1989). 무천진은 종래 북위가 내몽골 방면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한 하북6진(河北六鎭) 중 하나였다. 이 무천진의 운영 주체인 호화(胡化)된 한인(漢人) 무장(武將) 집단은 동몽골의 전략적 가치를 숙지하고 있는 수·당 건국의 주체세력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동몽골 지방에서 고구려의 세력 부식 노력과 북아시아 초원 여러 세력과의 연계 가능성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함과 동시에 군사적 대응조치를 모색하고 있었다.
훨씬 뒷날 후금(後金)-청의 중원 지배가 만주 여진족의 내몽골 몽골족과의 연합전선 구축에서 창출된 파괴력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盧基植, 1999)을 생각해 볼 때, 관롱집단의 우려가 결코 기우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 관롱집단의 관중(關中) 우선시 정책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항시 유목세력의 동향을 주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또 실제 이 점이 여당전쟁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徐榮敎, 2003; 朴京哲, 2007a).
고구려는 국초 이래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군사적 국세 팽창정책의 연장선상에서 동몽골 문제에 접근하면서 동북아에서의 독자적 생존권, 패권의 보존 및 그 확산을 담보하는 나름대로의 대륙정책을 관철해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수·당 제국은 동아시아를 중국 중심의 일원적 지배질서로 재편하여, 자국의 안보를 궁극적으로 보장하려는 세계정책을 관철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점에 비추어, 특히 동몽골 지방에서 거란족 지배권의 향방을 둘러싼 고구려 ↔ 수·당↔ 돌궐 사이의 각축전은 고구려의 대수·당 70년 전쟁 발발 원인 가운데 유력한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박경철, 2007a; 鄭媛珠, 2012).
관련 사료를 보면, 643~644년 당 태종은 고구려와의 개전(開戰) 명분을 다양하게 제시하고 있다. ‘시군(弑君)’, ‘살주(殺主)’, ‘요동고중국지(遼東故中國地)’가 그것이다. 이 외에도 ‘침신라(侵新羅)’를 들 수 있다(『삼국사기』). 또 당 측은 645년 전쟁의 명분으로서 요동 회복과 수의 패전에 대한 설욕도 거론하고 있다.
당 태종은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이라는 일종의 쿠데타를 통해서 왕위를 쟁취한 바 있다. 이러한 그가 연개소문의 ‘시군’을 전쟁 구실로 거듭 언급함은, 역설적으로 왕위 획득 과정에서 자신의 취약한 정당성을 연개소문을 징벌하기 위한 전쟁 수행을 통하여 치유하고자 한 정치적 보상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朴漢濟, 1993).
그뿐만 아니라 당이 연개소문의 ‘시군’을 전쟁 명분으로 자주 들먹인 것은 고구려 측 항전의지를 약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홍보·심리전 전략의 일환으로, 실제로 이러한 당 측의 의도는 효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이강래, 1994). 아울러 고구려에 중국적 군신 간의 의리를 강제함은 동북아시아 일대에 중국 중심적 예교질서를 관철코자 한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朴京哲, 2007a).
한편 당이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잦은 침공을 질책한 행위 역시, 당 중심의 세계질서 내에서 각국 위상의 자의적인 자리매김과 안정을 강요함으로써 중국 중심의 억압적 평화체제를 정립코자 한 욕구가 표출된 것이다. 결국 당의 전쟁 목적은 드러낸 명분과는 달리 ‘천하에서 아직까지 평정되지 않은 본중국지지(本中國之地)’였던 요동의 고구려를 공멸시키는 것이었다(朴京哲, 2007a).
6세기 이래 고구려가 확보한 변방 공간들은 항시적으로 구조적인 불안정성을 가진 채 경영되고 있었다. 고구려의 종심방어전략(縱深防禦戰略)은 이러한 불안정한 변방 공간을 방어종심으로 운용하는 전수방어(專守防禦)전략이었다. 고구려가 시종일관 이러한 전략 개념에 입각하여 대당전에 임한 것은 전력의 선택·집중 원칙을 애당초 포기한 상태로 전쟁을 수행하였음을 뜻한다. 그 결과 고구려는 처음부터 전쟁 주도권을 상실하고 당의 군사행동에 대해 분산적·즉흥적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즉 고구려는 자기가 선택한 전장에서 이미 자리 잡고 싸우고자 하는 당군을 상대로 한 비효율적 전력 운용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23년간의 지루한 소모전과 지구전을 치르면서 방어종심의 축차적 퇴축과 인적·물적 자원을 포함한 국력의 고갈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645~648년 제1차 여당전쟁의 주 전장은 혼하(渾河) 및 태자하(太子河) 유역 일대였다. 또 654~659년 소강기의 군사충돌에서도 고구려는 이 방면에서 지속적인 종심 타격을 받고 있었다. 661~662년 제2차 여당전쟁의 경우, 전장은 압록강 유역으로 확대되는 한편 평양성 공위전까지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667~668년 제3차 여당전쟁 시기에는 두만강 유역을 제외한 전 영역이 전장화되어 갔던 것이다. 이러한 방어종심의 축차적 퇴축은 결국 종심방어전략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던 셈이다.
고구려가 채택한 종심방어전략의 핵심은 제 성 네트워크의 실효적 가동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 중심의 방어체계는 중앙통제력이 약화될 경우, 개개 성들의 독자적 운동성을 강화시키는 한계를 드러내게 된다. 특히 대당전쟁 말기 지방 군사력의 분산적 운용과 이탈로 말미암아 왕도인 평양성이 쉽사리 포위·함락되는 약점을 노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여당전쟁 당시 당이 황해 제해권을 확고히 장악함을 바탕으로 작전범위를 임의로 확대시킬 수 있었고, 병참 역량의 안정적 운용을 기할 수 있었던 점도 이 전쟁의 승부를 가르는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된다.
고구려는 본질상 내선적(內線的)인 위치에서 종심방어전략으로 당과 맞섰는데, 상대적으로 우세한 적의 군사역량에 맞서 의연히 대처해나갔다. 그러나 612년 이래 요서(遼西) 지역에서 공제(控制) 능력을 상실했고, 645년 이래 요동 지역이 항시 전장화됨에 따라 고구려 최전선으로서 이 지역의 전반적인 방어역량의 소모는 극대화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요해 방면에서의 고구려세의 퇴조는 요동 지역의 전략적 부담을 더욱 가중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백제 멸망(660) 이후 나당군의 북상 압력에 의한 제2전선의 형성 위협은 군사적으로 취약한 대동강 유역 이남 지역 방위에 있어 새로운 어려움을 더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고구려의 대당 전선상의 치명적인 균열은 666년 정쟁으로 실각한 남생(男生)이 당으로 투항한 전쟁 지도부의 분열이었다. 연개소문 사후 일어난 자식들 간의 권력다툼은 절대적 권력자의 죽음이 몰고 올 사후 불안정성(post-death instability)의 단적인 예가 된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생전 절대자 권력의 안정성에 비례하여 증폭되는 것이다(Richard K. Betts & Samuel Huntington, 1985; 1986). 절대권력체제 아래에서 정보와 권력의 흐름은 제도보다 인맥에 얽히게 되며, 그것이 파벌 형성을 부채질하게 된다. 따라서 절대적 권력의 공백기에는 파벌 간의 투쟁이 결정적 파국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
이 문제와 관련, 논자에 따라서는 당의 고구려 정벌전략이 요동 공략 → 평양 직공 → 내분 유도공작이라는 3단계로 진전되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이 견해는 평양 직공전략의 실패 후 당에 의한 고구려 분열유도공작의 소산이 연개소문 사후 벌어진 고구려 내분이라고 본다(金瑛河, 2000).
결국 667~668년 요동 지역 및 압록강 유역에 대한 당의 마지막 축차적 군사행동과 고구려 최대의 후방거점인 송화강 유역 실함은 고구려 ‘제국’ 자체의 전면적 붕괴를 예고하는 사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보장왕27년(668) 9월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고구려는 시조 동명왕(東明王)부터 보장왕까지 28대 705년의 역사에 종언을 고하게 되었던 것이다(박경철, 2007a; 鄭媛珠, 2012; 박경철, 2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