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고구려 멸망의 역사적 의미
3. 고구려 멸망의 역사적 의미
고구려는 국가형성기 이래 생태환경적·지정학적 여건의 취약성을 전방위적 군사 팽창정책으로 상쇄하면서 전형적인 전제적 군사국가로의 발전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5세기 이후 광개토왕·장수왕·문자왕 대 이래 하나의 ‘왕국’ 단계를 넘어선 동북아시아 일대의 패권을 장악하고 독자적인 생존권을 경영하는 제국적 지배구조에 입각한 다종족국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朴京哲, 1988; 朴京哲, 2005a).
전제적 군사국가, 군사귀족제, 신분국가는 고구려에 내재한 기본적 국가의 성격으로 거론할 수 있다. 물론 백제·신라 역시 이 점에 관한한 마찬가지인 이형동질적(異形同質的) 사회였지만, 고구려는 그 선도적 국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남다른 바가 있었다. 아울러 고구려는 한반도 남부의 백제·신라와 지속적으로 접속하면서 화전(和戰) 양면 관계에 있어 높은 상관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발해와 신라와의 그것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었을 뿐이다. 이 점은 고구려가 당시 우리 민족사 전반의 흐름을 꿰뚫고 흐르는 정치·경제·군사·문화적 동질성을 나제 양국과 상당 수준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고구려가 성장·발전하고 있던 시기에 중원의 역사는 한 제국의 쇠퇴 이래 위진남북조시대로 일컬어지는 분열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한족과 여러 유목민족이 뒤엉켜 연출했던 이 혼돈 속에서 분출된 파괴적 에너지는 주변 여러 민족에게 재앙적 수준의 충격을 강요할 가능성이 매우 컸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가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우월한 군사역량을 과시하면서 민족사의 자주적 진전을 담보하는 방파제 역할을 다했던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기원전 2세기 고조선(古朝鮮), 정확히는 위만(衛滿)조선과 한 제국과의 전쟁은 한(漢) 민족 제1 팽창기인 진·한 제국 시기에 우리 민족이 감당해야 했던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에서의 기회비용이었다. 또 그 제2팽창기인 수·당 제국 시기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 역시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朴京哲, 2007a).
6세기 말 이래 중원의 수·당은 오호십육국~남북조시대라는 분열된 중원을 통일한 동아시아 패권제국으로 새로이 등장하고 있었다. 수·당 제국은 동아시아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일원적 지배질서로 재편하고, 이러한 억압적 평화체제를 매개로 자국의 궁극적 안전보장을 담보코자 하였다. 이러한 수·당의 세계정책은 주변 여러 국가·민족·집단들의 무장 해제와 세력 재편, 심지어는 공간적 생존 영역의 재조정을 강제하는 등 매우 폭력적인 강제기제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한편 고구려는 국초 이래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군사적 국세 팽창정책의 연장선에서 동북아시아에서의 독자적 생존권과 패권의 보존 및 그 확산을 담보하는 나름대로의 대륙정책을 관철해 나가고자 했다.
『수서(隋書)』 및 『삼국사기』 등 당시 정황을 기록한 자료들은 고구려의 집요한 말갈, 거란에 대한 패권추구정책에 대한 수의 불편한 심기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이 점은 당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자료들은 당의 고구려 공격 원인이 요동에 대한 영유권 회복과 수의 패전에 대한 설욕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당 측은 645년의 전쟁이 수의 고구려 정벌 명분이었던 거란·말갈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천하평정을 향한 마지막 미답지(未踏地)를 짓밟기 위함임을 명시하고 있다(『당서(唐書)』·『수서(隋書)』 및 『삼국사기(三國史記)』). 이 사실은 당의 세계정책이 오직 고구려의 공멸만이 거란·말갈에 대한 지배권 문제로 상징되는 동북아 세력 재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인식했음을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다(朴京哲, 2007a).
따라서 여당전쟁은 각자의 핵심적 국익을 추구하려는 고구려의 대륙정책과 당의 세계정책이 정면충돌하면서 빚어낸 동아시아 국제전쟁(598~677)의 가장 중요한 결절점으로서 애당초 타협이 불가능한 제로섬(zero-sum)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 점에 비추어 논자들 사이에서 거론되어 온 연개소문 정권의 외교정책의 경직성 문제 등은 신중히 검토해 볼 여지가 있다.
종래 우리 학계는 나당전쟁(羅唐戰爭)을 계기로 신라가 백제인의 대부분과 고구려인의 상당 부분을 흡수하여, 여러 갈래로 나뉘어 각자의 길을 걸었던 삼국인이 언어·문화·정치체제·사회구조를 같이하는 하나의 민족으로서 통합·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보고 있다(李萬烈, 1985). 즉 이러한 입장은 신라가 한반도의 대부분을 통일함으로써 우리 민족을 한 울타리 안에서 단일민족으로 발전하게 만드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국사편찬위원회, 1981).
그런데 오늘날 학계 일각에서 이러한 신라의 삼국통일론에 대해 비판적 인식이 제시된 바 있다. 이러한 논의는 발해의 존재에 유의하면서 신라의 삼국 통일이 내포한 근본적 한계에 주목하는 입장에 서서 677년 이후 우리 역사를 지칭해왔던 통일신라시대론의 대안으로서 남북국시대론의 적실성을 논하고 있다(金瑛河, 1994).
같은 관점에서 신라가 당과 함께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우리 역사 최초의 단일 정통왕조를 세웠지만, 신라가 고구려를 완벽하게 통합하지 못한 한계를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30년 후 발해가 건국되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따라서 이런 입장 또한 발해 건국 이후 우리 역사를 ‘남북국시대’라 지칭할 것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한규철, 1994).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한번 숙고해보아야 할 점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으로 몰고 간 나당동맹(羅唐同盟)과 관련된 신라의 ‘자주성’ 시비 문제다. 6세기 중반 이후 한반도에서의 신라의 강세는 기존 삼국 간 힘의 구도를 깨는 새로운 무장세력의 대두를 뜻하였다. 또 이 사실은 잇닿은 7세기 동아시아 국제전쟁의 발발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이 점은 당시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의 현장이 보다 상위의 동아시아 국제구조·질서의 변화상과 연계되어 움직인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기에 벌어지고 있던 일민족-다국가체제 구도가 빚어낸 살벌한 경합 상황 아래에서 신라가 대당 경도 정책을 국가 생존전략으로 선택함(박경철, 2007b)을 오늘날의 자주성 인식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만은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방을 아우르는 방대한 영역에 걸쳐 5부, 176개 성을 기본틀로 하여 69만여 호의 주민을 통치하여 온 바 있었다. 당은 고구려를 멸한 후 이곳을 평양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중심으로 9개 도독부(都督部)와 42개 주 및 100개 현으로 재편하고 자의적인 사민정책 등을 구사하며 무단적으로 지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의 이러한 고구려 고지(故地) 지배의지는 잇달아 일어나는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과 말갈·거란 등의 동요로 애당초부터 관철하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당의 자국 중심 세계정책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 제국의 공세적 팽창정책은 고종 시기의 고구려 멸망 이후 소극적으로 바뀌어 갔다. 이 사실은 티베트에서 토번(吐蕃)의 강세와 동북아시아에서 나당전쟁의 패배(677) 및 발해의 건국(698)과 북아시아에서 7세기 말 돌궐의 재발흥, 8세기 중엽 위구르(回紇)의 흥기라는 역사적 전개와 무관하지 않다(동북아역사재단 북방사연구소 편, 2021).
고구려는 7부체제라는 얼개를 운용하면서 말갈의 거의 전부를 통어·경영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이러한 지배장치가 해체되면서 흑수부(黑水部)를 제외한 나머지 말갈 주민들은 자신들의 생존기반 확보를 위한 세력 재편의 새로운 구심점의 출현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고구려 유민세력이 주도하고 말갈이 이에 가세하여 오늘날 중국 연변(延邊) 지방을 중심지로 698년 건국한 새로운 나라가 발해인 것이다.
고구려는 여당전쟁을 치르면서 혼하 및 태자하 유역의 요동 지방과 국내성을 중심으로 하는 압록강 유역 그리고 부여성(扶餘城)이 있는 송화강 유역 및 평양성이 중심이 되는 대동강 유역 모두가 항시 전장화되어 간 바 있다. 다만 책성(柵城) 중심의 두만강 유역만이 상대적으로나마 참혹한 전화를 모면하게 된 점은 이곳이 훗날 발해 건국의 입지로 거듭날 수 있었던 배경으로 판단된다(盧泰敦, 1981). 따라서 발해의 건국은 그 주도세력과 지정학적 배경 등을 고려할 때 30년 전 사라졌던 고구려 역사와의 연속선상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한편 거란·말갈은 중원 여러 왕조, 유목제국, 고구려-발해의 멍에 아래서의 생존을 위해 주변 부용세력으로서의 존재양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7세기 고구려, 그리고 10세기 발해의 멸망을 계기로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자기 발전의 길을 걷게 되어 10세기 초엽의 요(遼)와 12세기 초엽의 금(金)이라는 정복왕조를 건립하게 된다(동북아역사재단 북방사연구소 편, 2021).
종래 고구려는 선비·유연·돌궐·말갈·거란 등과의 지속적인 상관관계를 견지하면서 중원 여러 국가를 압박하는 대외정책적 구도하에서 국가를 경영한 바 있었다. 한 선학은 고구려의 멸망이 우리 국사상의 ‘불행’을 초래했음을 지적하면서, 발해의 흥기에도 불구하고 만주의 핵심인 요동 서남부가 당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발해의 멸망 이후 우리 역사의 공간적 전개 무대가 ‘반도국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안타까워한 바가 있다(震檀學會, 1968).
실제로 고구려와 발해의 멸망 이후 우리 민족은 만주에서의 역사 전개에서 방관자가 되어 유의미한 역할을 할 기회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곳을 매개로 한 북아시아 혹은 내륙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세력과 접속·조우를 할 빌미마저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우리 민족은 이후 ‘만주’로 표상되는 내륙아시아의 관문에 접근할 기회마저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이후 우리의 역사는 거란·몽골·여진을 주역으로 하는 대륙관계사 진전의 객체가 되는 입장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바, 이는 고구려의 멸망이 바로 그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고구려와 발해, 특히 전자의 멸망 이후 우리 민족사 전개의 경제적 기반이 만주와 내륙아시아 유목사회와 공간적으로 격절됨에 따라 농경사회적 재생산구조가 확고히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패망을 전환점으로 이후 우리 역사상 정치적 기본 얼개 또한 남북조시대(혹은 통일신라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군사귀족제에서 유학적 이념에 기초한 문민지배체제로 이행하게 됨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결과 우리의 정치체제와 이데올로기 및 경제적 기반이 중원 왕조의 그것과 어느 정도 상사성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국망을 계기로 이후 우리 민족의 대외관계사는 주로 중원 농경제국과 손을 잡고 거란·여진·몽골 등 유목세력과 대결하는 관계망 속에서 진전되게 되었다. 이 점은 고구려의 멸망이 우리 민족 대외관계사 전개의 측면에서 패러다임(paradigm)이 일대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고구려의 멸망을 시발점으로 우리 민족사 전개의 공간적 장(場)이 한반도에 국한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지정학적 세계관의 왜소화와 역사인식의 지평선상에서의 공간적·심정적 자아 위축현상마저 경험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날도 우리가 이 점에 대해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