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부흥운동 및 고구려 유민 연구의 신자료
6장 부흥운동 및 고구려 유민 연구의 신자료
고구려 멸망 이후 그 고지(故地)의 동향과 유민(遺民)의 활동은 일찍이 연구자들의 관심을 끄는 주제였다(이병도, 1964; 노태돈, 1981a; 김현숙, 2004). 특히 고구려 부흥운동(池內宏, 1930; 양병룡, 1997; 임기환, 2003; 강경구, 2005; 조인성, 2007; 이정빈, 2009; 김강훈, 2022), 발해 건국의 배경(노태돈, 1981b; 김종복, 2004) 등과 관련해 다수의 연구가 제출되었다. 그러나 연구자들의 관심에 비해 자료 여건은 그리 좋지 못했다. 국내외 사서에서 적지 않은 정보가 확인되지만,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 합리적인 해석을 도출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러한 사료 현실은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일부 잘못된 해석이 비판되지 않고 답습되어 온 측면도 있었다.
최근 당대 묘지명(墓誌銘) 자료가 다수 축적되면서 자료의 한계를 조금이나마 보완할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었다. 새롭게 알려진 묘지명 자료들은 당에서 살아간 유민 일족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하고, 나아가 멸망 이전 고구려의 역사상을 복원하는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묘지명에 담긴 내용은 대체로 단편적인 사실을 적은 경우가 많아 그 자체만으로 당대의 실상을 복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묘지명이라는 자료의 성격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당대의 기록이 자유민 당사자들의 인식이 직·간접적으로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 묘지명의 사료 가치는 결코 낮게 평가할 수 없다. 따라서 문헌자료나 기존에 축적된 연구성과와 더불어 살펴본다면, 종래의 해석을 바로잡거나 이해를 더하는 자료로 활용하기에는 충분하다.
1920년을 전후해 세상에 알려진 고자(高慈), 천남생(泉男生)의 묘지명을 시작으로 고구려 유민묘지명에 대한 소개와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지 이제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났다. 1937년 나진옥(羅振玉)의 『당대해동번벌지존(唐代海東藩閥誌存)』에 천남생, 천헌성(泉獻誠), 천비(泉毖), 천남산(泉男産), 고자, 고진(高震) 등 고구려 유민 6명의 묘지명을 집록한 이후 한동안 새로운 자료가 보고되지 않았다가, 1990년대 들어서 사선의일(似先義逸), 이타인(李他仁), 고현(高玄)의 묘지명이 추가로 소개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자료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면서 현재까지 알려진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 자료는 30건에 이른다.
고구려 유민묘지명에 관한 논의는 최근 고구려사 연구의 한 흐름으로 지적할 수 있을 만큼 관련 연구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새로운 자료의 소개가 비약적으로 이루어진 결과다. 중국 내에서 수·당대 묘지명 자료의 발굴과 정리가 정책적으로 진행된 영향으로 자료가 급증하고 있으며, 같은 이유에서 앞으로도 새로운 자료가 추가될 가능성이 큰 만큼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이 글에서는 학계에 소개된 고구려 유민묘지명 자료의 전모를 간단히 소개하고, 고구려사 연구의 기초 자료로서 유민묘지명의 특징을 정리하고자 한다. 아울러 고구려 유민묘지명을 통해 알 수 있는 유민의 행적, 고구려 부흥운동의 전개 양상 등을 차례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