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구려 유민묘지명 자료 현황
1. 고구려 유민묘지명 자료 현황
먼저 현재까지 알려진 고구려 유민묘지명 자료를 개략적으로 살펴보자. 학계에 고구려 유민묘지명으로 소개된 자료는 모두 30건이다. 물론 그 주인공을 모두 고구려의 유민, 혹은 그 후손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인 견해가 적지 않지만, 일단 여기서는 학계에 고구려 유민묘지명으로 소개되었던 자료를 일괄해 소개하고자 한다. 묘주의 생몰년과 묘지명 제작연도를 괄호에 병기하고, 제작 시기가 빠른 순서로 정리했다.
(1) 고요묘(高鐃苗, ?~673, 673)
제명(題名)은 “대당 고 좌령군 원외장군 고요묘 묘지(大唐故左領軍員外將軍高鐃苗墓誌)”이다. 2007년 김영관 교수가 서안(西安) 비림박물관에서 발견해 학계에 보고했다(김영관, 2009). 개석과 지석의 세트를 모두 갖춘 상태이며, 서안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해질 뿐 구체적인 출토 정황은 알 수 없다. 묘주 고요묘는 『삼국사기』 보장왕27년조에 등장하는 소장(小將) 요묘와 동일인으로 파악된다. 『삼국사기』에는 당이 평양성을 포위했을 때 남건(男建)에게 군사를 위임받은 승려 신성(信誠)이 소장 오사(烏沙), 요묘와 함께 이적(李勣)에게 내응해 성문을 열었다고 전해진다.
묘지명에서는 묘주 고요묘를 요동인(遼東人)이라고 했으며, 고구려를 진한과 변한을 의미하는 ‘진변(辰卞)’으로 표현했다. 지문을 통해 묘주가 고구려를 등지고 당에 귀부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고구려 멸망 후 채 5년이 되지 않아 사망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당에서의 활동 기간이 짧았음에도 종3품의 좌령군 장군까지 올랐는데, 평양성 함락에 결정적인 공훈을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의 최종 관직에 비하면, 묘지명의 내용은 173자에 불과해 매우 단촐한 편이다.
(2) 고제석(高提昔, 649~674, 674)
제명은 “대당 우효위 영녕부 과의도위 천부군 고 부인 고씨 묘지(大唐右驍衛永寧府果毅都尉泉府郡故夫人高氏墓誌)”이다. 2012년 서안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며, 2013년 왕기의(王其禕)와 주효미(周曉薇)가 함께 소개했다. 묘지명에서는 묘주 고씨 부인의 이름이 제석이고, 본래 국내성인(國內城人)이라고 해 고구려 출신임을 분명히 했다.
증조부 복인(伏仁)이 고구려의 대상(大相)으로 수경성(水境城) 도사(道使)와 요동성(遼東城) 대수령(大首領)을 역임했고, 조부 지우(支于)가 당 태종이 직접 고구려에 침공했을 당시 투항했다고 한다. 고제석의 남편은 당의 우효위(右驍衛) 영녕부(永寧府)의 과의도위(果毅都尉) 천씨였다. 고구려 멸망 후 당에서 고구려 유민 가문 간에 혼인이 이루어진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증조부 복인의 관력은 고구려 말의 관제, 지방통치조직에 관한 이해에 약간의 시사점을 제공한다.
(3) 이타인(李他仁, 609~675, 677)
제명은 “대당 우령위군 증 우효위대장군 이타인 묘지명(大唐右領軍贈右驍衛大將軍李他仁墓誌銘)”이다. 1989년 서안에서 출토되었으며, 지석만 수습되었다. 묘지명에는 이타인이 요동 책주인(柵州人)이며, 당에 귀부한 후 옹주(雍州) 만년현(萬年縣)에 적을 두었다고 전한다. 그의 조부인 복추(福鄒)는 고구려에서 대형(大兄)이었고, 부친인 맹진(孟眞)은 대상(大相)의 지위에 있었다고 한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666~668년 중에 이적(李勣)에게 항복했다.
이타인은 이적에게 항복할 당시, 책주의 최고 책임자인 도독 겸 총병마의 지위에 있으면서 예하에 12개 성과 37개의 말갈 부락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보는 고구려 말의 주민 구성과 통치조직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매우 유용하다. 다만 이타인이 본래 말갈계인지, 고구려계 인물인지를 두고는 다소 이견이 있다(안정준, 2013).
이타인은 이적에게 투항한 후 당군의 일원으로 고구려 침공에 참여해 평양성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고구려 멸망 후 각지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부여 지역의 부흥군을 진압했다고 한다. 이타인묘지명은 입당 후 군공을 세운 유민의 행적이나, 고구려 멸망 후 부흥운동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있어 시사점을 제공한다.
(4) 천남생(泉男生, 634~679, 679)
제명은 “대당 고 특진 행 우위대장군 겸 검교우익림군장내공봉 상주국 변국공 증 병주대도독 천군 묘지명(大唐故特進行右衛大將軍兼檢校右羽林軍仗內供奉上柱國卞國公贈幷州大都督泉君墓誌銘)”이다. 묘주는 바로 연개소문의 맏아들 남생이다. 묘지명은 1922년 낙양(洛陽)에서 출토되었다. 2,093자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묘지명으로 가문의 계통에 대한 전승, 고구려 말 귀족 가문의 지위 세습, 정치 운영에 관한 정보를 비롯해, 고구려 멸망 전후의 동향과 안동도호부 재편 과정에서 남생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남생에 대해서는 『신당서』에 열전이 입전되어 있고, 『삼국사기』나 『자치통감』에도 관련 기록이 많이 남아있어 상호 비교, 보완이 가능하다.
(5) 고현(高玄, 642~690, 691)
제명은 “대주 고 관군대장군 좌표도위 익부 중랑장 고부군 묘지명(大周故冠軍大將軍左豹韜衛翊府中郞將高府君墓誌銘)”이다. 낙양에서 출토되어 천당지재(千唐誌齋)에 소장되어 있다. 국내에는 1998년 송기호에 의해 소개되었다. 고현의 자는 귀주(貴主)이고, 요동 삼한인(三韓人)이라고 했다. 증조부와 조부가 각각 도독과 평양성 자사를 역임했고, 고현이 천남생을 따라 당에 귀부했다. 이후 당이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할 때 선봉을 맡았으며, 고구려 멸망 후 당 변장으로서 많은 공을 세웠던 사실이 전한다.
입당 과정을 통해 천씨 가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689년 고구려 유민 병사를 선발해 돌궐 정벌에 참여할 때, 천헌성의 지휘를 받으며 함께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고족유의 지휘를 받으며 돌궐, 토번 전선에서 활약했다. 천헌성묘지명, 고족유묘지명과 아울러 당 변경에서 고구려 유민 출신 장수들의 활약과 유민 병력의 동원 문제를 파악하는 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6) 고족유(高足酉, 626~695, 697)
제명은 “대주 고 진군대장군 고군 묘지명(大周故鎭軍大將軍高君墓誌銘)”이다. 1990년 하남성(河南省) 이천(伊川)에서 출토되었다. 요동 평양인(平壤人)이라고 했는데, 고구려 귀족 가문 출신으로 평양성 함락 이전에 당에 귀부한 것으로 보인다. 입당 후 돌궐과 토번 전선에 투입되어 공을 세웠고, 특히 695년 천추(天樞) 조성 당시 고구려 유민의 대표 자격으로 참여했다(이문기, 2001). 천헌성 사후에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된 것인데, 이 때문에 고족유의 지위와 역할에 대해 여러 의견이 제기된다(최상기, 2023).
(7) 고모(高牟, 640~694, 699)
제명은 “대주 고 우표도위장군 고군 묘지명(大周故右豹韜衛將軍高君墓誌銘)”이다. 2012년 누정호(樓正豪)와 권덕영이 낙양의 비지탁편박물관(碑誌拓片博物館)에서 탁본을 발견했다. 탁본은 그보다 10년 전에 구입한 것으로 실물 자료의 출토 시기나 장소는 알 수 없다고 한다.
묘지명에는 고모가 ‘안동인(安東人)’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고구려와 관련해 진한(辰韓), 예맥(穢陌), 마읍(馬邑), 삼한(三韓), 동해지동(東海之東), 한향(韓鄕) 등의 표현이 사용되었다. 고모에 대해서는 『문원영화(文苑英華)』에도 관련 전승이 남아있어 비교 자료가 된다.
고모의 입당 시기나 고구려에서의 지위는 불분명하지만, 그가 기밀문서를 가지고 당에 투항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입당 후에는 변경이 아닌 금군(禁軍)으로 주로 활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제명에서 그의 관직을 종3품의 우표도위장군으로 기록했는데, 본문에는 그보다 높은 정3품의 관군장군 행 좌표도위대장군까지 역임한 것으로 기록된 사실은 의문이다.
(8) 고질(高質, 626~697, 700)
제명은 “대주 고 진군대장군 행 좌금오위대장군 증 유주도독 상주국 유성군 개국공 고공 묘지명(大周故鎭軍大將軍行左金吾衛大將軍贈幽州都督上柱國柳城郡開國公高公墓誌銘)”이다. 고질의 자는 성문(性文)이고, 요동 조선인이라고 했다. 아들 고자의 묘지명이 함께 전한다. 1990년 낙양에서 출토되었으며, 일찍이 발견된 고자묘지명에 등장하는 아버지 ‘고문(高文)’과 동일인이다.
묘지명에는 그의 가문이 고구려 건국 과정에 참여했고, 19대조 고밀(高密)은 모용연(慕容燕)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워 누대에 걸쳐 고위 관작을 계승했다고 전한다. 증조부 전(前)은 고구려에서 3품 위두대형(位頭大兄)을, 조부 식(式)은 2품 막리지(莫離支), 아버지 량(量)은 3품 위두대형 겸 대상으로 책성도독을 역임했다. 고질은 입당 후에도 무장으로 큰 공을 세우고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697년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 유민 병력을 모아 거란을 토벌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아들 고자와 함께 전투에 나섰으나, 포로가 되어 아들과 함께 마미성(磨米城)에서 전사했다. 이러한 사실은 발해 건국을 전후한 시기 요동 지역 정세를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9) 고자(高慈, 665~697, 700)
제명은 “대주 고 장무장군 행 좌표도위낭장 증 좌옥검위장군 고공 묘지명(大周故壯武將軍行左豹韜衛郎將贈左玉鈐衛將軍高公墓誌銘)”이다. 묘주 고자는 바로 고질의 아들이다. 7세기 말 거란의 반란으로 요서, 요동 일대가 혼란해졌을 때, 아버지와 전투에 나섰다가 마미성에서 함께 전사했다. 묘지명의 내용은 고질묘지명과 대동소이한데, 고질묘지명을 찬술한 위승경이 고자묘지명도 찬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 천헌성(泉獻誠, 649~692, 701)
제명은 “대주 고 좌위대장군 우우림위상하 상주국 변국공 증 우우림위대장군 천군 묘지명(大周故左衛大將軍右羽林衛上下上柱國卞國公贈右羽林衛大將軍泉君墓誌銘)”이다. 묘주 천헌성은 천남생의 아들이다. 남생이 동생 남건, 남산과의 권력 다툼에 밀려 국내성으로 달아난 뒤, 헌성은 아버지의 명을 받고 당에 투항 의사를 전했다. 입당 후 꾸준히 군공을 세우며 고관대작의 지위를 이었으나, 692년 내준신(來俊臣)의 무고로 목숨을 잃었다. 700년에 측천무후에 의해 신원되어 새로 장례를 치르고 묘지명을 제작했다. 천남생묘지명과 더불어 연개소문 가문의 행적, 남생 형제의 권력 다툼과 고구려 멸망 과정, 아울러 입당 후 남생과 그 후손의 대우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다.
(11) 고을덕(高乙德, 618~699, 701)
제명은 “대주 관군대장군 행 좌청도솔부 빈양절충도위 고을덕 묘지(大周冠軍大將軍行左淸道率府頻陽折衝都尉高乙德墓誌)”이다. 2015년 중국 길림대학의 왕연룡(王連龍)에 의해 소개되었는데, 출토 정황이나 소장처 등의 구체적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다. 개석에는 전액이 아닌 명(銘)을 새겼다. 묘주 고을덕은 변국(卞國) 동부인으로 661년 당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당시 생포되어 당에 들어갔다고 한다. 묘지명에는 고구려를 동토(東土), 당을 서조(西朝)로 표현하는 등 당인 관리가 찬술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아 고구려인이 찬술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고을덕묘지명에는 고구려 말기의 정치제도와 관련한 새로운 정보가 다수 담겨 있어 연구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중리계 관등에 대해 기존의 이해(이문기, 2000; 2003)와 같이 국왕 측근, 근시직으로 파악하기도 하지만(이성제, 2016), 기본적으로 특정 관직이나 직책과 구분되는 관등 체계로서 파악해야 한다는 견해(여호규, 2016)가 제기되었다. 또한 고위 관등자의 직능 및 합좌기구 운영 양상이나, 관등과 지방 관직의 연계를 확인하고, 국가의 공적 영역과 왕실의 사적 영역이 구분되었을 가능성이 제기(여호규, 2016)되는 등 고구려 말의 정치운영과 관련해 실체적 접근을 가능하게 한 귀중한 자료이다.
(12) 천남산(泉男産, 639~701, 702)
제명은 “대주 고 금자광록대부 행 영선대장 상호군 요양군 개국공 천군 묘지명(大周故金紫光祿大夫行營善大匠上護軍遼陽郡開國公泉君墓誌銘)”이다. 묘주 천남산은 연개소문의 아들이자 남생의 동생이다. 문헌에는 당이 평양성을 포위했을 때, 보장왕이 남산을 보내 항복의 뜻을 밝혔다고 전한다. 묘지명을 통해 입당 후 행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천남생, 천헌성 등의 묘지명과 아울러 연개소문 가문의 가계와 관력을 복원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13) 고연복(高延福, 661~723, 724)
제명은 “대당 고 중대부 수내시 상주국 발해 고부군 묘지명(大唐故中大夫守內侍上柱國渤海高府君墓誌銘)”이다. 묘지명은 일찍이 청 건륭 연간에 발견되었으나 주목받지 못하고 잊혔다가, 2019년 왕연룡과 총사비(叢思飛)에 의해 학계에 다시 소개되었다. 묘지명에 따르면, 연복은 그의 자이고, 본래 휘는 복(福)이라고 한다. 신도비의 내용이 전해지고 있어 비교 검토가 가능하다.
입당 경위는 분명히 알 수 없고, 고구려 귀족 가문 출신으로 보인다. 그가 고구려 왕실의 일원(영류왕의 증손)이었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는 당에서 환관으로 출세했고, 고력사(高力士)를 양자로 들였다. 고구려 유민이 당 황실에서 최고위 환관으로 활동한 사례는 입당 후 고구려 유민의 행적을 복원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14) 고목로(高木盧, 650~730, 730)
제명은 “당 고 배융부위 직복시 고부군 묘지명(唐故陪戎副衛直僕寺高府君墓誌銘)”이다. 묘지명은 서안에서 출토되어 현재 비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명에서는 고목로가 발해수인(渤海蓚人)이라고 했는데, 당으로 귀부한 고구려 유민이 자신의 출자를 중국에서 기원한 성씨로 내세운 사례 중 하나로 주목된다. 그는 당 중종이 내란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웠다고 한다. 고목로와 같이 고구려, 백제 유민이 당 조정의 정변에 참여한 사례가 더러 보이는데, 입당 후 유민의 행적을 복원하는 데 있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15) 이인회(李仁晦, 683~730, 730)
제명은 “대당 고 유주 청화부 절충 겸 대동군 부사 이부군 묘지(大唐故幽州清化府折衝兼大同軍副使李府君墓誌)”이다. 묘지명은 2007년 낙양에서 출토되었으며, 2022년 왕연룡과 황지명(黃志明)에 의해 학계에 처음 소개되었다. 연구에서는 이인회를 고구려 유민이자 낙랑(樂浪) 이씨라고 파악했지만, 논란의 여지가 크다. 이인회묘지명은 요서, 요동 일대의 세족이었던 이인회 가문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준다. 무관으로서 묘주의 자질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나 선대의 관력을 통해 보면, 묘주의 선대가 당의 고구려 침공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특히 가문이 당의 고구려 고지 지배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던 만큼 고구려와의 관련성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이인회 가문을 고구려 유민 일족으로 파악하는 것에는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16) 천비(泉毖, 707~729, 733)
제명은 “당 고 선덕랑 효기위 치천현 개국자 천군 지명(唐故宣德郞驍騎衛淄川縣開國子泉君誌銘)”이다. 묘지명은 1926년 낙양에서 출토되었다. 묘지명에는 그가 망산의 선조 묘역에 묻혔다고 하는데, 실제로 연개소문 일가의 묘지명이 맹진현(孟津縣)의 무덤군에서 발견되었다. 천비의 자는 맹견(孟堅)이며, 증조가 남생, 조부가 헌성이다. 천비는 22세의 나이로 요절해, 아버지인 천은(泉隱)이 묘지명을 직접 지었다.
묘지명에 따르면, 천비가 보장왕의 외손이자 왕위(王暐)의 사위였다고 한다. 묘지명의 “개부의동삼사조선왕고장지외손태자첨사태원공왕위지자서(開府儀同三司朝鮮王高藏之外孫太子詹事太原公王暐之子聟)” 구절에 관한 해석에 이견이 있었다. 천비의 장인인 태자첨사 왕위가 보장왕의 외손이라고 해석하기도 했고, 천비가 보장왕의 외손이자 왕위의 사위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왕위가 당 고종의 외손이라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보장왕의 외손은 왕위가 아닌 천비였음이 밝혀졌다(김수진, 2022). 이로써 연개소문 일가가 고구려 왕실 가문과 혼인을 맺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가문의 계보와 입당 후 행적을 복원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17) 이인덕(李仁德, 673~733, 733)
제명은 “대당 고 관군대장군 행 우위위장군 상주국 금성군 개국공 이공 묘지명(大唐故冠軍大將軍行右威衛將軍上柱國金城郡開國公李公墓誌銘)”이다. 묘지명은 1995년 윤용구에 의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묘지명에서는 이인덕을 낙랑망족(樂浪望族)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를 근거로 그를 고구려 유민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외에 고구려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이야기할 만한 정보는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구려 유민으로 파악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낙랑 멸망 후 일찍이 중원에 유입된 사례로 보거나 혹은 서역계 인물일 가능성도 제기된 바 있다(권순홍, 2020). 다만 그가 ‘낙랑망족’을 표방한 이유에 대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18) 왕경요(王景曜, 680~734, 735)
제명은 “당 고 우위위장군 상주국 왕공 묘지명(唐故右威衛將軍上柱國王公墓誌銘)”이다. 묘지명에 의하면 왕경요의 선조는 원래 태원인(太原人)인데, 서진 말에 혼란을 피해 고구려로 피신했다가 고구려와 당의 전쟁 시에 왕경요의 부친이 당에 투항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출신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그 가문이 고구려에서 300년 이상 세거한 후 당에 귀부했다는 점에서 고구려 유민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왕경요는 사서에도 등장하는 인물로서 묘지명을 통해 기존 문헌을 보완할 수 있게 되었다. 왕경요는 왕모중(王毛仲)의 난에 연루되어 좌천되었다가, 이후 현종에 의해 관직을 회복했다고 한다. 이 무렵 당 조정의 혼란 속에 고구려 유민이 연루된 사례가 적지 않게 확인되고 있다. 관련 자료들과 아울러 유민의 지위, 행적을 복원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
(19) 이은지(李隱之, 655~705, 739)
제명은 “당 고 증 천주사마 이공 묘지명(唐故贈泉州司馬李公墓誌銘)”이다. 묘지명은 739년 부인과 합장하는 과정에서 제작되었다. 2015년 누정호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묘지명에 따르면, 가문이 요동에 있으면서 수·당의 고구려 침공에 협조했다고 한다. 선조가 요동인이라고 했는데, 고구려 유민으로 볼 수 있을지를 두고 다소의 이견이 있다. 한편 아들 이회(李懷)의 묘지명이 함께 전해지고 있어 비교 자료가 되는데, 가문의 입당 시기와 경위에 대해서 두 묘지명이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어 그 배경을 두고 논의가 분분하다.
(20) 두선부(豆善富, 684~741, 741)
제명은 “대당 고 충무장군 섭 우금오위낭장 상주국 두부군 묘지(大唐故忠武將軍攝右金吾衛郎將上柱國豆府君墓誌)”이다. 낙양에서 출토되어 현재는 개봉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두선부의 가문은 부풍(扶風) 평릉인(平陵人)이라고 했으며, 북위 말 혼란기에 고구려로 들어온 것으로 파악된다. 그 계통에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일족이 100년 이상을 고구려에 머물다가 당에 항복했음을 알 수 있다. 입당 후에는 무관으로 활동했고, 725년에는 황제를 호종해 봉선제에 참여하기도 했다.
(21) 고덕(高德, 676~742, 742)
제명은 “당 고 우용무군익부중랑 고부군 묘지명(唐故右龍武軍翊府中郎高府君墓誌銘)”이다. 묘지명에 의하면 고덕의 선조는 발해인(渤海人)이며 고점리(高漸離)의 후예라고 한다. 그러나 고점리를 가문의 선대로 표현한 것은 발해 고씨임을 강조하려는 수사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 유민 2세대 이후의 묘지명에는 가문의 출자를 가탁해 중원에서 구하려는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고덕의 선조는 4세기 초 영가(永嘉)의 난 때 요양(遼陽)으로 피난해 요양의 세족(世族)이 되었으며, 당이 중원을 통일한 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한편 고덕은 710년 이융기(李隆基)가 일으킨 정변에 참여해 출세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렇게 당 현종의 밑에서 활동하면서 정변에 참여한 다른 고구려 유민 출신들과의 관계는 추가 검토의 필요성이 있다.
(22) 유원정(劉元貞, ?~744, 744)
제명은 “대당 고 운휘장군 수 좌룡무군대장군 상주국 곡양군 개국공 식읍이천호 증 사지절 도독 천수군제군사 천수군태수 유공 묘지명(大唐故雲麾將軍守左龍武軍大將軍上柱國穀陽郡開國公食邑二千戶贈使持節都督天水郡諸軍事天水郡太守劉公墓誌銘)”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풍홍(馮弘)이 다수의 북연민(北燕民)을 이끌고 고구려로 망명했을 때, 그 휘하에 유원정의 선조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8대조가 유헌(劉軒)이라고 했는데, 『진서』에 장락군(長樂郡) 출신으로서 풍발(馮跋) 재위기(409~430)에 박사낭중(博士郎中)을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실제 유헌이 유원정의 8대조인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한편 유원정의 조부 유루(劉婁)가 고구려 욕살로 있다가 건봉 연간에 당군이 침략했을 때 항복해 당에 협조했다 한다. 묘지명을 따른다면, 가문이 6대 230여 년 동안 고구려에 거주하다가 당에 귀부한 것이 된다.
(23) 고원망(高遠望, 697~740, 745)
제명은 “당 고 안동부도호 고부군 묘지명(唐故安東府都護高府君墓誌銘)”이다. 1997년 낙양에서 출토되었으며, 고원망의 부친 고흠덕의 묘지명이 함께 전한다. 고원망 집안은 고조인 고원(高湲) 이래 대대로 건안성(建安城) 욕살을 승습(承襲)하던 고구려 귀족 가문이었다. 고원망 가문은 조부인 고천(高千)이 입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원망 가문을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계 유이민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가문이 입당한 후에도 부친인 흠덕이 건안성 도독을 세습했다는 점에서 당이 고구려 지방관의 지위를 인정하면서 고구려 고지 지배에 참여시킨 사례로 주목된다. 고원망은 고구려 유민으로 구성된 번병(蕃兵)을 통솔하며 거란과 해의 공격을 방어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의 활동 지역과 지위를 고려할 때, 당시 요동 지역에서 벌어진 당과 발해의 공방전과 관련해 활동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24) 이회(李懷, 678~745, 745)
제명은 “대당 고 운휘장군 행 좌룡무군익부중랑장 조군 이공 묘지명(大唐故雲麾將軍行左龍武軍翊府中郞將趙郡李公墓誌銘)”이다. 묘주 이회는 이은지의 아들로 전한다. 앞서 이은지묘지명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은지, 이회 부자의 묘지명에서 각각 가문의 입당 시기와 경위를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이은지묘지명에는 묘주가 655년 고구려에서 태어났고, 이후에 당에 이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 아들인 이회묘지명에서는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진(晉) 상서령 이윤(李胤)의 후손을 찾았고, 이에 수의 양평군 종사를 지낸 이회의 증조부 이경(李敬)이 가족과 함께 입당했다고 기록했다.
이은지묘지명의 기록과 비교할 때, 당 태종 때 일가가 입당했다는 이회묘지명의 기록은 조작일 가능성이 높다(樓正豪, 2015). 또 이경이 수에서 양평군 종사를 지낸 사실이 이은지묘지명에는 보이지 않다가 이회묘지명에 등장하고, 고구려에서의 선대 행적이나 고구려 관련 기록이 전혀 없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이회묘지명에 가문이 고구려와 연관된 사실을 최대한 가리고, 본래 중국 출신임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안정준, 2016).
(25) 고흠덕(高欽德, 677~733, 746 · 750 추정)
제명은 “당 우무위장군 고부군 묘지명(唐右武威將軍高府君墓誌銘)”이다. 묘주 고흠덕은 고원망의 아버지이다. 부자의 묘지명이 함께 전해지고 있다. 가문의 관력이 고구려 말 귀족 가문의 지위 세습과 당의 고구려 고지 지배와 관련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고원망묘지명과는 가문의 입당 시기를 제외하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묘지명은 고흠덕의 손자사위인 서찰이라는 인물이 작성했다고 하는데, 그는 고원망의 묘지명을 작성하기도 했다.
(26) 고씨 부인(高氏夫人, 731~772, 772)
제명은 “선의랑 당 수 당주 자구현령 소공 고 부인 고씨 묘지명(宣義郎唐守唐州慈丘縣領邵公故夫人高氏墓誌銘)”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부인의 증조가 황국(皇國)의 조선왕(朝鮮王)이었고, 조부는 연(連)으로 조선군왕(朝鮮郡王), 아버지는 진(震)이라고 했다. 부인의 증조부가 바로 보장왕이다. 아버지 고진의 묘지명과 더불어 고구려 멸망 후 왕실 후예의 행적을 복원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27) 남단덕(南單德, 699~776, 776)
제명은 “대당 고 요양군왕 남공 묘지명(大唐故饒陽郡王南公墓誌銘)”이다. 남단덕은 고구려 유민 3세대이다. 가문은 고구려 멸망 이후 줄곧 안동도호부 지역에 거주했고, 조부는 마미주의 도독을 역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대로 변경의 무장으로 활동하던 집안이었는데, 안녹산 휘하의 장수로 있었던 남단덕이 안녹산 사후 사사명의 반란 당시에 당 조정에 귀항한 공으로 군왕의 지위에 오르고 장안에 적을 두고 살게 된 것으로 확인된다. 가문의 입당 경위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고구려 내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갖춘 유력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부가 안동도호부 내에서 도독의 직위를 역임한 사실로 볼 때, 당에 비교적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본래 중국계 출신이었기 때문에 당에서 다시 중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남단덕은 699년 평양에서 출생했다고 하는데, 이 시기 한반도 서북부의 고구려 고지는 나당전쟁 이후 사실상 안동도호부의 관할에서 벗어난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크다. 또 조부가 도독을 역임한 마미주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질, 고자 부자가 697년 마미성전투에서 전사한 사실과 관련해 조부가 도독을 역임한 시기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28) 고진(高震, 701~773, 778)
제명은 “당 개부의동삼사 공부상서 특진 우금오위대장군 안동도호 담국공 상주국 □□공 묘지(唐開府儀同三司工部尙書特進右金吾衛大將軍安東都護郯國公上柱國□□公墓誌)”이다. 묘지명에는 고진의 조부 장(藏)이 개부의동삼사 공부상서 조선군왕(朝鮮郡王)이었다고 하는데, 보장왕을 가리킨다. 고진이 발해인(渤海人)이라고 했는데, 고구려 유민 일족이 가문의 기원을 발해로 기재한 사례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고진의 딸의 묘지명도 출토된 바 있는데, 이들 묘지명은 보장왕 후손의 당에서의 행적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보장왕의 후손들이 대대로 조선군왕, 안동도호 등의 지위를 계승해 고진에게까지 이어졌으나, 고진의 아들은 그 직을 승습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의 고구려 고지 지배의 추이와 관련해 주목할 수 있는 부분이다.
(29) 천씨 부인(泉氏夫人, 726~807, 808)
제명은 “당 고 태자세마 겸 낭주장사 마부군 처 여항군 태부인 천씨 묘지명(唐故太子洗馬兼朗州長史馬府君妻餘杭郡太夫人泉氏墓誌銘)”이다. 묘지명에 따르면, 묘주 여항군 태부인 천씨는 천헌성의 증손녀이다. 그런데 묘지명에 나타난 세계가 기존의 자료와 차이를 보여 의문을 던진다. 묘지명에서는 천씨 부인의 부친이 현은(玄隱)이고, 조부는 동제(同濟), 증조부가 헌성(獻誠)이라고 했다. 기존에 알려진 천헌성묘지명과 천비묘지명에서는 헌성과 현은이 부자 관계였던 것과 달리, 천씨 부인의 묘지명에서는 헌성과 현은이 조손 관계로 설정된 것이다. 특히 동제라는 인물은 그동안 알려진 천씨(연씨) 가문 관련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 인물이다. 묘지명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했던 것인지, 의도된 왜곡인지 현재로서는 그 의미를 알기 어렵다.
(30) 사선의일(似先義逸, 786~850, 850)
제명은 “당 고 은청광록대부 행 내시성내상시 원외치동정원 겸 액정국령 치사 상주국 여남군 개국공 식읍이천호 사자금어대 사선부군 묘지명(唐故銀靑光祿大夫行內侍省內常侍員外置同正員兼掖庭局令致仕上柱國汝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賜紫金魚袋似先府君墓誌銘)”이다. 1993년 서안에서 출토되었다. 사선의일은 사서를 통해서도 그 존재가 확인되는 인물로서 당 문종(文宗) 대 이름난 환관이다. 9세기 중반의 묘지명이지만, 사선씨가 고구려계 성씨로 알려져 있고, 묘지명에서 묘주 가문이 요동에서 중원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9세기 이후 고구려 유민 후예의 행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표1 | 고구려 유민묘지명의 출신 표기
| 묘주(생몰년) | 묘지명 제작 연대 | 출신 표기 | 찬자 |
| 고요묘(?~673) | 673(함형 4년) | 요동인(遼東人) | |
| 고제석(649~674) | 674(상원 원년) | 국내성인(國內城人) | |
| 이타인(609~675) | 677(의봉 2년) | 요동 책주인(遼東柵州人) | |
| 천남생(634~679) | 679(조로 원년) | 요동군 평양성인(遼東郡平壤城人) | 왕덕진 |
| 고현(642~690) | 691(천수 2년) | 요동 삼한인(遼東三韓人) | |
| 고족유(626~695) | 697(만세통천 2년) | 요동 평양인(遼東平壤人) | |
| 고모(640~694) | 699(성력 2년) | 안동인(安東人) | |
| 고질(626~697) | 700(성력 3년) | 요동 조선인(遼東朝鮮人) | 위승경 |
| 고자(665~697) | 700(성력 3년) | 조선인(朝鮮人) | |
| 천헌성(649~691)주 001 | 701(대족 원년) | 고구려국인(高句驪國人) | 양유충 |
| 고을덕(618~699) | 701(대족 원년) | 변국 동부인(卞國東部人) | |
| 천남산(639~701) | 702(장안 2년) | 요동 조선인(遼東朝鮮人) | |
| 고연복(661~723) | 724(개원 12년) | 발해인(渤海人) | 손익 |
| 고목로(650~730) | 730(개원 18년) | 발해수인(渤海蓚人) | |
| 이인회(683~730) | 730(개원 18년) | 요양인(遼陽人) | |
| 천비(707~729) | 733(개원 21년) | 경조 만년인(京兆萬年人) | 천은 |
| 이인덕(673~733) | 733(개원 21년) | 낙랑망족(樂浪望族) | |
| 왕경요(680~734) | 735(개원 23년) | 태원인(太原人) | |
| 이은지(655~705) | 739(개원 27년)주 001 | 요동인(遼東人) | |
| 두선부(684~741) | 741(개원 29년) | 부풍 평릉인(扶風平陵人) | |
| 고덕(676~742) | 742(천보 원년) | 발해인(渤海人) | |
| 유원정(?~744) | 744(천보 3년) | 동평헌왕(東平憲王)의 후예 | 이숙제 |
| 고원망(697~740) | 745(천보 4년) | 은인(殷人) | 서찰 |
| 이회(678~745) | 745(천보 4년) | 조군 찬황인(趙郡贊皇人) | 양탄 |
| 고흠덕(677~733) | 746, 750 추정주 001 | 발해인(渤海人) | 서찰 |
| 고씨 부인(731~772) | 772(대력 7년) | 발해인(渤海人) | |
| 남단덕(699~776) | 776(대력 11년) | 노(魯) 대부 남괴(蒯), 남용(容)의 후예 | 설기 |
| 고진(701~773) | 778(대력 13년) | 발해인(渤海人) | 양경 |
| 천씨 부인(726~807) | 808(원화 3년) | 전당인(錢唐人) | 마유홍 |
| 사선의일(786~850) | 850(대중 4년) | 미상 | 왕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