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통사

2. 고구려 유민묘지명의 자료적 성격

2. 고구려 유민묘지명의 자료적 성격

고구려 유민묘지명은 고구려 말기의 사회상과 당시 지배층의 인식을 보여주는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모든 자료가 일관된 항목을 갖춘 것은 아니지만, 묘지명은 일종의 정형화된 문서로서 묘주의 성씨(姓氏), 향읍(鄕邑), 족출(族出), 휘(諱), 자(字), 행치(行治), 이력(履歷), 졸년(卒年), 수년(壽年), 처(妻), 자(子), 장일(葬日), 장지(葬地) 등 13개의 항목으로 구성된다고 한다(朴漢濟, 2008; 李成制, 2014). 특히 고구려 유민묘지명에 관한 연구에서는 묘주의 출신에 대한 표현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고구려인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내거나 당인(唐人)으로 전화해 가는 과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이문기, 2010). 대체로 국내 연구자가 유민들에게 남아있는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측면에 주목했다면, 중국에서의 연구는 동북공정 이후 유민의 당으로의 귀속과 한화(漢化)를 강조하려는 경향을 보였다(윤용구, 2014).
묘지명은 묘주 및 선대(先代)의 관력(官歷)이나 족조(族祖) 전승 등 가문에서 제출한 가전 기록을 바탕으로 찬술되었지만, 찬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컸다(최진열, 2009; 김수진, 2018). 또 묘지명의 주인공이 대체로 당 관인(官人)으로 생애를 마친 인물이라는 점에서 묘지명은 순수한 사적(私的) 기록물이라기보다는 당 조정의 시선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공적(公的) 기록물이기도 했다(石見淸裕, 2008; 이성제, 2014). 따라서 묘지명에서 고구려를 표현하는 방식은 당의 고구려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소재가 되기도 한다(최진열, 2009; 2012; 권덕영, 2014; 김수진, 2018).
지금까지 알려진 고구려 유민묘지명 가운데 묘주가 고구려 출신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사례는 12건이 있다.주 001
각주 001)
고요묘(高鐃苗), 고제석(高提昔), 이타인(李他仁), 천남생(泉男生), 고현(高玄), 고족유(高足酉), 고모(高牟), 고질(高質), 고자(高慈), 천헌성(泉獻誠), 고을덕(高乙德), 천남산(泉男産).
닫기
당대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 가운데 703년 이전에 제작된 묘지명에서는 묘주가 고구려 출신임을 명시했지만, 730년 이후의 자료에서는 묘주의 출자가 중국으로 전환되었다는 견해가 있었다(이문기, 2010). 다만 그동안 703~729년 사이에 제작된 묘지명이 확인되지 않아 그 분기를 구체화하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김수진, 2017). 그런데 최근 고연복묘지명이 소개되면서 새로운 정보를 더할 수 있게 되었다. 고연복은 개원 11년(723)에 사망해 이듬해 장례를 치렀다. 고연복묘지명에서는 고연복을 ‘발해인(渤海人)’이라고 했다. 이로써 고구려 유민 출신인 묘주의 출자를 중국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730년 이전부터 나타난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백제 유민묘지명의 사례도 참고가 된다.
같은 가문 내에서 3대의 묘지명이 확인된 예씨 일족의 사례를 보면, 예군묘지명(678)과 예식진묘지명(672)에서는 각각 묘주의 출자를 ‘웅진우이인(熊津嵎夷人)’, ‘백제웅천인(百濟熊川人)’이라고 해 백제 출신임이 강조되었지만, 예소사묘지명(708)에서는 ‘초국낭야인(楚國瑯琊人)’이라고 해 본래 중국 출신이었음을 강조하는 모습이 확인된다(최상기, 2016). 또 699년 제작된 흑치상지묘지명에서는 묘주가 ‘백제인(百濟人)’임을 명기했으나, 706년에 제작된 흑치준묘지명에서는 ‘당(唐) 좌령군위대장군(左領軍衛大將軍) 연국공(燕國公)’, 즉 흑치상지의 아들이라고만 표현했다.
자의든, 타의든 이민족 출신을 본래 중원 계통의 인물이었던 것처럼 변모시키려는 경향은 현종 개원 연간(712~741) 당 내외의 정치환경 변화와 연계되었다는 견해가 있다(이기범, 2016). 당시 이민족 출신으로 당에 귀부한 인물들의 사례를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겠지만, 이 시기 당 내부 정치 상황의 격변이 고구려, 백제 유민(혹은 유민 후손)의 출자 표방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묘주가 고구려 출신임을 직접 드러내지 않더라도 묘주의 가계, 선대의 관력 등을 바탕으로 고구려 유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묘지명에서는 오히려 고구려 국명이 드러난 사례는 많지 않고, 고구려에 관한 전승을 서술하는 것으로써 묘주가 고구려 출신임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이문기, 2010). 고구려 유민묘지명 가운데 비교적 구체적인 고구려 관련 전승을 포함한 자료는 이타인, 천남생, 고질, 고자, 천헌성, 고을덕, 천남산 묘지명 등 7건을 꼽을 수 있다. 묘지명이라는 자료의 성격상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 내용이 상징하는 바를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이타인묘지명에서는 먼저 시조 주몽에 대한 언급이 확인된다. 지문에서는 고구려인을 ‘주몽의 후예(朱蒙遺孼)’, ‘계루의 병사(桂婁之兵)’로 표현했다. 그런데 ‘얼(孼)’이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에 대한 폄하의 의도가 있었음을 지적하기도 한다(孫鐵山, 1998). 이타인이 비록 고구려에서 활동했지만, 본래 출신은 말갈족 계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해로 이어진다. 그러나 묘지명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에 대해 신성성을 부여하고 있으며,주 002
각주 002)
이타인묘지명, “君諱他仁, 本遼東柵州人也, 後移貫雍州之萬年縣焉. 渤海浮天, 丸都槩日.發生受氣, 地居仁愛之鄉, 寅賓敬時, 星開角氐之舍. 狼河兔堞, 建國盛於山川, 五族九官, 承家茂於鐘鼎.”
닫기
군자의 나라에 인재가 태어났다는 표현으로 묘주의 출생을 표현했다.주 003
각주 003)
이타인묘지명, “惟公二穴龍媒, 誕靈君子之國.”
닫기
묘지명에 나타난 고구려에 대한 묘사가 부정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음으로 697년 마미성전투에서 함께 전사해 700년 장례를 치른 고질과 고자 부자의 묘지명이다. 고질묘지명에는 ‘하손의 후예(河孫之派流)’, ‘하손 5족(河孫五族)’이라는 표현이 확인된다. 하손은 고구려 건국설화에서 하백의 외손으로 나타나는 시조 주몽을 가리킨다. ‘하손의 후예’, ‘하손 5족’은 곧 고구려를 상징한다. 특히 “현별수상(玄鱉殊祥) 하손지파류미원(河孫之派流彌遠)”이라는 구절은 물고기와 자라의 도움으로 강을 건너와 고구려를 건국했다는 건국설화의 표현으로서 주목된다(민경삼, 2009; 김수진, 2017). 고자묘지명에서는 주몽왕이 해동의 제이(諸夷)를 평정하고 고려국(고구려)을 건국했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주 004
각주 004)
고자묘지명, “先祖隨朱蒙王, 平海東諸夷, 建高麗國, 已後代爲公侯宰相.”
닫기
한편 고질과 고자 부자의 묘지명에는 후한 말 고구려와 모용씨의 전쟁 당시 고질의 19대조 고밀의 전공과 포상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다른 사서에는 이러한 전승이 보이지 않는데, 대신 『삼국사기』 봉상왕2년의 기사에 고구려와 모용씨의 전쟁 기록이 확인된다. 고노자의 활약으로 모용외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하는데, 이를 바탕으로 고노자와 고밀을 동일인으로 파악하기도 한다(羅振玉, 1937).
천헌성묘지명에서는 ‘하지손(河之孫)’, ‘일지자(日之子)’라는 표현이 확인되는데, 이는 고구려 건국설화에서 주몽의 모계와 부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묘주가 고구려 출신임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사(詞)에서 “바닷가 동쪽, 옛날 주몽이 있었도다. 강을 건너 건국하니, 대대로 대업이 드높도다”라는 구절주 005
각주 005)
천헌성묘지명, “濱海之東兮, 昔有朱蒙, 濟河建國兮, 世業崇崇.”
닫기
은 고구려 건국설화의 서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다음은 고을덕묘지명이다. ‘화정(火政)’, ‘염령(炎靈)’은 한(漢)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이타인묘지명에서는 한사군을 ‘염령사군(炎靈四郡)’이라고도 했다. 지문에서는 주몽의 건국이 한대에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고자묘지명에서도 고구려가 건국되고 멸망할 때까지 708년 30여 대에 걸쳐 존속했다는 내용이 보이는데,주 006
각주 006)
고자묘지명, “自高麗初立, 至國破已來, 七百八年卅餘代.”
닫기
주몽의 건국이 한대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당대의 일반적인 인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주몽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백일강정(白日降精)”, 즉 태양의 정기를 내려받았다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는 부여 동명설화와 구분되는 고구려 주몽설화의 고유 요소라는 점에서 주목된다(이승호, 2011; 장병진, 2016).
천남산묘지명에서도 고구려 건국설화의 요소가 확인되는데, 동명과 주몽이 구분된 존재로 나타나는 점이 특징적이다. 중국 사서에서는 동명을 일관되게 부여의 시조로 기록했으나, 『삼국사기』, 동명왕편, 『삼국유사』 등 국내 문헌에서는 고구려 시조 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했다. 동명이라는 왕호가 고구려 당대에 부여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묘지명의 찬자는 동명을 주몽의 왕호로 인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명의 탄생은 ‘감기(感氣)’에 의한 것으로, 주몽은 ‘잉일(孕日)’로써 구분한 것도 고자묘지명의 사례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고구려 유민묘지명에 몇몇 고구려 관련 전승 기록이 남겨져 있음을 보았다. 물론 묘주의 출신과 지위, 지문의 작성자가 각기 달라 고구려에 관한 정보에 편차가 있지만, 유민묘지명에 기록된 정보는 당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고구려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묘지명에 기록된 고구려 관련 정보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해당 정보가 작성된 경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묘지명은 한 인물의 역사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관이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한다(이동훈, 2014). 기본적으로 당 관인(官人)의 묘지명은 저작국(著作局)에서 찬술을 담당했고, 실제로 현종 천보 연간(742~756) 이전에 제작된 관찬 묘지명은 사관이 찬술하는 경우가 많았다(江波, 2010; 이동훈, 2014). 고질묘지명의 찬자인 위승경은 ‘겸수국사(兼修國史)’를 역임했고, 천남생묘지명을 찬술한 왕덕진과 천헌성묘지명을 찬술한 양유충도 사관을 겸임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이동훈, 2014).
앞에서 살펴본 7건의 자료에서 이타인, 고자, 고을덕, 천남산의 묘지명은 찬자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찬자가 어떤 부류의 인물인지는 추정해 볼 수 있다. 이타인묘지명에 보이는 ‘팔조지국(八條之國)’, ‘염령사군(炎靈四郡)’의 표현은 찬자가 고구려를 ‘고조선-한사군’과 연계해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고구려의 영역을 기자가 봉해진 곳이자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이해하면서, 고구려 멸망을 ‘실지(失地)’의 회복으로 받아들이려는 당 관인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다(안정 준, 2013).
이와 같은 인식은 천남생과 천남산,주 007
각주 007)
천남생묘지명, “玄菟之城”; “類箕子之疇庸”; 천남산묘지명, “玄菟之域”; “昔王滿懷燕, 載得外臣之要”; “東明之裔, 寔爲朝鮮.”
닫기
고질과 고자 부자의 묘지명주 008
각주 008)
고질묘지명, “箕子之苗裔”; 고자묘지명, “人承八敎.”
닫기
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고족유묘지명주 009
각주 009)
고족유묘지명, “族本殷家, 因生代承. 昔居玄兎, 獨擅雄蕃.”
닫기
에도 비슷한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김수진, 2018). 이에 천남산묘지명의 찬자를 사관(장병진, 2016), 혹은 당 관인(김수진, 2018)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자묘지명도 그 내용의 연관성을 들어 고질묘지명과 마찬가지로 위승경이 작성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민경삼, 2009).
한편 고을덕묘지명의 찬자를 두고는 다소 논란이 있다. 고을덕의 장례에 당 조정이 관여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지 않고, 특히 당을 ‘서조(西朝)’로 표현해 ‘동토(東土)’인 고구려와 병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찬자가 고구려와 친근한 사람이거나 고구려인이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葛繼勇, 2015), 고을덕의 출신을 고구려가 아닌 ‘변국(卞國)’으로 표기한 것에 주목해 당 관인이 찬술했다는 견해도 있다(김수진, 2018). 수·당 조정 내부에 고구려를 ‘실지(失地)’가 아닌 ‘이역(異域)’으로 구분하는 상반된 인식이 혼재했던 사실도 함께 지적했다.
묘지명의 찬술은 기본적으로 가문에서 제출한 행장이 주요 전거(典據) 자료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행장은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이고, 묘지명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은 찬자 개인의 몫이었다(김수진, 2018). 묘지명의 고구려 관련 내용 역시 묘주 가문에서 제공한 자료 위에 찬자 스스로 파악한 정보를 더해 작성되었다. 묘지명의 전거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천남산묘지명의 사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천남산묘지명의 찬자는 당시 당과 고구려의 관계를 위만이 한의 외신이 된 사실과 차대왕 수성이 한과 통교한 사실, 그리고 잠지락 대가 대승이 한에 투항했다는 전승에 비유하고자 했다(장병진, 2016). 주목되는 것은 잠지락 대가 대승이 낙랑군에 투항하고, 수성이 한의 포로를 보내며 현도군에 항복했다는 내용이 『후한서』에만 보인다는 사실이다. 찬자가 묘지명을 작성하면서 『후한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조두(俎豆)와 시서(詩書)는 성교(聲敎)에 통함이 있다”라는 표현도 『삼국지』와 『후한서』 동이(열)전의 서문에 조두(俎豆)를 쓰는 예법이 있다는 내용이나, 고구려에 오경(五經)과 삼사(三史) 등이 전한다는 『주서』 고구려전의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패수에 임해 도읍을 열었다”라는 표현과 ‘13등의 반차(班次)’라는 표현도 『주서』와 『수서』, 『북사』의 고구려 관련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임기환, 2004; 장병진, 2016).
천남산묘지명 외에 다른 묘지명을 통해서도 고구려 관련 내용을 찬술하는 과정에서 중국 사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타인묘지명에는 “주몽의 후예가 청구(靑丘)에서 천명을 받았음에도 호시(楛矢)의 조공이 어그러져 다시 계루의 병사에 가로막혔다. 득래가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빈번히 감옥에 갇혔으며, 경기가 편사(偏師)로 토벌해 누차 비석에 공적을 새겼다”라는 구절이 있다. 고구려가 당에 저항한 것이 천명을 거스른 잘못이라는 점을 고사에 빗대어 지적한 표현이다. 고구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숙신의 조공품으로 잘 알려진 호시를 언급한 것은 의문인데, 『송서』나 『남사』에는 숙신의 조공이 고구려의 중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보인다. 묘지명의 찬자가 호시의 조공이 어그러져 다시 계루의 병사에 가로막혔다고 표현한 것은 『송서』와의 연관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득래의 고사는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의 이야기로 『삼국지』 관구검전에 수록되어 있다. 천남생묘지명의 찬자도 이 기사를 활용했는데, “환산(丸山)에 아직 새기지 않았으나 득래는 먼저 깨달음을 드러냈고, 양수(梁水)에 재앙이 없지만, 중모(仲謀)는 반드시 망할 것임을 걱정했다”라고 했다. 관구검전의 내용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모, 즉 손권에 대한 언급도 눈에 띄는데, 『삼국지』오주전에 기록된 고구려와 손오의 관계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요동태수 경기가 고구려를 공격한 사건은 『후한서』 경엄전과 고구려전에 자세한데, 이타인묘지명의 찬자는 당시 비석을 세워 공적을 새겼다는 내용까지 언급한 사실이 주목된다. 이는 『후한서』에서는 찾을 수 없고, 『한원』 번이부 고려전에 보이는 「고려기」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한원』의 주문에는 『후한서』를 인용해 경기가 고구려를 공격한 사실을 적으면서 「고려기」를 인용해 요동의 옛 성 남문에 경기의 비석이 있다는 사실을 함께 전한다. 묘지명의 찬자는 『한원』이나 「고려기」를 직접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타인묘지명에서 고구려를 상징하는 표현이 『한원』 번이부 고려전에서도 공통으로 확인되어 눈길을 끈다(장병진, 2020).
『한원』은 660년경 장초금(張楚金)이 찬술한 유서(類書)로 전체 30권의 내용 가운데 현재는 번이부 1권만 초본(鈔本)의 형태로 전한다(윤용구, 2011). 당대 『한원』이 일종의 동몽서(童蒙書)로 기능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는데(湯淺幸孫, 1983), 당시 비슷한 형태의 유서류가 변려문(騈儷文)의 문체를 익히고 작문을 위한 사류(事類)의 검색에 활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당대의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단기간 내에 고구려에 관한 정보를 얻어 변려체의 지문을 작성해야 하는 묘지명 찬자에게 『한원』과 같은 유서는 적합한 참고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장병진, 2020).
『한원』 번이부는 당 중심의 일원적 세계질서를 지향하는 가운데 이민족에 관한 정보, 그중에서도 동이 지역에 관한 실제적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에서 작성되었다고 한다(湯淺幸孫, 1983; 윤용구, 2011). 『한원』의 요소는 천남생묘지명과 고질묘지명에서도 보이는데(장병진, 2020), 당대 이민족 출신 인물의 묘지명이 찬술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묘지명의 찬자는 가문이 제출한 자료 외에도 사서를 직접 인용하거나 관련 내용이 집록된 유서를 재인용해 묘지명을 작성했던 것이다.
물론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에는 고구려 고유의 전승도 포함되어 있었다. 묘주 가문의 관력이나 족조 전승이 대표적이다. 대체로 가문에서 제공한 행장 등 가전 기록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천남생묘지명에서는 “무릇 먼 선조는 본디 ‘천(泉)’에서 나왔으니, 이미 신에 의탁해 복을 내려받았고, 마침내 이에 따라 태어나서 일가를 이루었다”라고 가문의 기원을 밝혔는데, 『신당서』 고려전에 개소문이 “스스로 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며 대중을 현혹했다”라는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사서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가문 고유의 전승 자료를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례로는 고질과 고자 부자의 묘지명에 보이는 선조 고밀에 관한 기록이 있다. 묘지명에서 고밀은 모용씨 세력을 물리쳐 고구려를 국망의 위기에서 구원한 인물로 묘사된다. 국내외 사서에서 고구려와 모용씨 세력의 전쟁 기사가 적지 않게 확인되는데, 그중에서도 국망을 논할 정도의 위기라면 봉상왕대 모용외의 침공과 고국원왕 대 모용황의 침공을 들 수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봉상왕은 모용외의 추격을 받아 붙잡힐 위기를 겪었으며, 고국원왕 대에는 수도가 함락되어 미천왕의 시신을 빼앗기고 왕모와 왕비가 인질로 사로잡혔다. 다만 두 사건 모두 묘지명에서 이야기하는 후한 말의 시점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고밀의 전승은 고국원왕 대 모용황 침공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지만(서영대, 1995), 대체로는 고밀과 고노자가 동일인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羅振玉, 1937). 고노자가 적을 격파해 국왕을 구원하고 대형의 관등과 식읍을 사여받은 사실이 고밀의 전승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 고국원왕 대의 전황을 돌이켜보면, 공신에 대한 대대적인 포상이 이루어졌다고 이해하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다. 현재로서는 고노자와의 연관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보이지만, 사서에 전하지 않는 다른 인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가문의 족조 전승이기 때문에 약간의 과장과 윤색이 더해졌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있다.
묘지명에는 고질과 고자의 선대가 일찍이 고구려 시조 주몽을 도와 건국에 기여했음을 언급했다. 천헌성과 천남산, 고을덕의 묘지명에서도 가문의 기원에 관한 부분에서 고구려 건국 전승을 언급하고 있다. 유민묘지명에 고구려 건국 전승을 기록한 것은 묘주가 고구려 출신임을 강조하기 위한 찬자의 선택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구려 귀족 가문의 족조 전승이 갖는 공통적인 특징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선조가 주몽을 도와 건국에 공을 세웠다는 전승은 일찍이 모두루 가문의 사례에서도 비슷하게 확인되는데, 이러한 전승은 다른 귀족 가문에서도 공통으로 내세우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초기 기록, 동명왕 대부터 대무신왕 대에 성씨 사여 기사가 집중적으로 확인되는데, 이는 고구려 귀족 가문의 족조 전승이 반영된 결과로 파악된다(서영대, 1995). 고구려 유민묘지명에서 건국 전승 요소가 빈번하게 보이는 것도 가문이 제출한 행장에 고구려 건국 과정에서의 선대 공적이 기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고을덕묘지명에서는 고구려의 왕성(王姓) ‘고(高)’씨의 유래가 주몽이 태양, 하늘로부터 정기를 이어받은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위서』 고구려전이나 『삼국사기』에서 고구려라는 국호와의 연관성을 이야기한 것과는 구분된다. 후대의 기록이지만, 『삼국사절요』에서 비슷한 전승이 확인되는데,주 010
각주 010)
『삼국사절요』 권1, “一說 本姓解,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以高爲氏. 或云, 王初誕, 擧國高之, 因以爲姓.”
닫기
이것이 고구려 고유의 전승에 가까운 것일 가능성이 크다. 고을덕묘지명은 고구려인의 인식이 그대로 반영된 내용이 비교적 많이 보인다는 공통된 지적이 있었다. 다수의 중국 사서에서 고구려의 ‘천손(天孫)’ 의식이 의도적으로 윤색된 것(김기흥, 2001; 윤성용, 2005)과 달리, 묘지명의 찬자가 가문이 제출한 전승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고구려 멸망 이후 당 관인이 되어 생애를 마친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은 당대의 다른 묘지명들과 마찬가지로 당 관인에 의해 작성된 사례가 많았다. 묘지명의 찬술이 기본적으로 가문에서 제출한 자료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문장을 작성하는 것은 온전히 찬자 개인의 몫이었다는 점에서 찬자가 별도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찬술된 부분도 적지 않았다. 실제 묘지명의 고구려 관련 전승들은 대체로 중국 사서를 바탕으로 당인 찬자가 재구성한 사례가 많다. 특히 사서를 직접 참고했을 가능성뿐만 아니라, 당시 동이 관련 기록을 집록한 유서류를 활용한 양상도 보인다.
물론 묘주 선대의 관력이나 족조 전승 등은 가문에서 제출한 가전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묘지명에는 중국 사서를 통해서는 알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전승이 담겨 있기도 하다. 묘지명에 반영된 고구려 고유의 전승은 고구려사의 이해를 넓혀 줄 수 있는 새로운 정보를 제공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만큼 앞으로도 기존 자료의 재해석과 더불어 새로운 자료의 발굴과 연구에 더욱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 각주 001)
    고요묘(高鐃苗), 고제석(高提昔), 이타인(李他仁), 천남생(泉男生), 고현(高玄), 고족유(高足酉), 고모(高牟), 고질(高質), 고자(高慈), 천헌성(泉獻誠), 고을덕(高乙德), 천남산(泉男産). 바로가기
  • 각주 002)
    이타인묘지명, “君諱他仁, 本遼東柵州人也, 後移貫雍州之萬年縣焉. 渤海浮天, 丸都槩日.發生受氣, 地居仁愛之鄉, 寅賓敬時, 星開角氐之舍. 狼河兔堞, 建國盛於山川, 五族九官, 承家茂於鐘鼎.” 바로가기
  • 각주 003)
    이타인묘지명, “惟公二穴龍媒, 誕靈君子之國.” 바로가기
  • 각주 004)
    고자묘지명, “先祖隨朱蒙王, 平海東諸夷, 建高麗國, 已後代爲公侯宰相.” 바로가기
  • 각주 005)
    천헌성묘지명, “濱海之東兮, 昔有朱蒙, 濟河建國兮, 世業崇崇.” 바로가기
  • 각주 006)
    고자묘지명, “自高麗初立, 至國破已來, 七百八年卅餘代.” 바로가기
  • 각주 007)
    천남생묘지명, “玄菟之城”; “類箕子之疇庸”; 천남산묘지명, “玄菟之域”; “昔王滿懷燕, 載得外臣之要”; “東明之裔, 寔爲朝鮮.” 바로가기
  • 각주 008)
    고질묘지명, “箕子之苗裔”; 고자묘지명, “人承八敎.” 바로가기
  • 각주 009)
    고족유묘지명, “族本殷家, 因生代承. 昔居玄兎, 獨擅雄蕃.” 바로가기
  • 각주 010)
    『삼국사절요』 권1, “一說 本姓解, 今自言是天帝子, 承日光而生, 故以高爲氏. 或云, 王初誕, 擧國高之, 因以爲姓.” 바로가기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2. 고구려 유민묘지명의 자료적 성격 자료번호 : gt.d_0007_0030_0010_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