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덕국과 신라의 고구려 유민정책
1. 보덕국과 신라의 고구려 유민정책
674년 9월 신라는 안승을 보덕왕(報德王)이라는 왕호로 책봉하였다. 670년 8월에 이은 두 번째 책봉이었다. 670년에는 ‘고구려왕’으로 봉하여 인국(隣國)으로서 형제처럼 선린관계를 맺자고 했었다면 674년에는 ‘보덕국왕’으로 봉하였고, 이는 신라왕의 덕에 보답하는 왕이라는 뜻인데, 번신(蕃臣)으로서의 위치를 명백히 규정한 것으로 이전보다 훨씬 격하된 것이었다(盧泰敦, 1997a). 또한 신라는 보덕국의 설치를 통해 당과 대등한 관계로 신라의 국제적 위치를 부각하고자 한 것으로(金壽泰, 1994), 당이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백제를 지배하고 신라마저 계림대도독부로 지위를 격하시킨 것에 대한 대응조치로 볼 수 있다(임기환, 2003).
신라는 안승과 고구려 유민을 안치하기 위해 한성에 상응하는 위상을 갖고 웅진성과 함께 백제 말기의 중심지 중의 하나로, 기반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던 금마저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금마저에는 도성을 모방한 각종 관청이나 사찰이 조영되어 있어 도성에 버금가는 도시적 경관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여호규, 2003). 왕궁리 유적은 장기간의 발굴 조사를 통해 사비시기에 조영한 이궁(離宮)이나 별궁(別宮) 등 궁궐 유적임이 밝혀졌다. 익산 지역에서 시가 구역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궁궐과 사찰이 다수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부도(副都)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여호규, 2023). 왕궁리 유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내부가 4개의 동서석축으로 구획되고 외곽이 장방형의 궁장(宮牆)으로 둘러싸여 있는 계획성이다. 그 내부에 각종 건물과 시설이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석축의 기초부 위에 판축(版築)한 장체(墻體)를 올리고 기와를 얹은(瓦葺) 왕궁의 담장과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궁장 내부는 축대에 의해 네 공간으로 분할되어 대형 전각건물을 비롯한 많은 건물지가 분포하는데, 왕궁과 관련된 각종 건물, 정원, 공방 등을 계획적으로 배치하였다(이병호, 2020).
금마저는 백제 말기 왕도급 위상을 갖는 정치 중심지의 하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는 유력한 백제 세력이 잔존해 있었을 가능성이 높고, 신라가 안승과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에 편제한 것은 기존의 백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조처로도 볼 수 있다. 보덕국은 그것이 형식적이라도 독립된 국가로 존재했기 때문에 백제에서 왕도급으로 조영된 금마저의 도성시설은 보덕국의 형식적 외양에 부합했을 것이다(임기환, 2003).
보덕국이 왜에 보낸 사신들은 상부(上部), 전부(前部), 후부(後部), 하부(下部), 남부(南部), 서부(西部) 등의 부명과 대상(大相), 위두대형(位頭大兄), 대형(大兄), 주부(主簿) 등의 관등명을 사용하였는데, 모두 종전의 고구려에서 사용한 것이었다. 고구려의 수도와 별도에는 각각 5부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행정구획단위였다. 동시에 이들 5부에 귀족들이 소속되어 일종의 귀족들의 원적과 같은 성격을 가졌다(노태돈, 1999). 고구려의 부명을 그대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금마저로 이주한 뒤에는 새로운 통치질서와 행정편제에 따라 소속부가 개편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보덕국은 고구려의 부명과 관등명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고 외견상으로 독립국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임기환, 2003).
683년 신라가 안승을 왕경으로 불러 소판(蘇判)으로 삼고 김씨 성을 내리기 전까지 안승은 금마저에서 보덕국왕으로 존재하였고 그 이하는 보덕왕의 신하로서 고구려의 관등체계 속에 서열화하였다. 신라 역시 보덕국의 외교권을 인정하고 혼인정책 등을 구사하면서 독립국으로서 대우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보덕국은 태생적으로 신라의 감시와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독립된 국가의 형식을 갖고 있었고 적어도 그 형식을 10년 동안은 유지하였다.
684년 보덕국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읍성은 함락되고 주민들을 나라 남쪽의 주·군으로 옮기는 것으로 반란은 마무리되었고 보덕국은 소멸되었다. 신라는 즉시 보덕국의 민들을 재편하는 작업을 한 것으로 보인다. 685년 봄 완산주(完山州)를 다시 설치하고 3월에는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여 여러 주·군의 민호를 옮겨 나누어 살게 하였다. 남원소경에서 확인되는 고구려악(高句麗樂)은 보덕국의 주민들이 이 지역에 편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林炳泰, 1967).
신라는 보덕국이 해체되자 행정구역을 재편하고 보덕국 민들을 금마저로부터 이주시키고 보덕국의 군사를 해체하여 왕경을 수호하는 신라의 군인으로 편입시켰다. 또한 고구려의 지배층 출신에게 신라의 관등도 부여하였다. 마치 고구려의 잔재를 일소하려는 듯 보덕국 민에서 신라의 신민(臣民)으로 탈바꿈하는 일련의 정책이 이어졌다. 모든 국가는 건국과 멸망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덕국은 그 태생 자체가 소멸을 전제한 시한부와 같았다. 안승을 금마저에 안치하고 고구려왕으로 봉한 것은 고구려 유민들의 독자적 국가 재건을 저해하려는 정책이었다(梁炳龍, 1997).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할 당시에는 인국으로 형제처럼 지내자는 수평적 관계에서, 나당전쟁이 종결되면서는 구생(舅甥)의 관계로 격을 조정하는 모습이 확인된다(최희준, 2021). 보덕국에 대한 신라의 정책이 상황에 따라 긴밀하게 조정되었음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