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돌궐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
4. 돌궐로 이주한 고구려 유민
고구려 유민 중 일부는 돌궐로 들어갔는데, 멸망 이후의 혼란 속에서 요동 등의 고구려 고지에서 돌궐로 직접 들어갔거나 당의 변경지역에 강제 천사된 후 이탈하여 돌궐로 들어갔을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돌궐로 들어간 고구려 유민의 동향이 포착되는 것은 현종 대인 715년으로 돌궐과 토욕혼 등 유목 부락이 당에 내부하였는데, 그중 고구려 출신의 고문간과 고공의가 확인된다. 고문간이 묵철가한(默啜可汗)의 사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왕 막리지(莫離支)라는 위상에 걸맞게 상당한 규모의 고구려 유민을 통솔하여 돌궐로 들어갔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공의와 고정부도 별개의 집단을 거느리고 자체의 조직과 습속을 유지하면서 돌궐제국에 복속한 것 같다(盧泰敦, 1981).
당은 중종 대부터 돌궐을 와해시키기 위해 묵철가한의 목을 가져오면 국왕으로 봉하고 제위대장군으로 임명하며 재물 2,000단을 주겠다는 현상금을 걸어 유목 부락 추장들을 포섭하는 수항(受降)을 구상하고 있었다(丁載勳, 2013). 돌궐에 복속되어 있던 많은 유목 부락들이 묵철가한의 포악함과 원정 참여에 대한 합당한 급부를 제공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가지면서 돌궐 지배체제는 서서히 분열하기 시작하였고, 당은 돌궐로부터 이탈한 부락들을 초무하며 번장으로 우대하였다(丁載勳, 2015). 713년 당은 고려 대수령 고정부에게 특진을 배수하였는데, 이는 돌궐 내 고구려 유민집단의 이탈을 조장하려는 책략이었고 2년 후 고문간 등도 당조로 투항하였다(盧泰敦, 1981). 이는 돌궐의 예하 부락에 대한 통제가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데, 계속된 유목 부락의 투항은 중종시기부터 돌궐을 와해시키기 위해 번장을 우대했던 정책, 즉 수항이 이때 효과를 내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정재훈, 2016).
715년 8월 현종은 당에 내부한 고문간 등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식읍과 사택(賜宅), 마(馬), 물(物)을 사여하였다. 고문간은 종1품의 요서군왕(遼西郡王)과 정3품의 좌위대장군원외치동정원에 제수되었고 식읍 3,000호와 사택 1채, 말 4필, 물 600단을 받았다.주 010 고문간이 요서군왕에 봉해진 이유에 대해서는 그가 돌궐로 귀부하기 전의 거주 지역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본 견해가 있는데, 요서의 영주 방면이나 고구려 고지에서 흥안령(興安嶺)을 통과하여 돌궐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된다(盧泰敦, 1981).
고문간과 함께 당에 내부했던 인물들에 대한 당조의 대우를 비교해 보면 관직과 식읍, 증물 등 모든 면에서 고문간이 최상의 대우를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가 묵철가한의 사위라는 점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묵철가한의 사위가 돌궐로부터 이탈하여 당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돌궐 부락을 와해시키는 데 상당한 선전이 되었을 것이다.
같은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공의와 비교해보면 작과 직사관 모두 한 단계씩 고문간이 더 높고, 식읍은 1,000호, 말은 2필, 증물도 200단이 더 많다. 고공의는 사택도 받지 못했다. 당이 파악한 막리지와 대수령이라는 고문간과 고공의의 지위가 자칭이었는지, 실제였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이들에 대한 차등적인 대우는 그들이 각각 이끈 집단의 크기나 고구려와 돌궐에서의 지위 차이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당에서의 대우, 즉 기가관의 수여 원칙 중에는 본번(本蕃)에서의 지위와 함께 당에 대한 공로도 참작했을 것이다(李基天, 2014).
고문간 등은 하남에 안치되었는데, 함께 당에 내부했던 협질사태(■跌思太)를 비롯하여 항호(降胡) 중에는 배반하고 다시 돌궐로 돌아가는 경우도 나타났으나 고문간은 안정적으로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당으로 귀부한 지 햇수로 5년이 된 719년에 당조가 고문간의 처 아사나씨를 요서군부인(遼西郡夫人)에 봉하였다. 이는 당조와 고문간 사이에 신뢰관계가 구축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 멸망 이후 유민들은 새로운 체제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이다. 강제적 또는 자발적으로 여러 지역으로 이동한 유민들은 새로운 공간에서 정치적·행정적 지배를 받으며 적응해 갔고 유민들을 편제한 주체는 이들을 자신들의 공간에 빠르고 안정적으로 긴박하여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지 않도록 여러 정책을 구사하였다. 유민들에게 관적(貫籍)이나 거주지에 대한 선택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고 이들은 필요에 따라 언제, 어디로든 이동될 수 있는 존재였다. 신라가 안승을 금마저에서 경주로 옮겨 살게 한 것이나 보덕국의 반란을 진압하고 주민들을 나라의 남쪽으로 옮긴 것, 일본이 유민들의 안치 지역을 옮겨 고려군을 설치한 것, 당이 강제 사민한 유민들을 다시 여러 지역으로 옮긴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돌궐로 들어간 일부 유민의 경우는 돌궐이 혼란한 상황에서 당으로 내부하여 최상의 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당은 고구려의 상층 지배층 출신이나 고구려 멸망에 협력한 자들을 당의 관제 속에서도 최상위 집단에 두고 특권을 유지시켜 당조에 빠르게 동화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유민 1세대는 관직과 면세, 면역이라는 사회·경제적 특권을 대를 이어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전공을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선대의 군공으로 후대는 문음 자격을 획득하여 관직의 재생산을 통해 당조에서 관인 신분을 이어가고자 한 것이다. 안사의 난을 전후로 활동한 유민 후속 세대는 중앙과 지방에서 당조 권력의 중심에 한층 직접적 영향을 미치면서 활약했다. 일본은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 관계를 의식하여 유민 후속 세대를 발해 외교의 전면에 세워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