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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1. 발해 건국의 배경과 고구려 계승의식

1. 발해 건국의 배경과 고구려 계승의식

기원전 37년부터 668년에 멸망할 때까지 700여 년간 존속하던 고구려가 멸망하자, 고구려 영역의 귀속(歸屬)이 복잡해지면서 유민들도 다양한 지역에 잔존하게 되었다. 유민들은 그들의 왕조를 포기하지 않고 여러 곳에서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고구려 멸망 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설인귀(薛仁貴)를 안동도호에 임명하였다. 당은 투항한 고구려 지배계층을 각 지방의 도독(都督), 자사(刺史), 현령(縣令)에 임명하여 이용하였다. 평양에 설치한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을 받았다. 한편 부흥운동을 막기 위해 고구려의 왕과 귀족들을 당의 내지(內地)로 강제 이주시켰다.
멸망 이후 고구려의 옛 땅에서 당의 군대와 싸워가며 전개했던 부흥운동은 안시성(安市城)전투에서 패하여 성(城)이 함락되어 실패하였다. 672년에는 고구려부흥군이 신라가 지원한 군대와 합세하여 예성강 부근의 백빙산(白氷山)에서 패배하였다. 고구려군은 각 지역에서 부흥군이 패배하자 신라로 투항하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부흥시키려는 저항운동은 끝나지 않았는데, 677년까지 압록강 유역에 있던 11개의 성(城)은 당군(唐軍)에게 항복하지 않고 고구려를 자처하였다. 신라군의 지원을 받은 고구려의 부흥운동으로 인하여 당은 676년 도성인 평양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부를 요동 지역의 거점이었던 신성(新城)으로 이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은 요동 지역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많은 유민들은 요서 및 돌궐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강제로 요동 및 당의 내지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보장왕이 말갈인들과 모의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을 꾀하자 결국 당으로 불려갔으며, 아울러 많은 고구려 유민들도 격리 차원에서 고구려 땅에서 먼 거리에 있는 내지로 끌려갔다. 이러한 당의 계략에도 불구하고 유민들의 저항은 가라앉지 않았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고구려 유민들은 698년 발해를 건국하는 데 참여하였다.
발해 건국은 폭동을 기화로 지금의 요동 지역 조양(朝陽)인 영주(靈州)에서 일어났다. 영주는 많은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거란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다. 대조영(大祚榮)은 698년 ‘계루(桂樓)의 옛 땅’에 있다는 ‘구국(舊國)’의 동모산 기슭(지금의 길림성 돈화시 성산자산)에 나라를 세우고 진국(振國)이라 하였다. 발해의 주민 구성은 흔히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족이었다는 이분법적인 주장도 있으나, 발해의 피지배계층 다수도 고구려 유민 출신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이질적인 존재였다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인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는데, 발해국을 고구려의 계승자로 자인(自認)하여 역대 국왕들은 ‘고려국왕(高麗國王)’이라 하여 외국에 보내는 공문서에까지 그 칭호를 사용하였고, 발해국이 멸망한 뒤에 그 유민들이 부흥운동을 할 때마다 ‘동명구양(東明舊壤)’이니 ‘고려유려(高麗遺黎)’니 하는 말들을 가지고 동족을 규합하고 대외적으로 호소하기도 하였다(이우성, 1974).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인식은 발해사 정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대 국가에서도 한 국가의 정체성을 논할 때 영토와 주민을 주요 요소로 생각할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였던 곳에서 출발하였고, 주민도 고구려 유민이 대다수를 이루었다.
230여 년에 걸쳐 만주 및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존재했던 발해는 926년에 내부 갈등을 틈탄 거란족의 기습적 공격을 받아 허무하게 멸망하였다. 거란족은 일부 발해 지배층을 포섭하여 동단국(東丹國)을 세웠다. 거란의 지배력은 발해가 존재했던 지역에 세력을 미치지 못하였고, 발해 유민들은 각지에서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일부 발해인들은 고려로 넘어갔다. 동단국에 참여했던 일부 발해인도 거란의 지배에 적대감을 드러냈다. 발해 유민의 저항과 불복은 거란에 위협이 되었다. 결국 동단국은 982년에 멸망하였다.
요동으로 이주당한 발해 유민은 그곳에 뿌리를 내려 번성하였다. 그래서 요동이 ‘고발해지(故渤海地)’ 또는 ‘발해고국(渤海故國)’이라 불릴 정도로, 이 지역 주민의 대표적인 존재가 되었다. 발해의 영역이었던 만주 일대는 대체로 송화강 유역을 경계로 그 서남 지역은 거란(요)의 영역에 속하였는데, 거란은 이 지역에 주(州)를 설치하여 지배하였다. 송화강 동쪽 지역은 여진족의 여러 집단이 할거하면서 거란과 조공관계를 맺고 있었다.
발해는 존립 당시에 당의 개원(開元) 예(禮)와 역(曆) 및 율령을 수용하였으므로, 제도와 문물 면에서 당의 영향이 컸다. 이는 기본적으로 당시 발해인 사회의 성격이 한인(漢人) 사회와 비슷한 상태였기에 가능했다. 발해인과 한인을 함께 주현민(州縣民)으로 편제하였고 일정 지역에 양자가 섞여서 살았다.
발해인과 여진인의 구분은 여진족이 세운 금 때도 여전하였다. 금을 건국할 당시 아골타(阿骨打)는 요동 일대의 발해인을 회유하는 데 주력하여, “본래 한 집안이었다(本同一家)”고 천명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구분과 차별이 뚜렷하였다. 이후 요동 지역의 발해인이 밀집해 거주하며 번성하는 것을 우려하여 이들을 장성 이남 지역으로 수백 호씩 소규모 단위로 이주시켰다. 이것은 발해인들이 세력화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비단 요동의 요양 지역에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발해인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발해인에 대해서도 철저하고 광범위하게 강제적으로 이주시켰다.
발해 왕실의 고구려 계승의식을 전하는 주요 기록은,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와 일본과의 교섭 과정에서 일본인이 남긴 발해에 관한 서술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발해와 일본의 공식적인 첫 교섭은 발해 건국 이후 30년이 지난 727년 발해 사절단이 일본에 파견되면서 비롯되었다. 발해 무왕(武王)이 일본에 보낸 국서는 이후 진행된 양국의 교섭 형식과 고구려와의 관계에 대한 발해인의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교서에 의하면 “[대(大)]무예(武藝)가 외람되이 열국(列國)을 주관하고 제번(諸樊)을 총괄하여 고려의 옛 터를 복(復)하고 부여의 유속(遺俗)을 지니게” 되었다고 표현하였다. 이 구절은 발해가 고구려의 유민들에 의해 건국된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중요 자료이다. 즉, 발해가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고구려를 계승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문장이 발해의 역사계승의식을 드러내는 의미가 있는 것은 발해 건국 30년 되던 해에 처음으로 일본과 국교를 맺으려고 하면서 자국 현황과 내력을 집약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특히 ‘복(復)’은 ‘회복’하였다는 의미를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부여의 ‘유속(遺俗)’을 지니게 되었다는 표현에서도 발해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간 발해 사신이 고인의(高仁義), 고제덕(高齊德)인데, 이들은 분명히 고구려계의 인물일 것이다. 국서의 내용이나 사신이 고구려를 강조하는 것은 발해가 고구려의 역사성을 잇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 이다.
일본은 국서를 받은 이듬해인 728년에 발해에 국서를 보내 “천황이 삼가 발해군왕(渤海郡王)에게 묻는다. 계(啓)를 보고 [발해가] 옛 땅을 회복하고 지난날 조선(祖先)의 훌륭한 덕업을 잇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짐(朕)이 이를 기쁘게 여긴다.”고 하였다. 이는 일본 측이 발해가 보낸 국서에 대해 인정하는 답장으로 볼 수 있다. 아울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노태돈, 2020).
발해는 건국 이후 725년경 무왕(武王) 대에 당으로부터 외교적인 압박을 받게 되었다. 당이 흑수말갈에 흑수부(黑水府)를 설치함에 따라 자신들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위협에 직면하여 발해 조정에서는 대응방식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무왕은 강경책을 택하여 오히려 흑수말갈을 공략하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무왕의 동생인 대문예(大門藝)는 고구려가 대당전쟁을 하다가 결국 패망하게 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당에 유화정책을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고려 918년 태조 왕건은 도읍을 송악(松岳)을 중심으로 정하였는데, 옛 고구려 주민들이 지향하는 바에 기초하였다. 또한 고려는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에 대한 봉제사(奉祭祀)를 행하였다. 고려 왕조가 국호를 통하여 표방하였던 고구려 계승의식은 역사적 과거에 대한 관념상의 인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고려 건국기 송악을 중심으로 하는 주민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고구려계 유민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김광수, 1988).
고려 후기에 이승휴(李承休)는 고려가 몽골의 외압을 받고 있던 시기에 『제왕운기(帝王韻紀)』를 편찬하였다. 단군, 신라, 고구려, 옥저, 부여, 예맥 등을 단군의 후예라고 명기하고, 발해의 건국, 멸망 후 고려에 귀부한 사실 등을 짧게 소개하였다. 또한 발해와 고려와의 연계도 강조하여 같은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임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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