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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통사

3. 후대 동아시아 각국의 고구려 인식

3. 후대 동아시아 각국의 고구려 인식

고구려는 5세기 이래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고구려의 이러한 외교적 태도는 당시 독특한 동아시아 국제질서와 맞물려 있다. 북위가 439년에 강력한 세력으로 대두하자 북위를 가운데 두고 중국의 남조 송과 북쪽의 유연 및 서쪽의 토욕혼, 그리고 동쪽의 고구려는 서로 연결을 꾀하며 북위를 포위, 견제하는 한편, 각자 북위와 우호관계 혹은 적대관계를 맺게 되었다. 5세기 이래 동북아시아에서 강자로 대두한 북위에 대해서 고구려는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는 고구려가 427년에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천도하게 된 배경으로서도 작용하였다. 이후 고구려는 남진정책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고구려는 북위와의 위태로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북위의 적대세력인 남조 국가 및 유연과의 연결을 도모하는 견제책을 구사하였다. 고구려와 북위는 서로의 세력권을 인정하면서 빈번한 서신 교환과 문물교류를 통해 당시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 가운데 가장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고구려는 북위를 견제하기 위하여 남조의 송과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송은 북벌을 준비하면서 고구려에 전마(戰馬)를 요구하였는데, 이에 고구려는 439년에 말 800필을 보내기도 하였다. 북위와의 관계가 개선된 뒤에도 고구려는 북위에 대한 외교적 견제책으로 남조와의 교섭을 계속하였다. 고구려는 유연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479년 고구려와 유연이 연합하여 지두우 분할을 시도한 사실에서 이 무렵 양국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물론 북위에 대한 견제책이었다.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들과 다양한 외교력을 구사하여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북중국의 국가와는 5세기 초에 후연과의 전쟁을 치른 이후 598년 수와 전쟁을 치를 때까지 전쟁을 하지 않았다. 북방 유목국가와도 6세기 후반 돌궐과 충돌하기 전까지 우호적이었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동북아시아 지역에 대한 중국 세력이나 북방 유목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한 가운데 고구려는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였다. 세력권의 외곽에 거란족과 말갈족의 일부를 거느리고, 지두우 분할을 시도하며 남실위(南室韋)에 철을 공급하면서 내몽골 동북부 지역에도 세력을 확장하였다. 한반도 안에서는 남진정책을 추진하여 백제를 압박하면서 중북부 일대를 차지하였고, 신라에 대해서도 정치적·군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광개토왕비나 충주고구려비에서 엿볼 수 있듯이 고구려는 백제나 신라를 ‘속민(屬民)’이나 ‘동이(東夷)’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동아시아에서의 고구려의 천하관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6세기 이후 북위의 분열에 따른 대륙의 정세 변동에 대해서 고구려는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북중국에서의 분열과 대립이 고구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한편 고구려의 국내 사정이나 한반도에서의 역학관계 변화로 인하여 대륙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6세기 초부터 귀족세력 간의 갈등으로 인한 정치적 내분이 발생하였다. 고구려는 국내정치 내분으로 인하여 국제정세의 변동에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 공격에 의하여 551년 한강 유역을 상실하였다. 고구려는 한반도와 대륙에서의 정세 변동에 대처하기 위해서 귀족연립체제를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부 분쟁을 일단 수습한 고구려는 남북 양쪽의 대외적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이후 돌궐이 동진(東進)해 오는 것을 저지시켰다. 특히 요해(遼海) 지역의 거란족·말갈족에 대한 지배권은 돌궐과의 주된 분쟁 대상이었는데, 6세기 말까지 고구려가 거란·말갈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해가면서 요해 지역으로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하였다. 한강 유역에서는 553년 관산성전투에서 백제군을 대파하고 성왕(聖王)을 죽임으로써 고구려 남부 국경을 안정시켰다.
6세기 후반 중원에서 수가 등장하여 중국을 통일하고 돌궐을 복속시키는 등 5세기 이래 다원적 국제질서를 바꾸는 변화가 초래되었다. 중국의 남·북조 국가와 북방의 유목세력, 그리고 고구려를 중심축으로 하는 상호 세력균형에 의해 유지되어 오던 국제질서가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13세기 고려와 원 세조 사이에는 원 세조 때 세워진 일정한 원칙이 있었고, 그것이 세조 이후로도 계속해서 양국 관계를 규정하였다(이익주, 1996). 원종(元宗)이 태자로서 몽골에 갔을 때 마침 내전 중에 있던 쿠빌라이를 만난 것은 고려·원 관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쿠빌라이가 원종을 처음 만났을 때 “고려는 만 리(萬里)나 되는 큰 나라이다. 당 태종이 친정(親征)하였어도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대가 스스로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며 기뻐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이제까지 수십 년 동안 저항해왔던 고려의 태자가 자신에게 조회(朝會)한 것은 곧 천명(天命)이 자신에게 기울었다고 생각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선전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을 것이다.
고려가 외교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고려의 끈질긴 항전에 대한 몽골 나름의 평가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즉 당 태종이 친정했어도 굴복시키지 못한 나라, 즉 고구려를 계승한 강국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데에 잘 드러나 있다.
조선 왕조에 들어서도 고구려에 관한 지식은 문헌을 통해 이어졌으며, 이를 통해 지식인들은 고구려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고구려가 수와 당의 침공에 맞서 대첩을 거둔 역사는 후대의 역사에서 군제(軍制)의 강화를 언급할 때 자주 등장한다. 안시성전투도 자주 거론하였는데, 전쟁을 할 때 수성(守城)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주 언급하였다. 성종 대의 양성지(梁誠之)는 군정(軍政) 제반에 관해서 건의할 때 고구려의 대수·당 전쟁을 언급하였다. “지금 요동의 호구(戶口)에서 고려 사람이 10분의 3인데, 서쪽 지방 요양(遼陽)에서 동쪽 지방 개주(開州)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남쪽 지방 해주(海州)·개주(蓋州)의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취락이 서로 이어져 있으니, 이것을 참으로 국가에서 급급히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명과 연접한 평안도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요동 인근 지역으로 가서 사는데, 그 수가 많았음을 지적하였다. 이렇게 평안도 사람들이 쉽게 요동 지방에 가서 정착했다는 것은 그곳이 낯설지 않은 연고가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고, 그것은 고구려의 강역이었음을 암시한다(정진헌, 2004).
조선시대에는 군사와 관련된 일이나 외적과의 항쟁에는 반드시 고구려를 거론하여 교훈으로 삼았다. 특히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범해서 대패한 사실은 수시로 이야기했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수와 당을 물리친 점을 들어서 조선시대에도 강국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가 수 양제나 당 태종의 공격을 물리쳤다는 사실은 그 시대의 무인들이 배우고 본받아야 할 자랑스런 과거로 인식되었다. 세조는 자신이 편찬했던 『역대병요(歷代兵要)』의 내용을 축약하여 무인들에게 읽히려고 시도하면서 고구려와 관련된 무용담을 숙지시키려고 하였다(한명기, 2006).
성종이 독권관(讀券官)들을 모아 놓고 진현시(進賢試)를 볼 때 국방의 요령을 구하면서 “…고구려에서는 수와 당에 능히 대항하여 천하에서 강국으로 일컫게 되었으니, 그 적국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계책이며 어떤 인재였는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국방과 관련해서 고구려를 조선이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여겼다. 살수대첩과 안시성전투 등을 언급하면서 자신들이 국방을 강화하거나 전쟁에 관해서 논의할 때 반드시 귀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양성지를 비롯한 15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은 요동을 과거 고구려의 영토로, 압록강에서 요하 일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아국(我國)으로 인식하고 있었다(한명기, 2006).
양성지는 세조의 혁신정책 중심부에 있었는데, 그는 고려, 삼국, 고조선의 시조나 그에 따른 배신(陪臣), 그리고 능묘에 치제(致祭)할 것을 건의하였다. 조선이 고구려를 계승한 대국이자 요동 지역을 고구려의 옛땅으로 여기는 인식을 바탕으로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에 대한 치제를 하였다. 세조는 누구보다도 고구려의 시조를 제사하는 데 깊은 관심과 열성을 보였다. 그는 즉위 직후 중국 사신이 왕래하는 도로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던 동명왕 사우(祠宇)를 정비하는 데 각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제관이 입는 복식을 중앙에서 직접 제작하여 내려보내기도 하였다. 세조는 동명왕의 사당에 행차하여 몸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강국이었다는 인식은 16세기 이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 일본에 갔던 김성일(金誠一)은 일본 승려 종진(宗陳)에게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명은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편찬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누락시켰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수와 당을 물리칠 정도로 강대한 군사력을 지녔던 고구려에 대한 선망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더욱 절실하게 나타났다. 임진왜란 당시 전쟁 수행을 지휘했던 유성룡(柳成龍)은 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삼국 가운데 하나였던 고구려가 수·당과 맞서고 있는 각 성마다 수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고연수와 고혜진이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안시성을 구원하려 했던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병력을 많이 동원해 봐야 겨우 1만여 명에 지나지 않게 된 ‘쇠약함이 누적된’ 현실을 통탄했다(한명기, 2006).
숙종도 평소에 국방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고구려의 강성한 군사력을 선망했고, 동시에 당시 조선의 군사적인 미약함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숙종은 특히 고구려가 성을 뛰어나게 지키며, 수와 당의 많은 군사를 물리친 것을 높이 평가했다. 영조도 고구려의 역사를 살피면서, 그것을 교훈으로 삼았다. 즉위 초 영조는 『동국통감(東國通鑑)』 등 조선의 역사서를 경연에서 강독교재로 활용하였으며, 논의를 통해 멸망 원인을 분석하여 거울로 삼으려고 하였다. 한편 영조는 지방관들에게 고구려 시조의 능묘를 제대로 관리하라고 명하였으며, 자신은 직접 동명왕의 제문을 짓기도 하였다. 영조 대 고구려에 대한 인식 중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고구려를 ‘군사강국’으로 본 것이었다. 그리고 나아가 고구려를 본받아 정예군을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의 왕이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병제와 군제에 관해서 논의할 때 자주 고구려의 대수·당 전쟁을 돌아보며 반성하였다. 남으로는 임진왜란, 북으로는 병자호란을 심하게 겪으며 국가의 강대함, 군사력의 중요성을 실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의 군정(軍政)은 현실적으로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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