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조선 후기~1970년대, 고구려사 연구의 태동
2장 조선 후기~1970년대, 고구려사 연구의 태동
오늘날 고구려사 연구의 전통은 조선 후기부터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역사 서술을 통해 각종 사료가 집성되었고 몇몇 문제의 고증이 시도되었는데, 이는 근대적 연구의 기초를 제공하였다. 근대 역사학의 형식과 방법은 19세기 후반 이후 수용되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일본의 역사학계였다. 일본의 역사학계는 19세기 후반에 발견된 광개토왕비에 주목해 문헌사료 비판의 준거로 삼고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일본 역사학계의 연구는 자국 중심의 고대사 이해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고구려사를 비롯한 한국사에 대해서는 차별적 시각을 보였다. 고구려사의 주체성을 고려하지 않았고, 정체성을 전제하였다. 식민주의 역사학이었다.
한국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한국사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는데, 이에 따라 중시된 것이 고구려사였다. 백남운(白南雲)을 비롯한 일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는 고구려가 노예제 국가로 발전하였다고 보면서 한국사의 세계사적 보편성을 탐색하였다. 김광진을 비롯한 일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는 한국사가 아시아적 특수성을 갖는다고 보았는데, 고구려의 경우 국가와 촌락·민의 관계에 주목하였다. 이와 같은 시각의 차이는 광복 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 북한 역사학계 내부의 주된 논쟁 주제 중 하나였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이후 북한 역사학계에서는 민족주의적 시각이 굳어지며 논쟁은 종식되었다. 고구려는 중세 봉건제 국가로 규정되었고, 고대 노예제 국가인 고조선에서 일국사적 발전의 노정을 걸어온 것으로 통설이 확립되었다. 6·25전쟁 이후 분단이 고착되면서 북한에서는 평양의 역사적 전통에 주목하며 고구려사가 각광을 받았다. 1970년대 이후 주체사상이 확립되며 그와 같은 경향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런데 북한에서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은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학문보다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한 면이 컸다.
광복 이후 남한의 역사학은 실증이 연구의 주된 방식이었지만, 고구려사에 대한 전문적인 연구는 활발하지 못하였다. 본격적인 논의는 1970년대 이후에 전개되었다. 고대 국가의 발달 과정에 대한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며 경합하였고,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5부(部)를 중심에 두고 한층 역동적인 발전상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이에 기초해 정치제도와 귀족세력의 변화를 탐구하였다. 정치사 방면에서 초기사·중기사·후기사가 구분되었고, 이로써 1980년대 이후의 연구에 토대를 제공하였다. 오늘날의 고구려사 연구가 태동하였던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