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료 연구
1. 사료 연구
1) 문헌사료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사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라는 국내 사료일 것이다. 이 외에도 중국 정사를 비롯한 중국 측 사료,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 측 사료, 조선 이후의 고구려 관련 사료 등이 있다. 이 가운데 2000년 이후 『삼국사기』에 관해서는 원전 연구가 이루어졌다. 『삼국사기』 전거에 관한 연구(이강래, 1996) 이후 고구려본기의 전거자료나 원전자료에 대한 계통과 성격을 밝히는 작업이 지속되었다(임기환, 2006; 정호섭, 2011; 전덕재, 2016). 한편 대외관계 기사에 대한 분석도 이루어졌다(임기환, 2007). 아울러 『삼국유사』에 대한 역주작업이 이루어져 일련의 성과가 간행되기도 하였다(강인구 외, 2002; 하정룡, 2003; 최광식·박대재, 2014). 이와 함께 『제왕운기』에 대한 연구(신종원 외, 2019)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중국 측 연구자들도 기존의 동향과는 다르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연구(李大龍, 2013; 孫文範, 2003)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중국 측 자료에 대해서는 중국 정사 동이전 교감과 중국 정사 외국전 역주라는 방대한 작업이 동북아역사재단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동북아역사재단, 2018). 또한 중국 당 고종 현경 5년 이전에 장초금(張楚金)이 저술하고, 송대에 옹공예(雍公叡)가 주석을 붙인 유서(類書)인 『한원(翰苑)』에 대한 역주도 이루어졌다(동북아역사재단, 2018). 『한원』은 번이부(蕃夷部) 1권만이 일본 후쿠오카시 다자이후(太宰府) 덴만구(天滿宮)에 필사본이 전하고 있는바, 여기에 고구려와 관련한 내용이 있다. 중국 측 연구자들도 중국 정사 고구려전에 대한 연구(朴燦奎, 2000; 劉子敏·苗威, 2006; 姜維東·鄭春穎·高娜, 2006; 鄭春穎·姜維東, 2014; 張芳, 2015)를 비롯하여 『한원』 고려기(高麗記)에 대한 연구(高福順·姜維公·戚暢, 2003)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일본 측 사료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한국 관련 기사에 대한 연구(김현구 외, 2002), 『일본서기』에 대한 역주(연민수 외, 2013)와 헤이안시대 초기인 815년에 편찬된 일본 고대 씨족의 일람서로 도래인계 고려에 41씨족이 포함되어 있는 『신찬성씨록』에 대한 번역(연민수, 2020) 등이 이루어졌다. 이 외에도 고구려 관련 문헌사료에 대한 분석의 하나로 청 건륭제의 칙명을 받아 1778년에 완성된 『만주원류고』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졌다(박찬흥, 2018; 이정빈, 2018; 정호섭, 2018; 조영광; 2018). 이러한 연구들은 역사 연구의 가장 기본이 되는 사료에 대해 재검토하여 보다 명확하고 참고가 되는 기초적 자료와 정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의미 있다.
2) 금석문 자료
고구려 금석문을 비롯한 문자자료에 대해서는 이 책 7장에서 정리하는 관계로 여기서는 주요 금석문에 대한 자세한 연구내용의 소개보다는 대체적인 경향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한다. 고구려 당대에 건립된 비인 광개토왕비, 집안고구려비, 충주고구려비는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료라 할 것이다. 비문이 4~5세기 무렵 고구려 전성기의 자료라는 점에서도 고구려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더욱 중요하다. 이 밖에도 안악3호분 묵서명, 덕흥리고분 묵서명, 모두루묘지명 등의 묵서명과 고분 벽면의 단편적 묵서명, 서봉총 은합명이나 광개토왕 호우명 등 신라 지역에서 확인되는 명문자료,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을 비롯한 불상의 명문, 평양성 석각명, 기와나 벽돌, 토기 등에서 확인되는 명문, 중국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유민의 묘지명 등 다수의 고구려 관련 금석문 내지 묵서명 등이 있다. 또, 고구려에서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관구검기공비나 돌궐비에 고구려 관련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하다.
19세기 말경에 발견된 광개토왕비와 관련해서는 현재까지 1,000여 편에 이르는 연구성과가 한중일을 중심으로 발표되었고, 집안고구려비나 충주고구려비에 대한 연구도 각각 수십 편에 달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연구성과가 제시된 것은 비문에 대한 논란도 많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광개토왕비에 대해서는 비의 발견 연대와 형태, 비의 탁본, 비문의 판독과 해석, 비의 위치와 성격, 비문의 내용에 대한 이해(초기 왕계, 건국신화, 신묘년조의 해석, 고대 한일 관계, 백제를 위시한 정복전쟁)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해 이견이 있는 상태이다. 2000년대 이후의 연구도 이러한 문제에 대해 보다 세부적이고 정밀하게 방향을 잡고 연구가 진행된 측면이 있다. 특히 근래에 비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나 위치, 텍스트 구성, 판독 등에 대한 미시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서 광개토왕비의 이해에 대한 보다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2012년 7월 29일 집안시 마선향 마선촌에 있는 마선하 강가에서 발견된 집안고구려비는 후한시기 유행한 삼각형 규형비(圭形碑)로 총 218자로 구성되었다. 비의 상단 우측 부분이 손상을 입어 9자가 결실되어 있는 상황이다. 후면은 글자가 있었으나 마모가 심한 것으로 보고되었고, 인위적인 훼손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비가 공개되면서 그동안 비에 대한 학계 차원의 논의는 한국고대사학회에서 비공개 검토회의가 있었고, 고구려발해학회에서 예비적 검토가 뒤따랐으며, 판독회도 개최된 바 있다. 이후 중국 측의 공식 보고서도 간행되었다. 집안고구려비는 앞면이 10행으로 구성되어 있고, 뒷면은 거의 판독이 불가능하다. 집안고구려비의 앞면 1~2행은 고구려의 건국과 왕위계승, 3~10행은 왕릉 수묘 관련 사항 등을 기술하고 있어서 내용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집안고구려비는 광개토왕비와 내용상 유사한 부분이 많은 관계로 두 비의 관련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집안고구려비와 관련해서도 비의 제작연대, 판독과 해석 문제, 수묘제를 비롯한 비문 내용에 대한 이해, 비의 위치와 성격, 광개토왕비와의 관련성 등에 대해 이견이 있다.
한편, 집안고구려비의 발견으로 광개토왕비에 기재된 내용과 비교하여 고구려 수묘제에 대한 연구가 더욱 심화되기도 하였다. 왕릉 수묘제와 관련한 연구는 고구려의 대민지배나 율령 관련 내용도 상관 있기 때문에 많은 주목을 받았다. 특히 집안고구려비의 발견은 고구려 수묘제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었는데, 기존의 문헌사료나 금석문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내용이 확인되었다. 고구려 수묘제의 시행과 관련한 내용이나 수묘제를 수복하기 위해 묘상입비(墓上立碑)와 수묘연호 매매금지를 시행한 사실 등과 함께 원왕(元王), 연호두(烟戶頭) 등의 새로운 용어도 확인되었다. 이에 고구려 건국설화, 수묘제의 전개 양상, 율령제의 성격 등에 대한 연구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지만, 비문의 판독이나 건립시기 등을 둘러싸고 이견이 있다.
비의 성격과 관련해서는 광개토왕비의 ‘묘상입비’를 가리키는 특정 왕릉의 수묘비설(耿鐵華, 2013; 공석구, 2013; 여호규, 2013; 조법종, 2015 등)과 특정 왕릉의 ‘묘상입비’가 아니라 특수한 목적의 비라는 설(孫仁杰, 2013; 張福有, 2013; 정호섭, 2013; 이성제, 2013; 조우연, 2013; 김현숙, 2013; 임기환, 2014 등)이 대별된다. 수묘비설은 광개토왕 대에 세워진 선대 왕릉의 묘상입비 가운데 하나가 집안고구려비라는 것이다. 광개토왕비의 묘상입비에 관한 구절이 동일하게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럴 경우에는 광개토왕이 세운 몇 개의 ‘묘상입비’인 비석이 앞면의 내용은 동일하고, 뒷면에 연호두의 이름을 다르게 적었다는 정황적 설명이 가능하다. 그런데 연호두도 결국 신래한예와 같은 포로집단이면서 고구려로 편입되어 수묘역에 차출된 민(民)인데, 그러한 개별 민으로 구성된 연호의 호주 이름을 비석에 각각 기재하였다는 것이 고대 사회에서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현재까지 삼국시대 비석 가운데 일반 민의 이름이 기재된 금석문은 발견된 바가 없다. 이에 반해 특정한 목적을 가진 비라는 설은 비문에 특정 왕릉과 연관시킬 만한 표현이 없고, 수묘제와 관련한 일반 법령을 기술하고 있으며, 비석의 발견 위치가 특정 왕릉과 곧바로 연결시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을 들고 있다. 이에 특정 왕릉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여러 왕릉의 수묘제와 관련한 교령비, 율령비, 정율비, 수묘제 선포비, 수묘인 매매금지에 관한 고계비나 경고비 등으로 이해하고 있다.
고구려가 세운 석비는 광개토왕릉비와 충주고구려비 등이 전부라 할 만큼 매우 드문 상황에서 새롭게 발견된 집안고구려비는 고구려사 연구의 지평을 넓혀줄 수 있는 새로운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고구려 수묘제 운용과 관련하여 광개토왕릉비와 집안고구려비의 비교 검토를 통해 그 실제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필요가 있다. 두 비의 비교를 통해 고구려 수묘제의 운영과 아울러 대민지배방식 등 고구려 사회사를 구명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향후 수묘제와 관련한 또 다른 비가 발견된다면, 보다 명확한 이해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한다.
한반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구려 석비인 충주고구려비는 과거 ‘중원고구려비’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비이다. 이 비는 1979년 4월 충청북도 중원군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에서 발견되었다. 충주고구려비와 관련해서도 비의 제작시기와 건립시기, 비의 판독과 해석, 비문 내용에 대한 이해, 비의 성격 등에 관해 이견이 많다. 2000년대 초 고구려연구회 주도로 비의 판독작업이 있었고(고구려연구회, 2000), 여러 논의가 새로 이루어진 바 있다. 최근 한국고대사학회와 동북아역사재단이 공동으로 과학적 장비를 통한 새로운 기법의 판독작업을 실시하였는데(동북아역사재단, 2020), 제액의 문제와 판독 등 여전히 이견이 많은 상태다.
안악3호분, 덕흥리고분 묵서명, 모두루묘지 등을 토대로 한 연구(耿鐵華, 2000; 공석구, 2007; 임기환, 2007; 여호규, 2010; 정호섭, 2010; 이동훈, 2010; 안정준, 2013; 이준성, 2020 등)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성이나 고분 등 유적에서 출토된 단편적인 명문자료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임기환, 2007; 심광주, 2009; 여호규, 2010; 고광의, 2021; 2022 등).
근래 중국 서안과 낙양 등지에서 새롭게 확인되는 고구려 유민묘지명이 다수 소개되어 이에 관한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유민묘지명과 유민에 대한 연구는 고구려사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킨 측면이 있다. 아울러 유민묘지명을 역주한 성과가 제시되기도 하였다(신종원 외, 2015; 권덕영, 2021). 최근까지 확인된 묘지가 있는 고구려 유민은 고요묘, 고제석, 이타인, 천남생, 고영숙, 천헌성, 고모, 고족유, 고질, 고자, 고을덕, 천남산, 고연복, 천비, 고목로, 이인회, 왕경요, 고흠덕, 고원망, 두선부, 고덕, 유원정, 고씨 부인, 고진, 남단덕, 여항군 태부인 천씨 등이 있다. 이 외에도 고구려 유민 여부가 논란인 묘지명이 몇 개 더 있어 향후에도 고구려 유민묘지명은 더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대체로 묘지명 연구의 방향은 당에서의 행적을 밝히거나 고구려 유민들의 출자의식을 비롯한 정체성 연구로 집중된 경향이 강하다. 발견된 묘지명을 소개하면서 유민의 동향을 설명하거나 묘지명에서 나타나는 단서를 토대로 고구려사와 연관지어 설명하는 연구성과도 중국과 한국 학계에서 수십 편이 제시되었다. 또한 당에 거주하는 고구려 유민의 삶과 출자 및 정체성 등을 다룬 연구와 이주사나 디아스포라로 이해하는 연구도 나왔다(김현숙, 2004; 苗威, 2011; 拜根興, 2012; 이성제, 2014; 여호규·拜根興, 2017; 김수진, 2017; 정호섭, 2017; 이동훈, 2018; 우에다 기헤이나리치카, 2019). 유민 1세대나 2세대의 경우 고구려에서 삶을 영위한 바 있기 때문에 고구려사와 연관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후속세대의 역사가 과연 고구려사의 범주인지는 연구자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다. 최근 유민사 이해에 관한 기존의 민족주의적 해석에 대해 비판적 시각에서 유민들의 상장례를 통해 접근한 연구(정호섭, 2021)도 제시되었다. 고구려 유민사가 한국사와 관련하여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