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국외 문헌사료
6장 국외 문헌사료
고구려는 삼국 가운데 가장 일찍부터 중원(中原)과 교섭을 가졌고, 그 결과 중원 왕조들이 남긴 사서에는 고구려 관계 기사가 많이 남아 있다. 책봉(冊封)·조공(朝貢)의 공식적인 교섭 사실부터 고구려 내부의 정치상황이나 사회상, 제도에 이르기까지 이들 사서가 담고 있는 정보는 양적인 면은 물론이고 질적인 면에서도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못지 않다.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국내 사료와 함께 중국 사서의 관련 기록을 인용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고구려사 연구는 관련 자료들이 가진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를 사료로 이용해 왔다고는 보기 어렵다. 사료의 성격에 대한 고려 없이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이해할 때, 실제와 다른 모습을 그리게 되는 오류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서들이 이른바 동이열전(東夷列傳)을 두고 있어, 거기에 포함된 고구려전은 중국 사서의 고구려 관계 기사를 다룰 때 주된 검토의 대상이 되어 왔다. 관련 사서에 대한 문헌적 연구는 미흡한 채로 동이열전을 역주한 자료집이 연구의 기본자료가 되곤 했던 것이다. 본기와 인물열전 등이 기술하고 있는 관계 기사는 비록 수적으로 적고 기술 내용도 많지는 않지만 해당 사서의 고구려전에는 없는 내용이거나 사건의 경과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사기(史記)』·『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의 전사사(前四史)가 개인의 저작으로 만들어졌던 것과 달리, 『위서(魏書)』를 비롯하여 당대(唐代)에 만들어진 『양서(梁書)』·『진서(陳書)』·『북제서(北齊書)』·『주서(周書)』·『수서(隋書)』·『진서(晉書)』·『남사(南史)』·『북사(北史)』는 국가가 사관(史館)을 설치하여 사서 편찬을 전담시켜 저술한 사서이다. 『진서』의 편찬에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관여하였고, 이 때문에 황제권력으로 역사의 자립성을 왜곡했다는 비판이 있다(渡邊義浩, 2021). 이런 사정에서 『진서』가 고구려전을 두지 않아 진과 고구려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누락한 것이나,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 등이 645년 전쟁에서 태종과 당군이 불리했던 전황을 애써 감추고 기재하지 않은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한편 정사로 남아 있는 사서들 외에 현존하지 않는 문헌의 일문(逸文)에 대한 이해와 이용 문제가 있다. 『한원(翰苑)』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의 기사나 『삼국지』배송지주(裴松之注)에 인용된 『오서(吳書)』같이 현재는 전하지 않는 서적의 고구려 관계 기사는 정사류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정보이거나 보다 상세한 내용을 전한다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관련 문헌에 대한 이해 없이 사료 인용에 급급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 글은 고구려 관계 기사를 수록하고 있는 국외 문헌사료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 문헌의 편찬에 이용된 자료는 무엇이고, 거기에 기술된 고구려 관계 기사의 특징은 무엇인가에 주목하여 살필 것이다. 따라서 관련 사료를 이용한 연구 내용 자체는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아울러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복원 연구와 같이 최근 진행되고 있는 원전 자료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작업에 대해서도 가급적 언급해 두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