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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산악회자료집

5. 조사단의 입도를 막은 독도 폭격

Bombing of Dokdo that Kept the Scientific Expedition from Landing
“첫 번 독도에 간 날은 9월 22일이었다. 풍속 4m 롤링(Rolling) 7도의 파도를 헤치고 해군공사선박 진남호(35톤)를 탄 우리 일행은 독도가 가까이 다다르자 폭음과 더불어 높이 뜬 3대의 비행기를 볼 수 있었다. 우리 조사단의 조사일정을 미리 통고(通告)하여 양해가 된지라 우리 배는 태평하게 독도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도 폭격은 그치질 않았고 오히려 우리는 완전히 무시당한 채 우리의 생명이 위험하게 되어 부득이 우리의 영토 독도를 눈앞에 두고 상륙은커녕 도피하여 돌아와야 할 지경이었다.
… 두 번째는 24일. 그때는 첫 번째보다 더욱 파도가 심해 22도의 롤링(Rolling)이었다. 역시 폭격 통에 독도 상륙은 아주 단념하고 멀리 섬을 일주하면서 폭격하는 독도, 문제의 독도, 우리의 독도 주위의 사진만 찍고 돌아왔다. …”
 

출전 : 1952년 독도폭격사건 관련 내용 | 독도의 측량 부분 | 박병주 | 1954 | 국회도서관 소장
1952년 폭격 관련 기사 | 동아일보, 2면 | 1952. 9. 21.
- 신문 스크랩
“독도에 또 폭격소동. 불안과 공포에 싸인 도민들”
… 또다시 독도에서 사격사건이 발생하였다 한다. 즉 지난 9월 15일
오전 11시 경 울릉도 통조림 공장 소속선 광영호(光永號)를 탄 해녀(海女) 14명 외 선원(船員) 등 합 23명이 출어(出漁) 중에 있던 바, 틀림없이 미군 비행기라고 추측되는 비행기 1대가 나타나서 독도 주변을 선회하면서 4개의 폭탄을 던졌다 한다. 이에 따라 울릉도의 어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마음 놓고 출어를 못하는 상태에 있으며 지난 17일 부산을 출발한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단 일행도 행동을 제지당하고 있다 한다. 그러므로 울릉도 도민과 동도 조사단 일행은 동 폭격사건의 진상조사를 정부 당국과 군 당국에 의뢰하는 한편 앞으로 이와 같은 경고 없는 폭격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간절히 요망하고 있다.
 
1952년 폭격 관련 기사 | 동아일보, 2면 | 1952. 9. 22.
- 신문 스크랩
“폭격연습지 아님은 5공군도 확인하고 있다. 독도 무경고폭격에 상공장관 담”
지난 15일 발생한 독도폭격사건에 대하여 이(李) 상공부 장관은 21일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1948년 독도폭격사건으로 무고한 어민 다수가 희생되어 국민의 우울한 감정이 아직 사라지기도 전에 9월 15일 또다시 폭격사건이 발생하였다는 울릉도·독도 학술조사단의 보고에 접하여 경악하여 마지않는다.
독도가 폭격연습지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제5공군에 의하여 확인되고 있으며 정착성(定着性) 수산물의 풍산지로서 울릉도는 중요한 어장이다.
다행히 인적피해는 없었으나 여사한 사건이 금후 계속한다면 어민의 활동에 영향이 미치는바 지대할 것이며 생업 유지상 중대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으로 지급 관계 당국과 절충하여 그 신상을 규명하는 동시에 여차한 사건이 재기치 않도록 조치를 취하고자 하는 바이다. ”
 
1952년 폭격 관련 기사 | 동아일보, 2면 | 1952. 9. 26
- 신문 스크랩
“울릉도 又復(다시) 폭격 학술조사단이 보고”
1. 22일 드디어 독도행을 결행했던 본 조사단은 오전 11시경 독도까지 약 2킬로 접근하였으나 1시간 이상 계속되는 폭격 연습으로 상륙치 못하고 부득이 일단 울릉도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음.
2. 이날 천기는 극히 청명하여 비행기의 폭격 광경은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고 수종의 촬영기에도 완전히 수록할 수 있었음. 본 진남호 선상에서 비행기의폭격을 확인하기는 10시 15분부터인데 비행기는 암록색의 쌍발기로 우편 날개에 수개의 백색선과 날개 끝에 역시 백색의 표식을 그렸으나 확인키 어려웠음. 처음 발견했을 때는 3기 내지 4기로 약 1,000미의 고도에서 독도에 향하여 연속 폭격을 하면서 점차로 고도를 높여 내종에는 3,100미 이상의 고도에서 폭격하고 있었는데 그 때 본 진남호는 독도까지 약 2킬로 접근하였으나 이때의 폭격이 본선과는 딴 방향으로 독도에서 약 2킬로 되는 해상에 폭탄을 투하하는 것을 보고 더욱 위험을 느끼고 12시 40분 귀항하였는데 비행기는 계속 폭격하다가 미구에 본선과 같은 방향인 울릉도로 최종의 2대가 자체를 감추었음.
 
1952년 폭격 관련 기사 | 동아일보, 2면 | 1952. 9. 28.
- 신문 스크랩
“독도폭격 尙今(아직도) 계속. 학술조사단 제4차 보고”
독도학술조사단이 … 역시 폭격이 계속되고 있는 관계로 24일 오전 9시 30분 독도 1키로 지점까지 접근하였으나 상륙하지 못하고 다시 울릉도에 돌아왔다고 다음과 같은 학술조사단 제4신이 도착하였다.
1. 24일 재차의 독도 행을 결행한 본단이 24일 상오 9시 30분 경 독도동방 약 4킬로 지점에 접근하자 2대 내지 4대의 쌍발기가 약 3천미터 고도에서 여전히 폭격 연습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본선은 독도 1킬로까지 접근하여 섬을 일주하여 상륙할 기회를 엿보았으나 폭격기는 본선을 본체만체 섬 주변에 연속폭탄을 투하, 도저히 접근할 수 없음 …
2. 본선이 2시간 반에 걸쳐 섬을 일주하는 동안 약 10여 발의 투탄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대개는 섬 주변에서 폭발하였고 멍멍한 폭염과 소란한 폭음에 우리들 가슴 깊이 울려오는 것을 느끼었고 섬을 일주한 결과 동도와 서도는 폭격으로 인하여 많이 분모 되었으며 동도의 분화구의 일각은 완전히 파괴되었음을 확인하였다.
3. 해공군 각 참모장의 명의로 미 제5공군이나 유엔 함대기 등 모처럼 긴밀 연락과 교섭을 다 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를 보지 못하고 돌아가게 된 것은 유감천만이다. 그런데 독도를 우리의 발길 손길이 뻗어나갈 여지없이 버려두어야 할 것인가.
4. 진남호와 광영호는 각각 울릉도에 귀항 귀로에는 파랑이 상당히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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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사단의 입도를 막은 독도 폭격 자료번호 : iscac.d_0002_0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