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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에 온 서양인, 조선과 마주치다

  • 발행자
    동북아역사재단
  • 발행일
    2024년 3월 16일

1871년 신미년 6월 1일 미군 함대는 조선의 허가 없이 강화해협을 측량합니다. 이에 조선이 이들을 공격하며 교전이 일어나게 되죠.
미국은 기습 공격을 받은 것에 항의하고, 조선은 불법 진입에 대한 정당한 대처라 대응합니다. 6월 10일 미국의 보복을 시작으로, 7월 3일 퇴각까지 양측은 사상자를 포함한 교전을 치렀고, 조선은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 여깁니다.
사후 조치를 위해 조선은 청나라에 사람을 보냅니다. 청 황제가 대신 미국을 일깨워주고 더는 조선에 접근하지 말라고 명령 해 주기를 청한 것이죠.
청나라는 영국과의 아편전쟁 패배로 1842년 난징조약을 체결합니다. 2차 아편전쟁 때는 황제가 베이징을 버리고 다른 도시로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천조의 권위는 이미 서양에 통하지 않던 시대였죠. 조선의 이런 요청은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한 요구였던 셈입니다.
당시 조선이 베이징으로 보낸 사람 가운데 이응준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그 일행의 사진이 남아 전하는데요, 이는 베이징에서 체류 중이던 영국인 존 톰슨이 촬영했습니다.
이보다 조금 이른 1863년 사신단으로 베이징을 방문한 이항억 일행은 러시아 숙소를 찾아가 여러 장의 사진을 남깁니다. 이는 조선 최초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죠.
2차 아편전쟁 이후 개방된 베이징에는 다양한 서양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요, 베이징에서 조선인을 만난 서양인들은 이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나는 그들의 생김새가 유럽인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크게 놀라웠다.
한 털의 더러움도 없는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흰색이었다.
〈존 톰슨 『중국과 중국인 사진집 4권』〉
비슷한 시기 니콜라스 데니스는 조선인에 대한 단점으로 ‘지칠 줄 모르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고 평 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만난 조선인은 대개 사행단의 일행이거나 역관처럼 청을 자주 드나들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임무에는 국제 정세에 관한 정보수집이 포함되어 있었고, 개중에는 넓은 외부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이들도 있었죠.
오경석은 조선 말기 대표적 개항가였습니다. 그 또한 베이징을 드나들며 서양인과 만났고 사진을 남겼습니다. 이 사진 속에는 그가 만난 서양인의 이름이 남아있습니다. ‘매휘립’ 바로 영국인 메이어스입니다. 그는 1873년부터 베이징에서 영국 공사관의 중국어 서기관으로 일했습니다. 따라서 이듬해 청을 방문한 오경석과 만날 수 있었죠.
만남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거센 척화 분위기 가운데 조선인이 서양인을 만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죠. 하지만 오경석은 개항이라는 신념이 있었기에 비밀리에 메이어스를 만납니다.
서세동점의 전환기에 청을 방문한 조선인들은 국제 정세에 밝았습니다. 따라서 서양의 힘이 날로 커가는 현실에서 조선의 안이한 인식과 무기력한 대응을 목도하며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메이어스가 남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조선 백성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고통받게 될 것입니다. 당신들이 조선에 오겠다면 무력과 함께 조선에 머무르겠다는 결정을 해야 합니다.
오경석은 완고함 속에서 어떤 침략자도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동포들의 자신감을 한탄했습니다.
그는 유럽 열강이 군대를 동원해 조선 정부로 하여금 은둔 체제를 포기시켜 주기를 바란다는 기묘한 희망을 표명했습니다. -메이어스가 오경석의 발언을 정리한 보고서 내용 중
메이어스는 오경석의 견해를 ‘기묘한 희망이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조선이 은둔 체제를 포기하도록 유럽 열강이 무력을 동원하기를 바라는 조선인, 어찌 기이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시간이 흘러 1881년 말, 미국 전권대신 로버트 슈펠트는 조선 영선사 김윤식으로부터 조선이 조약 체결을 원한다는 사실을 정식으로 통보받습니다.
청은 조미 간의 조약에 ‘조선이 청의 속방’이라는 내용을 추가하라고 조선을 압박했죠. 슈펠트는 청과 조선의 특수한 관계를 인정해도, 미국이 주권국가와의 평등한 관계를 의미하는 조약을 속국과 체결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 여겨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에 슈펠트는 김홍집에게, 조약에 앞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보여줄 수 있는 국기 게양을 건의합니다. 이전까지 조선에는 국기라는 것이 없었죠. 국기의 사용은 조선이 근대 서양의 국제법 질서 속으로 편입됨을 의미하는 하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일본은 문을 열고 세계 속으로 들어온 나라,
조선은 봉쇄하고 의문에 쌓여 있는 나라”
윌리엄 E.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the Hermit Nation)』
조선인을 만난 적도 없는 윌리엄 그리피스는 조선을 은자의 나라, 은둔의 나라라고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조선인을 마주한 서양인들이 전한 이야기는 달랐죠.
지질학자 리히트호펜은 동북아 일대를 둘러보며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조선인에 대해, 조선인은 중국인과 일본인보다 호기심이 더 많아 보였으며 서양에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있음에도 외국의 지식을 배우려 했다고 합니다. 앞서 소개한 존 톰슨과 니콜라스 데니스 등도 마찬가지였죠.
“조선인은 교제에 있어 총명하고 활발하며,
탁 트이고 붙임성이 있었다.
중국인과 일본인보다 호기심이 더 많아 보였으며
새로운 물건을 보면 그 원리에 대해 질문을 했다.”
Fredinand Freiherr von Richthofen 『중국(China)』 제 2권
베이징에 온 서양인이 마주한, 닫힌 나라에서 온 조선인은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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