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성에 다녀온 일이 무리한 추진이었다는 의견
一. 11월 1일, 인사를 드리러 등성(登城)하셨다. [등성을 마치고] 로주님들과 동행하여 곧 사카이 빈고(酒井備後)주 040님 댁으로 가셨다. 그때 “이전 보초로(方長老)주 040
각주 040)

가 조선 왕성에 다녀온 일주 040은 귀하[소 요시나리]가 막부의 권위를 빌려 무리해서 추진했다고 부젠이 말했다. 이 일은 어떻게 된 것인가?”라는 물음에, 이전에 보초로가 조선에 건너갔을 때 [받아 온] 예 조 회답서한 및 시게오키가 이전에 작성해서 제출한 맹세서를 로주님들께 보여 드렸다. 그날 오이노카미님·이즈노카미님·분고노카미님·마치부교(町奉行)주 040 민부쇼유(民部少輔)님·시키부쇼유(式部少輔)님이 동석하셨고, 위의 회답서한은 교부쿄호인(刑部卿法印) 에이키(永喜)주 040님이 읽었다. 기하쿠 겐포(規伯玄方, 1588~1661). 일명 보초로(方長老). 규슈 하카타(博多) 무나가타(宗像)군 출신으로 출가한 시기 등은 알 수 없으나 쓰시마로 건너가 외교승으로 활약했던 동향(同鄕) 출신의 선승(禪僧) 게이테쓰 겐소의 제자가 되었다. 겐소는 쓰시마의 후추(府中)에 이테이안을 창설하였고, 1611년 10월 겐소가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겐소의 뒤를 이어 이테이안의 2대 주지가 되어 대조선 외교문서를 기초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1621년과 1629년에 조선에 건너와 교섭을 직접 수행하기도 했으며, 1629년에는 이례적으로 도읍 한성에 상경하기도 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사절이 한성 상경을 허가받은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야나가와 잇켄 때에 실무자로서 실책이 있었음이 인정되어 난부(南部)에 유배되었다가 1658년에 사면되어 에도로 돌아왔다.
- 각주 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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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쿠 겐포(規伯玄方, 1588~1661). 일명 보초로(方長老). 규슈 하카타(博多) 무나가타(宗像)군 출신으로 출가한 시기 등은 알 수 없으나 쓰시마로 건너가 외교승으로 활약했던 동향(同鄕) 출신의 선승(禪僧) 게이테쓰 겐소의 제자가 되었다. 겐소는 쓰시마의 후추(府中)에 이테이안을 창설하였고, 1611년 10월 겐소가 75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겐소의 뒤를 이어 이테이안의 2대 주지가 되어 대조선 외교문서를 기초하는 작업을 담당하였다. 1621년과 1629년에 조선에 건너와 교섭을 직접 수행하기도 했으며, 1629년에는 이례적으로 도읍 한성에 상경하기도 했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사절이 한성 상경을 허가받은 유일한 사례가 되었다. 야나가와 잇켄 때에 실무자로서 실책이 있었음이 인정되어 난부(南部)에 유배되었다가 1658년에 사면되어 에도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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