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자유적(東甸子遺蹟)
출토지
임강시 육도구향 동전자촌 (臨江市 六道溝鄉 東甸子村)
연대
원시시대 말기~고구려초기
조사내용
연도 | 조사기관 | 조사현황 |
1957 | 현지 농민인 李秀海가 3-5尺 깊이의 저장 구덩이를 파다가 토기 항아리 2개 채집함. 일찍이 성벽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함. | |
1958 | 농지를 경작하다가 돌도끼, 돌화살촉, 돌보습 등이 출토함. | |
1960 | 1960년 기록에서 유적의 동서 길이는 645m, 남북 너비 400m이고, 지표면에서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등을 쉽게 볼 수 있었으며, 당시 西面의 고분군과 유적지는 인접하여 이어져 있었으며, 압록강과 도로 중간의 좁고 긴 지대를 유적과 고분군이 점유하고 있었다고 함. | |
1984 | 혼강시문물보사대 (渾江市文物普査隊) | 6월에 유적의 현황을 파악했고, 거의 파괴되었다고 함. 『渾江市文物志』중의 ‘東甸子遺址’로 발표했으며, 유적 조사에 앞서 1984년 3월 8일에 渾江市 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됨. |
1987 |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혼강시문물관리위원회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渾江市文物管理委員會) | 5월에 石肖元, 張立夫, 張立新, 王洪峰이 참가하여 임강댐 수몰지구 조사차 고분군과 더불어 유적을 조사하였고, 『博物館硏究』1988-3에 발표함. |
구조특징
압록강에 인접한 2단 충적대지상에 분포하며 마을유적이기 때문에 정형화된 평면을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태임. 1950년대에 성벽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渾江市志』), 다른 자료에는 관련 언급이 없어서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움.
1984년 6월 渾江市 文物普査隊가 재조사할 때는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고, 원래 있던 100여 기의 고분군 역시 많이 파괴되어 몇 십 기만 남아 있었다고 하나, 1987년 조사에서는 유적의 전체적인 범위와 함께 石器類를 다수 채집했다고 함.
1957년에는 현지 농민이 저장 구덩이를 파다가 토기 항아리 2개 채집하였고, 1958년에는 농지를 경작하다가 석제 도끼, 석제 화살촉, 석제 보습 등 출토되었으며, 1960년대 기록에서는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등이 출토되었다고 나와있으며, 1987년 조사에서 석기류를 다수 채집함.
1984년 6월 渾江市 文物普査隊가 재조사할 때는 어떠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고, 원래 있던 100여 기의 고분군 역시 많이 파괴되어 몇 십 기만 남아 있었다고 하나, 1987년 조사에서는 유적의 전체적인 범위와 함께 石器類를 다수 채집했다고 함.
1957년에는 현지 농민이 저장 구덩이를 파다가 토기 항아리 2개 채집하였고, 1958년에는 농지를 경작하다가 석제 도끼, 석제 화살촉, 석제 보습 등 출토되었으며, 1960년대 기록에서는 토기편, 자기편, 어망추 등이 출토되었다고 나와있으며, 1987년 조사에서 석기류를 다수 채집함.
역사적 의미
고분군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유적과 인접하여 백여기 이상의 고분이 밀집해 있었지만, 1980년대에는 몇 십 기만 남아 있었다고 함. 그렇지만 지금도 동전자촌 서쪽 경작지와 마을 안쪽에서 수십기의 적석묘를 확인할 수 있으며, 마을 뒤쪽 산기슭에서는 거대한 적석묘가 여러 기 분포해 있음.
유적에서 압록강 하류를 따라 약 2㎞ 정도만 내려가면 樺皮甸子古城이 나오며, 상류를 거슬러 약 8㎞ 정도 가면 夾皮溝古城, 다시 20여㎞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東馬鹿泡子古城이 나옴.
유적에서 臨江-長白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모퉁이를 돌아가면 본래 언덕 위에 臨江 王八脖子窯址가 있었으나 현재는 도로 개설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음.
유적지 인근에 고구려시기의 고분군이 대량으로 분포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대체로 고구려 시기의 마을유적으로 추정되나, 유적지 안에서 주로 石器가 발견되고 있어 당시 거주민의 생산력 수준은 비교적 낮았던 것으로 파악되며, 고구려 건국 초기의 일반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됨. 1950년대에 성벽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渾江市志』), 다른 자료에는 관련 언급이 없어서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나, 실제 성벽이 존재했다면 단순한 마을유적이 아니라 압록강 수로와 연관된 古城일 가능성이 높음.
유적에서 압록강 하류를 따라 약 2㎞ 정도만 내려가면 樺皮甸子古城이 나오며, 상류를 거슬러 약 8㎞ 정도 가면 夾皮溝古城, 다시 20여㎞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東馬鹿泡子古城이 나옴.
유적에서 臨江-長白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모퉁이를 돌아가면 본래 언덕 위에 臨江 王八脖子窯址가 있었으나 현재는 도로 개설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음.
유적지 인근에 고구려시기의 고분군이 대량으로 분포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대체로 고구려 시기의 마을유적으로 추정되나, 유적지 안에서 주로 石器가 발견되고 있어 당시 거주민의 생산력 수준은 비교적 낮았던 것으로 파악되며, 고구려 건국 초기의 일반적인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됨. 1950년대에 성벽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渾江市志』), 다른 자료에는 관련 언급이 없어서 명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우나, 실제 성벽이 존재했다면 단순한 마을유적이 아니라 압록강 수로와 연관된 古城일 가능성이 높음.
자연환경
고분군은 臨江市 六道溝鄕 東甸子村 남쪽 200m 지점의 경작지에 위치함. 유적지에서 동쪽으로 4㎞ 거리에 六道溝鄕 소재지가 있고, 臨江-長白 도로가 충적대지 북쪽의 산기슭 아래로 통과하고 있으며, 압록강과 도로 사이의 충적대지에 유적지가 광범위하게 분포함.
동쪽에서 흘러들어온 압록강이 완만하게 서쪽으로 흘러나가면서 강의 북쪽에 길이 2㎞, 폭 200-300m 전후의 2단 충적대지를 형성했는데, 압록강에 인접하여 좁고 길다란 1단 충적대지가 있고, 그 북쪽으로 1단 대지보다 5m 정도 높은 2단 충적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음. 동전자 마을은 2단 충적대지의 북쪽 산기슭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지금은 臨江-長白 도로에 의해 마을이 두 개로 분리되어 있음. 유적지는 대지 서단의 2단 충적대지에 위치하여 있으며, 남쪽 50여m 거리에 압록강이 있음. 충적대지는 사면이 모두 경사가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하나의 자그마한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대지는 농지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음.
동쪽에서 흘러들어온 압록강이 완만하게 서쪽으로 흘러나가면서 강의 북쪽에 길이 2㎞, 폭 200-300m 전후의 2단 충적대지를 형성했는데, 압록강에 인접하여 좁고 길다란 1단 충적대지가 있고, 그 북쪽으로 1단 대지보다 5m 정도 높은 2단 충적대지가 넓게 펼쳐져 있음. 동전자 마을은 2단 충적대지의 북쪽 산기슭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지금은 臨江-長白 도로에 의해 마을이 두 개로 분리되어 있음. 유적지는 대지 서단의 2단 충적대지에 위치하여 있으며, 남쪽 50여m 거리에 압록강이 있음. 충적대지는 사면이 모두 경사가 가파른 산으로 둘러싸여 하나의 자그마한 분지를 이루고 있으며, 대지는 농지로 개간되어 경작되고 있음.
유물정보
토기 구연부 2점, 석제 도끼 2점, 석제 칼 3점, 어망추 1점
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渾江市文物志』, 1987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國家文物局 主編, 「東甸子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張天鵬, 「文物」『渾江市志』, 中華書局, 1994
· 王洪峰, 「臨江電站庫區古遺存調査綜述」『博物館研究』 1988-3, 1988
· 國家文物局 主編, 「東甸子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張天鵬, 「文物」『渾江市志』, 中華書局,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