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산성(龍首山城)
출토지
길림성 요원시 용수산(吉林省 遼源市 龍首山)
연대
4세기 전반 이후(여호규, 1999)
조사내용
연도 | 조사기관 | 조사현황 |
1950 | 1950년대에 용수산 정상부에서 산성을 발견하였음. | |
1983 | 1983년 서남모서리에서 연화문 와당이 발견됨. | |
1984 | 1984년 남쪽 연못 부근에서 홍갈색 귀문 암키와(홍갈색 귀문 대판와)가 발견되는 등 1980년대 이후 유물이 간헐적으로 발견됨. | |
1990 | 요원시문물관리소 (遼源市文物管理所) | 1990년을 전후하여 요원시 문물관리소에서 여러 차례 조사하였는데, 1990년 7월 성안 남북 골짜기 연못에서 토기편이 대량 출토됨. |
구조특징
성벽은 용수산의 자연 산세를 따라 다진 흙으로 쌓았음. 대략 타원형임(불규칙한 타원형과 장방형의 중간 정도; 여호규). 산성은 동북·동남·서북 세 모서리의 지세가 비교적 높은 반면, 서측의 중부와 서남 모서리는 낮음. 성 내부는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음(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음; 요원시문물관리소). 성내의 높낮이는 일정하지 않지만 하나의 분곡(盆谷)과 같음. 현재 서쪽 성벽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음. 윗너비 1.5m, 기초 너비 7m, 잔고 약 2m. 서벽의 단면에서는 지금도 당시 흙을 다져 판축한 성벽 층위를 선명하게 볼 수 있음. 매 층의 다진 두께는 약 10-13㎝임. 흙으로 쌓은 산성의 서북쪽 모서리와 서남쪽 모서리에는 당시의 각루 흔적이 남아있는데, 흙벽 좌우로 튀어나와 있는 반원형의 고대(高臺)의 기초가 남아있음. 직경 6-7m임. 성문은 북문과 서문, 2개의 문지(門址)가 있음. 성내에 고구려 및 발해 시대의 유물이 대량으로 산포해 있음.
산성은 동·남·서 3면의 지세는 개활하며, 북면은 산줄기로 이어져 있음. 북쪽을 제외한 삼면의 경사가 모두 가파름. 특히 동쪽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이며, 남쪽도 높이 20m 이상의 절벽임.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서쪽도 끝부분은 급경사면임. 성벽은 용수산의 자연 산세를 따라 다진 흙으로 쌓았음. 북벽은 동북 모서리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하였음. 안팎의 경사가 모두 급함. 나머지 세 성벽은 절벽과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세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가파르지만 안쪽은 비교적 평탄함. 동북·동남·서북 세 모서리의 지세가 비교적 높은 반면, 서측의 중부와 서남 모서리는 낮음. 대체로 동벽이 높고 서벽이 낮은 산비탈에 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서벽에서 동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며, 내부에는 평지도 협소한 편임. 서벽 부근의 남북 양단에 위치한 골짜기와 연못을 중심으로 약간의 평지가 형성되어 있음. 서벽의 보존상태가 양호함. 기단부의 너비 7m, 윗 너비 1.5m, 잔고 2m임. 서벽의 축성 상태를 보면 모래흙과 진흙을 번갈아가면서 층층이 다져 판축하였음. 서문 북측의 성벽 단면에는 황갈색 사질토를 8-9㎝ 두께 흑회색 니질(泥質)토를 3㎝ 두께로 번갈아가면서 층층이 판축한 층위가 선명하게 노출되어 있음. 남벽 서단의 성벽 높이 10m이며, 황갈색 사질토와 흑회색 니질토를 5㎝ 두께로 번갈아가면서 판축한 층위를 확인할 수 있음. 성벽을 불에 구워 단단하게 한 부분도 확인됨. 북벽의 서측 성벽도 비교적 잘 남아있음. 동벽 중단도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함. 기단부의 너비 3m, 윗너비 1m, 잔고 1m 전후임. 동벽의 남북 양끝 및 북벽의 동단은 심하게 파괴되어 성벽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듦. 산성 전체가 공원으로 개발, 조성, 이용되는 과정에서 많이 파괴되었으며, 특히 북벽 부근에 각종 시설이 들어서서 성벽이 많이 훼손되었음.
산성은 동·남·서 3면의 지세는 개활하며, 북면은 산줄기로 이어져 있음. 북쪽을 제외한 삼면의 경사가 모두 가파름. 특히 동쪽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이며, 남쪽도 높이 20m 이상의 절벽임.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서쪽도 끝부분은 급경사면임. 성벽은 용수산의 자연 산세를 따라 다진 흙으로 쌓았음. 북벽은 동북 모서리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하였음. 안팎의 경사가 모두 급함. 나머지 세 성벽은 절벽과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자리잡고 있으며 세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가파르지만 안쪽은 비교적 평탄함. 동북·동남·서북 세 모서리의 지세가 비교적 높은 반면, 서측의 중부와 서남 모서리는 낮음. 대체로 동벽이 높고 서벽이 낮은 산비탈에 성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서벽에서 동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며, 내부에는 평지도 협소한 편임. 서벽 부근의 남북 양단에 위치한 골짜기와 연못을 중심으로 약간의 평지가 형성되어 있음. 서벽의 보존상태가 양호함. 기단부의 너비 7m, 윗 너비 1.5m, 잔고 2m임. 서벽의 축성 상태를 보면 모래흙과 진흙을 번갈아가면서 층층이 다져 판축하였음. 서문 북측의 성벽 단면에는 황갈색 사질토를 8-9㎝ 두께 흑회색 니질(泥質)토를 3㎝ 두께로 번갈아가면서 층층이 판축한 층위가 선명하게 노출되어 있음. 남벽 서단의 성벽 높이 10m이며, 황갈색 사질토와 흑회색 니질토를 5㎝ 두께로 번갈아가면서 판축한 층위를 확인할 수 있음. 성벽을 불에 구워 단단하게 한 부분도 확인됨. 북벽의 서측 성벽도 비교적 잘 남아있음. 동벽 중단도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함. 기단부의 너비 3m, 윗너비 1m, 잔고 1m 전후임. 동벽의 남북 양끝 및 북벽의 동단은 심하게 파괴되어 성벽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듦. 산성 전체가 공원으로 개발, 조성, 이용되는 과정에서 많이 파괴되었으며, 특히 북벽 부근에 각종 시설이 들어서서 성벽이 많이 훼손되었음.
역사적 의미
군사방어 및 지방거점성설이 있음. 요원지역은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휘발하 일대를 거쳐 요하상류방면으로 나아갈 때 거쳐야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임. 고구려는 4세기 전반경 길림 방면의 부여지역을 둘러싸고 전연과 여러 차례 각축전을 벌였음. 고구려는 늦어도 4세기 전반 길림 지역의 부여를 병합하던 시기에는 요원지역으로 진출하였다고 추정됨. 그러므로 용수산성은 고구려가 이 지역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하였을 4세기 전반 이후에 축조되었다고 추정됨. 지형조건과 교통로로 보아 북쪽의 이통하, 서북쪽의 동요하(東遼河) 하류, 서남쪽의 구하(寇河) 등의 방면에서 요원지역을 거쳐 휘발하 일대로 나아가려는 적군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하였다고 추정됨. 이러한 점에서 용수산성 동북쪽 1.5㎞ 지점의 성자산산성은 주로 북쪽인 이통하 방면, 용수산성은 북쪽의 동요하 하류방면이나 서남쪽의 구하 방면에서 침공하는 적군을 방어하는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동남쪽의 공농산성은 위치상 배후산성으로 여겨짐. 한편, 용수산성에서는 성자산산성·공농산성에 비해 유물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특히 성 내부의 계단상의 대지에서 기와가 대량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중요한 건물이 자리잡고 있었다고 추정됨. 용수산성은 요하일대의 지방거점성으로서 성 내부에는 군사시설 뿐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관청 등이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용수산성은 군사방어성인 동시에 지방지배를 위한 치소의 역할까지 담당하였을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연대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음.
고구려 시기, 특히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한 뒤 축조하였을 것임. 용수산성은 토축산성으로 토축성벽 방식은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한 뒤부터 출현했음(이전복, 1994). 용수산성 출토 토기의 특징을 고려할 때 대체로 고구려 후기에 축조되어 발해 초기까지 계속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됨(요원시문물관리소, 1994).
4세기 전반 이후에 축조함(여호규, 1999).
연대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있음.
고구려 시기, 특히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한 뒤 축조하였을 것임. 용수산성은 토축산성으로 토축성벽 방식은 고구려가 요동을 점거한 뒤부터 출현했음(이전복, 1994). 용수산성 출토 토기의 특징을 고려할 때 대체로 고구려 후기에 축조되어 발해 초기까지 계속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됨(요원시문물관리소, 1994).
4세기 전반 이후에 축조함(여호규, 1999).
자연환경
길림성 중남부의 요원시 시내 동쪽의 용수산 위에 위치함. 용수산성 동남쪽으로 동요하(東遼河)·위진하(渭津河)가 합류하는 지점 건너편 2㎞에 공농산성(工農山城)이 위치함. 용수산성은 동북쪽으로 성자산산성(城子山山城)과 1.5㎞ 떨어져 있음. 용수산성의 남쪽 2㎞ 거리에 여명산(黎明山)이 있고, 서쪽으로는 요원시 시내와 이어져 있음.
용수산은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이 북에서 남으로 쭉 뻗어나가 동요하안(東遼河岸)에 이르러 머리를 들고 멈춰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음. 용수산은 현재 용산공원이며, 시가지 확장으로 인해 동남방면을 제외한 사방이 시가지에 둘러싸여 있음. 용수산성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의 남단에 위치. 산줄기로 이어지는 북쪽을 제외한 동·남·서 3면은 평탄한 개활지로서 전체적으로 요원분지를 향해 돌출한 지형을 이루고 있음. 산성 남쪽으로 동요하가 남단의 절벽과 150m 거리를 두고 서쪽으로 흐르고(西流) 있고,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흐르던(西北流) 위진하,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흐르던(東北流) 이수하(梨樹河)가 동요하에 유입됨. 동요하는 요원시 동계의 이통하(伊通河)· 동요하 분수령에서 발원함.
용수산은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이 북에서 남으로 쭉 뻗어나가 동요하안(東遼河岸)에 이르러 머리를 들고 멈춰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음. 용수산은 현재 용산공원이며, 시가지 확장으로 인해 동남방면을 제외한 사방이 시가지에 둘러싸여 있음. 용수산성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의 남단에 위치. 산줄기로 이어지는 북쪽을 제외한 동·남·서 3면은 평탄한 개활지로서 전체적으로 요원분지를 향해 돌출한 지형을 이루고 있음. 산성 남쪽으로 동요하가 남단의 절벽과 150m 거리를 두고 서쪽으로 흐르고(西流) 있고, 동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흐르던(西北流) 위진하,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흐르던(東北流) 이수하(梨樹河)가 동요하에 유입됨. 동요하는 요원시 동계의 이통하(伊通河)· 동요하 분수령에서 발원함.
유물정보
홍갈색승문암키와(板瓦) 1점, 민무늬수키와(筒瓦) 1점, 명문기와(刻劃文字符號瓦片) 15점, 연화문와당(蓮花紋瓦當) 6점, 회색토기편(灰色陶片) 1점, 황갈색토기편(黃褐色陶片) 1점, 흑회색니질토기편(黑灰色泥質土器片) 1점, 접시(鎜) 1점, 소반(陶盤) 2점, 외반구연부편(敞口口沿陶片) 1점, 동이구연부편(盆口沿片) 2점, 광구장경호구연부편(廣口長頸壺口沿片) 1점, 호구연부편(陶口沿片) 17점, 사질토기편(砂質陶片) 1점, 토제솥다리(鼎足) 1점, 옹(陶瓮) 1점, 동이(陶盆) 4점, 잔(陶杯) 1점, 호(陶罐) 11점, 파수(把手) 2점, 시루저부편(陶甑底殘片) 2점, 구연부편(口沿片) 1점, 저부(底片) 2점, 시유도기(鼓腹釉陶器) 1점, 방추차(陶紡輪) 1점, 철촉(鐵鏃) 6점, 철도(鏃刀) 1점, 미상철기편(未詳鐵器片) 1점, 보습(鐵鏵) 1점, 철제식품(鐵製裝飾品) 2점, 말 이빨 1점, 돌절구(石臼) 4점, 석제건축장식품(石製建築裝飾品) 1점
동제팔찌(銅鐲) 1점, 철도(鐵刀) 1점, 철촉(鐵鏃) 9점, 철제허리띠고리(鐵帶扣) 1점, 철모(鐵矛) 1점, 철제끌(鐵鑿) 1점, 철제고리(鐵環) 1점, 철기파편(鐵器殘件) 2점(박물관연구2000-2)
동제팔찌(銅鐲) 1점, 철도(鐵刀) 1점, 철촉(鐵鏃) 9점, 철제허리띠고리(鐵帶扣) 1점, 철모(鐵矛) 1점, 철제끌(鐵鑿) 1점, 철제고리(鐵環) 1점, 철기파편(鐵器殘件) 2점(박물관연구2000-2)
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修委員會, 『遼源市文物志』, 1988
· 細谷良夫, 『中國東北部における淸朝の史跡』, 東北大學, 1991
· 唐洪源, 「吉林遼源市龍首山城內考古調査簡報」『考古』 1994-3, 1994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합이빈출판사, 1994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唐洪源, 「吉林遼源市龍首山遺址的調查」『考古』 1997-2,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唐洪源, 「遼源龍首山再次考古調査與淸理」『博物館研究』 2000-2, 2000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馮永謙, 「高句麗千里長城建置辨」『社會科學戰線』 2002-1, 2002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千里長城調查要報」『東北史地』 2010-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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