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농산성; 공농산고성(工農山城; 工農山古城)
출토지
길림성 요원시 용산구 공농향(吉林省 遼源市 龍山區 工農鄕)
조사내용
연도 | 조사기관 | 조사현황 |
1958 | 요원시문물관리소 (遼源市文物管理所) | 1958년 이래 요원시 문물관리소에서 여러 차례 조사하였음. |
구조특징
성은 요원분지를 향해 동남에서 서북으로 돌출한 산줄기에 위치하였음. 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은 동북 모서리로 해발 384.25m임. 공농산성의 지세는 험준하며, 북벽과 북쪽의 큰 언덕과의 사이에 깊은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음. 공농산성은 대략 타원형임.
성벽은 산세를 따라 황갈색 사질토와 흑갈색의 니질(泥質)토로 축조하였음. 성벽은 황갈색 사질토와 흑갈색 니질토를 번갈아 층층이 다져쌓는 판축기법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음. 서벽 중간 구간의 단면은 다져쌓은 층위가 선명하며, 두께는 균일하지 않음. 황갈색 흙의 두께는 약 12㎝, 흑갈색의 흙 두께는 약 10㎝ 정도임. 서벽은 다른 성벽에 비해 약간 높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임. 서벽 단면은 사다리꼴이며, 높이 약 5m, 윗너비 약 2m, 바닥 너비 8m임. 북벽 동쪽 구간은 서쪽 구간에 비해 약 1m 정도 더 긺. 동벽과 남벽 양 성벽의 지세는 가파른 산세를 이용해 축조하였음. 성벽은 현재 높이 약 1m임. 서북 모서리의 지세는 비교적 높으며 서에서 동쪽으로 비탈이 형성되어 있음.
성벽은 산세를 따라 황갈색 사질토와 흑갈색의 니질(泥質)토로 축조하였음. 성벽은 황갈색 사질토와 흑갈색 니질토를 번갈아 층층이 다져쌓는 판축기법을 이용하여 성벽을 쌓았음. 서벽 중간 구간의 단면은 다져쌓은 층위가 선명하며, 두께는 균일하지 않음. 황갈색 흙의 두께는 약 12㎝, 흑갈색의 흙 두께는 약 10㎝ 정도임. 서벽은 다른 성벽에 비해 약간 높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임. 서벽 단면은 사다리꼴이며, 높이 약 5m, 윗너비 약 2m, 바닥 너비 8m임. 북벽 동쪽 구간은 서쪽 구간에 비해 약 1m 정도 더 긺. 동벽과 남벽 양 성벽의 지세는 가파른 산세를 이용해 축조하였음. 성벽은 현재 높이 약 1m임. 서북 모서리의 지세는 비교적 높으며 서에서 동쪽으로 비탈이 형성되어 있음.
역사적 의미
용수산성의 방어용 전연성보(前沿城堡)설이 있음. 공농산성의 위치로 보아, 서북부에 동요하(東遼河)를 사이에 두고 용수산성과 근접해 있으며 북면으로는 성자산산성과 멀리 서로 마주보고 있음. 축조 연대는 성자산산성과 근사한데, 두 성의 성벽이 모두 천연의 산의 형태를 이용해 산등성이를 따라 토축하였음. 두 성은 모두 제고점이 있어 요망 초소의 기능을 하였음. 요망대에 서면 주위의 하천 상황을 한 눈에 감시할 수 있음. 공농산성은 남쪽으로 위사하, 북쪽으로 동요하에 잇닿아 있어 천연의 해자를 형성함. 공농산성은 용수산성 동남쪽에 위치하여 용수산성을 방어하는 전연(前沿) 성보 역할을 하였음. 공농산성과 성자산산성의 위치로 보아 두 성은 용수산성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를 공제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됨. 규모 및 성내 출토 유물로 보아 산성의 축조연대는 고구려 시기에 해당하며, 후에 발해와 요금 시대에도 계속 사용하였을 것임(왕우랑·왕굉북, 1994).
요원 용수산성의 외곽 위성설이 있음. 산성의 입지조건이나 축성방식 등이 주변에 위치한 용수산성, 성자산산성 등과 대체로 유사함. 공농산성은 고구려 시기에 축조되어 요금 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것으로 파악됨. 공농산성을 요원 동남쪽에서 용수산성 방면으로 진공하려는 적군을 방어하는 전연성보로 파악하기도 함. 그렇지만 요원 지역 전체의 입지조건으로 보아 요원지역의 고구려 산성은 동북쪽의 이통하 방면, 서북쪽의 동요하 하류방면, 서남쪽의 구하(寇河) 방면에서 침공해 들어오는 적군을 저지하기 위해 축조되었다고 파악됨 따라서 공농산성은 용수산성 동남쪽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서북쪽의 동요하·위진하(渭津河)를 천연해자로 삼아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용수산성의 배후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가능성이 높음. 용수산성과 공농산성이 서로 마주보는 지척거리에 위치한 만큼 유사시에는 상호 긴밀한 연락체계를 유지하면서 군사방어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임(여호규, 1999).
요원 용수산성의 외곽 위성설이 있음. 산성의 입지조건이나 축성방식 등이 주변에 위치한 용수산성, 성자산산성 등과 대체로 유사함. 공농산성은 고구려 시기에 축조되어 요금 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것으로 파악됨. 공농산성을 요원 동남쪽에서 용수산성 방면으로 진공하려는 적군을 방어하는 전연성보로 파악하기도 함. 그렇지만 요원 지역 전체의 입지조건으로 보아 요원지역의 고구려 산성은 동북쪽의 이통하 방면, 서북쪽의 동요하 하류방면, 서남쪽의 구하(寇河) 방면에서 침공해 들어오는 적군을 저지하기 위해 축조되었다고 파악됨 따라서 공농산성은 용수산성 동남쪽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서북쪽의 동요하·위진하(渭津河)를 천연해자로 삼아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용수산성의 배후산성으로 기능하였을 가능성이 높음. 용수산성과 공농산성이 서로 마주보는 지척거리에 위치한 만큼 유사시에는 상호 긴밀한 연락체계를 유지하면서 군사방어기능을 수행하였을 것임(여호규, 1999).
자연환경
요원 공농산성은 요원시 용산구 공농향 소재지 동북쪽 1.5㎞ 거리의 공농산 정상부에 위치함. 서북쪽으로 약 3.5㎞ 거리에 요원시 중심가가 있으며, 동쪽 1㎞ 거리에 장마자구(張麻子溝) 골짜기가, 남쪽 2.5㎞ 거리에 위당구(葦塘溝) 골짜기가 있음. 요원시 중심가에서 용산대가(龍山大街)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동요하(東遼河)를 건넌 다음, 다시 복진로를 따라 동남쪽으로 가다가 공농향(工農鄕) 소재지 부근에서 동북쪽으로 방향을 꺾어 위진하(葦津河)를 건너면 공농산이 나옴.
정북으로 동요하를 사이에 두고 용수산성 및 성자산산성과 마주보고 있으며 산성의 남쪽 산 아래에 위진하가 서류하다가 서남쪽에서 유로(流路)를 서북으로 꺾은 다음 동북쪽에서 동요하와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감. 공농산성은 전체적으로 삼면이 하천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산줄기로 이어지는 돌출지형을 이루고 있는 천혜의 요새지임.
정북으로 동요하를 사이에 두고 용수산성 및 성자산산성과 마주보고 있으며 산성의 남쪽 산 아래에 위진하가 서류하다가 서남쪽에서 유로(流路)를 서북으로 꺾은 다음 동북쪽에서 동요하와 합류하여 서쪽으로 흘러감. 공농산성은 전체적으로 삼면이 하천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산줄기로 이어지는 돌출지형을 이루고 있는 천혜의 요새지임.
유물정보
모래혼입토기손잡이(沙質陶器把手) 1점, 대상파수(帶狀把手) 1점, 모래혼입토기평저부(沙質陶器底片) 1점, 홍갈색세발달린솥(紅褐色鼎) 1점, 토기잔편(陶器殘片) 1점, 회색토기구연부(灰色陶器口片) 1점, 니질선문회색토기편(泥質線紋灰色陶器片) 1점, 압인문토기(押引文土器) 1점, 압인문회색토기편(押引文灰色土器片) 1점, 돌절구(石臼) 1점, 니질회색토기잔편(泥質灰色陶器片) 1점
참고문헌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합이빈출판사,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馮永謙, 「高句麗千里長城建置辨」『社會科學戰線』 2002-1, 2002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千里長城調查要報」『東北史地』 2010-3, 2010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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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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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千里長城調查要報」『東北史地』 2010-3, 2010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