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구 ‘노변장’관애(灣溝 ‘老邊墻’關隘)
출토지
집안시 양수향 해관촌 (集安市 凉水鄉 海關村)
연대
고구려 초중기(3세기 중엽-4세기 중엽)
조사내용
연도 | 조사기관 | 조사현황 |
1983 | 집안현문물관리소 (集安縣文物管理所) | 전체 현황을 조사함. |
1983 | 집안현문물조사대 (集安縣文物調査隊) | 4월에 성곽의 전반적인 제원 및 간략한 지표조사를 함. |
구조특징
230˚방향으로 계곡 동안에서 시작하여 충적대지상에 수평으로 40여m를 쌓은 뒤 다시 산기슭을 따라 산중턱 가파른 수직 암벽까지 130여m를 축조했고, 河床의 붕괴로 인해 서단 20여m가 유실되었으므로 본래 성벽의 전체 길이는 200m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됨. 계곡 건너편 서안에도 성벽의 일부로 추정되는 돌무지가 남아 있고, 관애 남쪽 70여m 지점에도 보조 관애로 추정되는 석축 흔적이 남아 있음.
河床에 인접한 상벽은 거의 대부분 유실되었지만, 河床 동측과 산기슭 상의 성벽은 많이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석벽 자체는 잘 남아 있는 상태이고, 관애 남쪽 70여m 지점의 석축 흔적도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상태임.
河床에 인접한 상벽은 거의 대부분 유실되었지만, 河床 동측과 산기슭 상의 성벽은 많이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석벽 자체는 잘 남아 있는 상태이고, 관애 남쪽 70여m 지점의 석축 흔적도 허물어지기는 했지만 비교적 잘 남아 있는 상태임.
역사적 의미
주변 유적으로 서쪽 13㎞ 거리에 칠개정자관애가 있고, 본래 남쪽 300m 거리에 고구려 고분군(적석묘)이 있었지만, 1983년 조사시에는 적석묘와 방단적석묘 등 3기만 남아 있었으며, 지금은 하류쪽의 댐으로 인해 압록강에 수몰되거나 경작에 위해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함.
지정학적으로 老邊墻關隘는 집안시 소재지에서 서남으로 55㎞ 떨어진 양수향 해관촌 북쪽 만구 골짜기에 위치해 있으며, 남쪽 4㎞에 압록강이 있음. 1931년에 간행된 『集安縣志』에 따르면, 상류 쪽에서 순조롭게 흐르던 압록강은 太平鄕 江口村에서부터 楡林河와 凉水泉子河 河口까지는 양안에 험준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고, 물살이 거세지며, 물결도 크게 일기 시작하고, 강물이 협곡 사이를 좌충우돌하면서 굽이쳐 흐르기 때문에 심한 소용돌이, 급한 물굽이, 암초 등을 만들며, 要孩子哨, 媽媽哨, 方車子哨, 老虎哨, 關門砬子 등으로 불리는 험준한 요해처가 생겨났음. 그리고 강물을 따라 수십리를 빙돌더라도 실제로는 1리 정도밖에 나아가지 못하게 됨. 그리하여 압록강 수운을 이용할 경우 운항 도중에 많은 위험이 따르게 됨. 그러다가 유림하와 양수천자하 하구부터 하류 쪽으로 강의 수면이 점차 넓어지고 강물의 흐름도 완만해지게 됨. 그리하여 예로부터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들은 대부분 外岔溝河나 凉水泉子河 일대에 정박한 다음, 육로를 이용하여 집안현성(집안시) 조재지로 나아갔다고 함. 그리하여 20세기 전반 外岔溝村 일대는 압록강 수로 교통과 집안지역 육로 교통의 結節點으로서 지금의 집안시 소재지보다 더 번성했다고 함. 특히 1888년 봄 外岔溝河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가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노령산맥에 老斧嶺 고갯길을 새로이 개설하여 외차구하 일대와 노령산맥 남쪽 사이뿐 아니라 노령산맥 북쪽 지역 일대와의 교통도 원활하도록 했음. 다만 1940년대 수풍댐이 건설된 다음 압록강 수로교통이 쇠퇴하면서 외차구촌 일대도 점차 쇠퇴하게 됨. 노변장관애의 기능과 성격은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서 파악할 필요가 있음.
관애의 기능과 성격을 보면, 첫째, 압록강 수상 교통로를 통제하던 도성 외곽의 군사시설로, 만구노변장관애의 축성법은 망파령관애, 관마산성 등과 비슷하며, 특히 성벽 위에 진흙을 덮어 통로로 활용한 것은 망파령관애와 유사한데, 남쪽에 적석묘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의 군사시설로 추정됨. 21세기 전반 外岔溝 일대가 압록강 수상 교통과 육상 교통의 결절점이었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에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됨. 이에 일반적으로 만구노변장관애가 서남쪽 13㎞ 거리에 위치한 칠개정자관애와 더불어 압록강 수상 교통로와 상륙로를 봉쇄하던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됨. 다만 관애가 위치한 만구 골짜기 자체가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외형은 골짜기를 가로지른 관애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벽 안쪽의 골짜기를 군사시설로 활용하던 군사방어성의 성격을 띠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음. 둘째, 342년 남도상의 방어시설로, 342년 전연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등장하는 남도와 북도가 신빈 영릉진에서 갈라진다고 설정한 다음, 남도를 이도하를 거쳐 혼강 지류인 육도하와 혼강 본류를 따라 내려와 혼강구를 지나 압록강 본류를 거슬러 집안으로 향하는 노선으로 설정한 다음, 노변장관애를 이 남도상의 중요한 방어시설을 구성했다고 파악하기도 함(王線厚).
지정학적으로 老邊墻關隘는 집안시 소재지에서 서남으로 55㎞ 떨어진 양수향 해관촌 북쪽 만구 골짜기에 위치해 있으며, 남쪽 4㎞에 압록강이 있음. 1931년에 간행된 『集安縣志』에 따르면, 상류 쪽에서 순조롭게 흐르던 압록강은 太平鄕 江口村에서부터 楡林河와 凉水泉子河 河口까지는 양안에 험준한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고, 물살이 거세지며, 물결도 크게 일기 시작하고, 강물이 협곡 사이를 좌충우돌하면서 굽이쳐 흐르기 때문에 심한 소용돌이, 급한 물굽이, 암초 등을 만들며, 要孩子哨, 媽媽哨, 方車子哨, 老虎哨, 關門砬子 등으로 불리는 험준한 요해처가 생겨났음. 그리고 강물을 따라 수십리를 빙돌더라도 실제로는 1리 정도밖에 나아가지 못하게 됨. 그리하여 압록강 수운을 이용할 경우 운항 도중에 많은 위험이 따르게 됨. 그러다가 유림하와 양수천자하 하구부터 하류 쪽으로 강의 수면이 점차 넓어지고 강물의 흐름도 완만해지게 됨. 그리하여 예로부터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들은 대부분 外岔溝河나 凉水泉子河 일대에 정박한 다음, 육로를 이용하여 집안현성(집안시) 조재지로 나아갔다고 함. 그리하여 20세기 전반 外岔溝村 일대는 압록강 수로 교통과 집안지역 육로 교통의 結節點으로서 지금의 집안시 소재지보다 더 번성했다고 함. 특히 1888년 봄 外岔溝河에 주둔하던 청나라 군대가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노령산맥에 老斧嶺 고갯길을 새로이 개설하여 외차구하 일대와 노령산맥 남쪽 사이뿐 아니라 노령산맥 북쪽 지역 일대와의 교통도 원활하도록 했음. 다만 1940년대 수풍댐이 건설된 다음 압록강 수로교통이 쇠퇴하면서 외차구촌 일대도 점차 쇠퇴하게 됨. 노변장관애의 기능과 성격은 바로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서 파악할 필요가 있음.
관애의 기능과 성격을 보면, 첫째, 압록강 수상 교통로를 통제하던 도성 외곽의 군사시설로, 만구노변장관애의 축성법은 망파령관애, 관마산성 등과 비슷하며, 특히 성벽 위에 진흙을 덮어 통로로 활용한 것은 망파령관애와 유사한데, 남쪽에 적석묘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의 군사시설로 추정됨. 21세기 전반 外岔溝 일대가 압록강 수상 교통과 육상 교통의 결절점이었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에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됨. 이에 일반적으로 만구노변장관애가 서남쪽 13㎞ 거리에 위치한 칠개정자관애와 더불어 압록강 수상 교통로와 상륙로를 봉쇄하던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됨. 다만 관애가 위치한 만구 골짜기 자체가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외형은 골짜기를 가로지른 관애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제로는 성벽 안쪽의 골짜기를 군사시설로 활용하던 군사방어성의 성격을 띠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음. 둘째, 342년 남도상의 방어시설로, 342년 전연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등장하는 남도와 북도가 신빈 영릉진에서 갈라진다고 설정한 다음, 남도를 이도하를 거쳐 혼강 지류인 육도하와 혼강 본류를 따라 내려와 혼강구를 지나 압록강 본류를 거슬러 집안으로 향하는 노선으로 설정한 다음, 노변장관애를 이 남도상의 중요한 방어시설을 구성했다고 파악하기도 함(王線厚).
자연환경
집안현성(길림성 집안시)에서 서남쪽 55㎞ 떨어진 양수향 해관촌 북쪽 通天嶺 동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남쪽 4㎞ 거리에 압록강이 있으며, 동쪽 2㎞ 거리에 집안-환인 도로가 양수향 소재지를 통과하며, 남쪽 300m 거리에 海關 8隊가 있음.
만구 골짜기는 길이 3㎞ 정도로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데, 양안은 가파른 절벽이다. 서쪽 산기슭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골짜기를 관통하여 해관촌 부근에서 凉水泉子河에 유입되어 남류하다가 압록강으로 유입됨. 관애는 만구촌 북쪽 200m 되는 지점에서 만구 골짜기를 가로질러 동서 방향으로 뻗어 축조했음. 관애 안쪽에는 서쪽과 북쪽이 깎아지른 단애로 이루어진 평탄한 대지가 있는데 성벽은 바로 이 대지의 동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동북쪽 산중턱에서 서남쪽 계곡에 이르는 구간에 축조했음. 안쪽 대지는 병사 주둔지 등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만구 골짜기는 길이 3㎞ 정도로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데, 양안은 가파른 절벽이다. 서쪽 산기슭에서 발원한 시냇물이 골짜기를 관통하여 해관촌 부근에서 凉水泉子河에 유입되어 남류하다가 압록강으로 유입됨. 관애는 만구촌 북쪽 200m 되는 지점에서 만구 골짜기를 가로질러 동서 방향으로 뻗어 축조했음. 관애 안쪽에는 서쪽과 북쪽이 깎아지른 단애로 이루어진 평탄한 대지가 있는데 성벽은 바로 이 대지의 동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동북쪽 산중턱에서 서남쪽 계곡에 이르는 구간에 축조했음. 안쪽 대지는 병사 주둔지 등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方起東·劉景文, 「吉林省近十年考古工作的主要收穫」『博物館研究』 1990-1, 1990
· 國家文物局 主編, 「集安市-“老邊墻”關隘遺址」『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辛勇旻, 「中國內 高句麗遺蹟의 현황과 과제(Ⅱ)」『湖巖美術館硏究論文集』 2, 湖巖美術館, 1997
· 余昊奎, 「集安 灣溝老邊墻關隘」『高句麗 城』 Ⅰ(鴨綠江 中上流篇), 國防軍史硏究所, 1998
· 王綿厚, 「高句麗南北二道上諸城」『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杜宇 編著, 「老斧嶺山路變遷」『集安風景名勝史話』, 通化師範學院照排印刷中心,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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