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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吉林省 集安市 太王鎮)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66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관소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管所)
통구고분군에 대한 실측조사 때, 1호배장묘로 편재되었고, 간단히 JYM0002로 기록함.
1977집안시문물보관소
(集安市文物保管所)
장군총과 배장묘에 대한 상세한 실측과 2호 배장묘 주변을 정리함.
구조특징
장군총과 비교해 볼 때, 석실계단적석총이라는 점은 같으나, 규모는 비교적 작고, 큰 호묘석이 없으며, 상부는 石硼墓와 비슷함.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됨.
장군총과 마찬가지로 1호 배장묘 하부에도 기단을 쌓았는데 가공된 화강암 장대석을 이용해서 쌓았음. 기단 아래는 두께 약 0.8m의 강자갈로 기초를 쌓음. 기초 평면은 정방형에 가깝고 한변의 길이는 약 10m 정도임. 1997년 실측시 무덤의 북쪽이 남쪽에 비해 46m 높다고 판단함. 기단 바깥에는 직경 0.8~1.5m의 큰 강돌로 그 주위를 평평하게 깔았는데, 너비는 2m 정도로 무덤의 기초를 보호하는 작용을 함.
무덤의 남측 정중앙 기초 자갈돌 위에 회록색 판석 2개가 있음. 판석에는 세로방향의 얕은 홈을 여러 줄 새겼는데, 이는 장군총 및 서대묘·천추묘·태왕릉 계단 상에 발견되는 입석판과 같은 의미를 가진 것임. 계단에서 안으로 0.8m 쯤 되며 그 위에 두 개의 계단이 있으며, 계단은 장대석으로 만듬. 제1단 계단은 변의 길이가 9.22m, 높이 2.2~2.4m이고, 장대석을 6층으로 쌓음. 현재는 동북측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있고, 나머지 3면은 1~4층만이 남아 있음. 상층의 장대석은 이미 많이 결실됨. 제2단 계단은 제1단 계단에서 4면 모두 0.4m 안으로 들어가서 축조됨. 동북측은 현재 3층이 남았고, 돌의 높이는 1m임. 1단의 가장 높은 지점과 천정석의 가장 낮은 면 사이에는 장대석 1층이나 2층 정도의 차이가 있음. 지금은 이미 파손됨. 계단석 안은 자갈로 채웠고, 아울러 백회가 섞여 있음. 장대석의 가장자리를 볼록하게 돌출시켜 층층마다 서로 맞추어 쌓음.
묘실은 바깥으로 이미 드러나 있음. 묘실은 1단 계단의 5층 장대석 위에 축조했고 평면은 장방형임. 묘실 바닥과 묘실 하부의 동·서·북 삼면은 석회암과 頁巖으로 축조했고, 상부는 높이 1.2m의 가지런한 화강암으로 축조함. 그 내측은 평평하며, 외측은 자연형태를 유지함. 묘문은 방향이 235˚로, 장군총과 같은 방향이고, 너비는 1.24m, 높이는 1.6m임. 묘문석은 묘문 좌측에서 일부 남아있는 돌로 확인 가능함. 천정석은 길이 5.5m, 너비 4.6m, 두께 0.4~1m가 되는 큰 돌로 형태는 규칙적이지 않으나, 안쪽 면은 약간 평평하고, 4면은 묘벽보다 밖으로 나옴. 천정석 아래의 가장자리에는 방수를 위해서 안으로 0.4m 들어가고 너비 0.6m의 오목한 홈이 한바퀴 둘러져 있음. 묘실 내에서 어떠한 葬具와 유물이 발견되지 않음.
무덤의 동남모서리에서 약 35m 떨어진 지점에서 한 개의 돌로 축조한 지하배수로(涵洞)가 발견됨. 방향을 볼 때, 묘 아래에서 동남방향으로 흐르는 배수시설임.
1997년 묘 주위의 충적토 정리 중에 와당, 철제 끌, 철제 칼(刀), 鐵鉗, 鞍形器, 편자 및 시유도기, 암키와, 수키와의 잔편 등이 발견됨. 철기는 모두 묘의 동남측 충적토 주에서 출토되었으며, 연대는 비교적 늦음. 기와는 모두 模制로, 무늬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며, 승문이 박힌 것이 일부 있고, 안에는 가는 포문이 찍혀 있음. 火候는 높고, 회색이 대부분이며, 일부 홍갈색이 있음. 수막새은 모두 팔판연화문와당으로 3점이고, 장군총과 같으며, 크기에 따라 2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큰 것은 직경이 21㎝이고, 작은 것은 직경이 16m임. 수키와의 일부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매우 두꺼운 백회가 발라져 있는 기와도 있음. 끝암키와는 14건이 출토됨.
내부규모 및 특징
묘실 길이 2.5m, 너비 1.22m, 높이 1.6m
역사적 의미
장군총 북측의 배장묘는 고구려왕릉매장제도의 구현이며, 옛날부터 지금까지 가족, 종족, 왕족의 장례제도에서 항상 보이는 현상임. 1호 배장묘의 규모는 비교적 작으나 장군총과 같은데, 혈연으로 매우 가깝고 직위가 매우 높은 사람으로 추정됨. 2호 배장묘는 1호 배장묘에 비해 작지만 주변에 상징성의 호묘석이 있는데, 이런 종류의 시설은 신분과 지전적인 의미로 구축된다고 설명됨. 장군총의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배장묘는 모두 고구려 초기의 묘제로 중시함.
제대는 장군총의 기타무덤보다 이름. 제대가 묘장과 같은 배열에 있는 것은 장군총의 특징 중의 하나임. 고구려 초기 왕릉에서는 배장묘가 있고, 제대는 없었다고 추정함. 발전 과정 중의 제대는 배장묘의 구분과 쉽지 않음. 우산하 992호묘 축조시기에 이르러서 제대는 진정하게 성숙했으며, 태왕릉에서 제대는 규모가 매우 크고, 오직 제대만이 나온다는 점에서 명확한 특징을 가지고 있음. 그런데 장군총에서 다시 배장묘와 제대가 같이 나오는데, 이러한 복고 현상은 연구할 가치가 있음.
최근 제대를 연접된 적석무덤으로 파악하고, 일제하 통구 보고서에 4-5기의 배총이 있었다는 보고와 관련하여 해석함.
자연환경
장군총 서북모서리에서 43m 연장선상에 위치함.
유물정보
철제 끌(鑿) 3점, 철제 못 1점, 철제 도자(刀子) 1점, 철제 鞍形器 1점, 철제 편자 2점, 철제 鉗 1점, 철제 조각 1점, 황유시유도기 1점, 수막새 3점, 끝암키와 14점, 명문기와 5점, 부호기와 4점, 평기와 1점
참고문헌
· 關野貞 外, 『朝鮮古蹟圖譜』, 1915
· 池內宏·梅原未治, 『通溝』 下: 満洲国通化省輯安県高句麗壁畫墳, 日滿文化協會, 1940
· 藤田亮策, 「通溝附近の古墳と高句麗の墓制」『朝鮮考古學硏究』 (再收錄), 高桐書院, 1948
· 蘇才, 「集安高句麗遺跡調査簡記」『吉林省文物工作通訊』, 1957
· 傅佳欣, 『集安高句麗王陵』, 文物出版社, 2004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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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1호 배장묘(集安 1號 陪葬墓) 자료번호 : ku.d_0001_0040_0030_1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