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하 1041호묘(禹山下 1041號墓)
출토지
통구중부 태왕진 우산촌(通溝中部 太王鎭 禹山村)
조사내용
연도 | 조사기관 | 조사현황 |
1966 | 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관소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管所) | 통구묘군에 대한 실측조사때, 우산하 1041호묘로 편호. |
1974 | 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 | 方起東, 林至德, 高至武에 의해 문화대혁명 기간 중, 太王公社 사원이 붕괴된 고구려 적석묘에서 벽화를 발견. 길림성박물관과 집안현문물보관소가 사람을 파견해 조사하고, 붕괴된 묘문 보호조치. 1974년 9월에는 정리 진행. |
구조특징
方壇階梯石室壁畵墓
방단계제석실벽화묘
외형의 파괴가 너무 심하여, 봉분의 원래형태를 판별하기는 쉽지 않음. 묘 기단은 서변과 남변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기단을 쌓았던 1층 석조만 겨우 남아 있음. 동변에서 북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는 아직 기단을 쌓았던 석재들이 남아 있음. 남아 있는 기단과 분구를 덮은 자갈의 정황을 볼 때, 원래는 방형 기단을 갖추고 있었다고 추정. 기단의 석조는 정밀한 가공을 거쳐, 형태는 정연하고, 바깥측면에는 수직으로 끌질한 흔적이 있으며, 윗면의 바깥가장자리를 돌아가며 돌기가 돌출되어 있음. 기단 중간에 자갈이 쌓여 있음. 분구 상부의 자갈은 비교적 큰데, 50×50×30㎝ 이상임. 원래는 묘 꼭대기를 덮었던 것으로 추정. 현재 중앙부분에 묘실의 개정석이 노출되어 있지만, 주위의 자갈이 쌓인 높이를 참고해 볼 때, 분구의 자갈은 원래 묘실의 꼭대기부분도 덮고 있었다고 추정됨. 네 변의 기단 위로는 계단이 축조되어 있었다고 추정.
정리할 때, 묘실은 잔 숯으로 가득 쌓여 있었는데, 두께는 약 60㎝ 정도임. 그 위에 석판을 세워 벽을 만듦. 벽면의 회가 벗겨진 곳에서 벽면에 수직으로 내려가면서 가공한 흔적이 평행을 이루고 있음. 묘실 남벽은 수직이고, 동벽과 북벽은 안으로 기울어져 있음. 동북모서리 아랫부분 석재에 생긴 틈에는 돌로 메웠음. 각 벽의 상방 내측에는 모두 홈을 파서, 천정석 아랫부분의 볼록 튀어 나온 부분과 맞추어 끼워 넣었음. 천정석은 판면 면적이 약 10㎡이고, 두께는 50㎝ 정도임. 묘실을 올려다보면, 개정석의 네 변은 평탄하게 다듬었고, 가운데부분은 약간 안으로 굽어 융기되어 있음. 천정석 앞쪽(서변)에는 상면을 따라 간단한 물길을 만들었고, 하면에는 홈을 파내면서, 직각의 처마를 형성. 처마바깥하부 남북양측에는 횡렬의 가는 홈을 파냈는데, 그 간격너비는 5㎝를 넘지 않음. 이렇게 천정석 아래에 좁은 홈을 새기는 방법은 장군묘의 배장묘에서 보이는 방법인데, 윗면에서 흐르는 물이 개정석 처마를 따라 묘실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 묘실바닥에는 세 개의 석판이 횡방향으로 깔려 있음. 묘실바닥에 깔린 세 개의 석판 위로 장방형의 관대가 놓여 있음. 관대는 석판 통째를 다듬어서 가지런하나, 아랫면은 가공을 하지 않았고, 틈새를 작은 자갈로 채워 넣어 관대를 받침. 길이는 2.8m, 너비는 1.24m, 두께는 0.1~0.18m, 전체 높이는 0.2~0.3m 임.
묘실 서쪽방면에는 벽이 없고, 바로 묘도가 묘실 밖으로 나 있음. 묘도 바닥은 묘실바닥보다 75㎝ 높은데, 평평한 커다란 석재를 가지런하게 겹쳐 깔았음. 너비는 묘실과 비슷함. 안쪽 끝은 약간 뻗쳐져서 묘도로 들어감. 묘도의 좌우 양벽은 파괴가 매우 심한데, 약간 다듬은 석재를 이용해서 쌓았고, 그 사이간의 거리(즉 묘도의 너비)는 묘실보다 약간 좁음. 묘도 바닥 윗면에 쌓여있는 석재는 묘실의 안쪽 끝 가장자리로 뻗어 들어가고, 각각 한 줄의 홈이 있으며, 천정석의 바깥 처마의 가늘게 파인 홈과 서로 마주하며 약간 밖으로 기울어져 있음. 용도는 알 수 없으나, 혹 묘도바닥에 고인 물이 직접 묘실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막는 일종의 시설물일 수도 있음. 묘실 서부 입구 근처에는 적지 않은 대강 가공한 석재와 많은 란석·황사·석회가 뒤섞인 三合土가 쌓여 있었음. 당초에 석벽을 쌓아 묘실의 흔적을 덮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
벽화에 관해서는 우선 묘실 내의 벽·꼭대기부분·관대, 묘도 바닥의 큰 돌 내측에 이르기까지, 0.5㎝ 두께의 백회가 발라져 있는데, 현재는 묘실꼭대기부분은 아예 없는 등, 대부분 박락. 벽면에 일부 남아 있는 백회표면과 바닥에 떨어진 백회껍질에서 벽화를 볼 수 있음. 바로 백회 위에 벽화를 그림. 묘실 내의 벽화는 대부분 박락됨. 다만 일부 朱砂로 起稿한 듯한 흔적이 남아 있음.
묘실 서쪽방면에는 벽이 없고, 바로 묘도가 묘실 밖으로 나 있음.
묘도 바닥은 묘실바닥보다 75㎝ 높은데, 평평한 커다란 석재를 가지런하게 겹쳐 깔았음. 너비는 묘실과 비슷함. 안쪽 끝은 약간 뻗쳐져서 묘도로 들어가고, 길이는 1.6m 임. 묘도의 좌우 양벽은 파괴가 매우 심한데, 약간 다듬은 석재를 이용해서 쌓았고, 그 사이간의 거리(즉 묘도의 너비)는 묘실보다 약간 좁음. 묘도 바닥 윗면에 쌓여있는 석재는 묘실의 안쪽 끝 가장자리로 뻗어 들어가고, 각각 한 줄의 홈이 있으며, 천정석의 바깥 처마의 가늘게 파인 홈과 서로 마주하며 약간 밖으로 기울어져 있음. 용도는 알 수 없으나, 혹 묘도바닥에 고인 물이 직접 묘실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막는 일종의 시설물일 수도 있음. 묘실 서부 입구 근처에는 적지 않은 대강 가공한 석재와 많은 란석·황사·석회가 뒤섞인 三合土가 쌓여 있었음. 당초에 석벽을 쌓아 묘실의 흔적을 덮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 동벽(묘도에서 보았을 때 바로 정면에 보이는 벽)에 있는 대들보 아래에는 청회색 가옥이 있고, 우변에는 아직 빨간선으로 윤곽을 그린 斜脊이 있음. 四坡頂으로 추정됨. 처마 아래에는 황색 장막이 늘어져 있음. 장막 아래 가운데부분에서 남쪽으로 치우진 곳에 한 남자가 있음. 황색에 붉은 점이 합해진 衽花衣를 입었고, 홍색으로 테두리를 둘렀으며, 남측을 향해 약간 돌아서 있음. 두 눈은 가늘며 길고, 코는 직절하며, 콧수염은 약간 휘었고, 입술은 선홍색을 띠며, 얼굴은 두텁한데, 당연히 묘주인으로 추정됨. 형상을 윤곽한 묵선은 꼼꼼하면서도 힘차고, 眉目부분의 운필은 가늘며, 면부에는 색을 덧칠해서 갈무리를 함. 동벽전체는 묘주인이 집에서 연회를 베푸는 모습을 그린 것임.
북벽에 있는 대들보 아래에는 정면에서 바라본 연화문이 그려져 있음. 8송이가 배열되어 있는데, 안에서 밖으로 홍색과 녹색을 번갈아가며 그림. 안쪽 변 6송이의 중심에는 구멍이 파여 있음. 그 아래 가운데 부분 안쪽으로 치우친 곳에 사슴의 후반신이 있음. 사슴의 뒷부분 아래쪽으로는 사람이 한명 있는데, 몸은 약간 앞으로 기울어져 있고, 고깔과 같은 절풍을 쓰고 있는 듯하며, 오렌지색 바지를 입고 있고, 자홍색의 장화를 신고 있음. 다시 안쪽으로 가서 기둥에 바짝 다가선 지점에 사람 한 명이 있는데, 네모난 幘을 쓰고 있고, 合衽衣를 입었으며, 허리띠를 매었음. 전체적으로 수렵도 계통으로 파악할 수 있음. 이 외에 북벽에는 ‘팔을 펴고 손가락을 펴는 듯한’ 나뭇가지가 엇갈려 있고, 벽면에 披針形의 녹색낙엽들이 자질구레하게 있음.
남벽은 박락이 심하여 거의 남아 있지 않음. 다만 중앙에서 바깥 아래에 어렴풋하게 사람 1명을 볼 수 있는데, 황색 合衽衣를 입었음. 벽면 상방, 북벽에 보이는 연화문과 대응하는 부분에는 6개의 작은 구멍이 있는데, 원래는 연화문이 그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 관대에도 백회가 발라져 있고, 얼룩덜룩한 자홍색도 남아 있는데, 어떠한 문양인지는 알 수 없음.
개정석부분은 벽화의 유무를 알 수가 없음.
묘실의 안쪽을 향하고 있는 묘도에 세워진 2개의 석재에는 백회가 발라져 있고, 얼룩덜룩한 자홍색도 남아 있는데, 어떠한 문양인지는 알 수 없음.
묘장은 일찍이 도굴을 당함. 남아 있던 인골과 유물은 대부분 묘실 앞부분에 쌓여 있던 삼합토 중에서 출토됨. 묘도 가운데와 묘실 내에 쌓인 숯의 상층에서도 발견되었으나, 하부에서는 발견되지 않음. 출토유물은 대부분 기구의 부속품에 속함. 전체적으로 개갑 및 마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함. 이 외에 황색시유도기편과 관곽의 부속품 등도 적지 않게 출토.
방단계제석실벽화묘
외형의 파괴가 너무 심하여, 봉분의 원래형태를 판별하기는 쉽지 않음. 묘 기단은 서변과 남변에서 서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기단을 쌓았던 1층 석조만 겨우 남아 있음. 동변에서 북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는 아직 기단을 쌓았던 석재들이 남아 있음. 남아 있는 기단과 분구를 덮은 자갈의 정황을 볼 때, 원래는 방형 기단을 갖추고 있었다고 추정. 기단의 석조는 정밀한 가공을 거쳐, 형태는 정연하고, 바깥측면에는 수직으로 끌질한 흔적이 있으며, 윗면의 바깥가장자리를 돌아가며 돌기가 돌출되어 있음. 기단 중간에 자갈이 쌓여 있음. 분구 상부의 자갈은 비교적 큰데, 50×50×30㎝ 이상임. 원래는 묘 꼭대기를 덮었던 것으로 추정. 현재 중앙부분에 묘실의 개정석이 노출되어 있지만, 주위의 자갈이 쌓인 높이를 참고해 볼 때, 분구의 자갈은 원래 묘실의 꼭대기부분도 덮고 있었다고 추정됨. 네 변의 기단 위로는 계단이 축조되어 있었다고 추정.
정리할 때, 묘실은 잔 숯으로 가득 쌓여 있었는데, 두께는 약 60㎝ 정도임. 그 위에 석판을 세워 벽을 만듦. 벽면의 회가 벗겨진 곳에서 벽면에 수직으로 내려가면서 가공한 흔적이 평행을 이루고 있음. 묘실 남벽은 수직이고, 동벽과 북벽은 안으로 기울어져 있음. 동북모서리 아랫부분 석재에 생긴 틈에는 돌로 메웠음. 각 벽의 상방 내측에는 모두 홈을 파서, 천정석 아랫부분의 볼록 튀어 나온 부분과 맞추어 끼워 넣었음. 천정석은 판면 면적이 약 10㎡이고, 두께는 50㎝ 정도임. 묘실을 올려다보면, 개정석의 네 변은 평탄하게 다듬었고, 가운데부분은 약간 안으로 굽어 융기되어 있음. 천정석 앞쪽(서변)에는 상면을 따라 간단한 물길을 만들었고, 하면에는 홈을 파내면서, 직각의 처마를 형성. 처마바깥하부 남북양측에는 횡렬의 가는 홈을 파냈는데, 그 간격너비는 5㎝를 넘지 않음. 이렇게 천정석 아래에 좁은 홈을 새기는 방법은 장군묘의 배장묘에서 보이는 방법인데, 윗면에서 흐르는 물이 개정석 처마를 따라 묘실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 묘실바닥에는 세 개의 석판이 횡방향으로 깔려 있음. 묘실바닥에 깔린 세 개의 석판 위로 장방형의 관대가 놓여 있음. 관대는 석판 통째를 다듬어서 가지런하나, 아랫면은 가공을 하지 않았고, 틈새를 작은 자갈로 채워 넣어 관대를 받침. 길이는 2.8m, 너비는 1.24m, 두께는 0.1~0.18m, 전체 높이는 0.2~0.3m 임.
묘실 서쪽방면에는 벽이 없고, 바로 묘도가 묘실 밖으로 나 있음. 묘도 바닥은 묘실바닥보다 75㎝ 높은데, 평평한 커다란 석재를 가지런하게 겹쳐 깔았음. 너비는 묘실과 비슷함. 안쪽 끝은 약간 뻗쳐져서 묘도로 들어감. 묘도의 좌우 양벽은 파괴가 매우 심한데, 약간 다듬은 석재를 이용해서 쌓았고, 그 사이간의 거리(즉 묘도의 너비)는 묘실보다 약간 좁음. 묘도 바닥 윗면에 쌓여있는 석재는 묘실의 안쪽 끝 가장자리로 뻗어 들어가고, 각각 한 줄의 홈이 있으며, 천정석의 바깥 처마의 가늘게 파인 홈과 서로 마주하며 약간 밖으로 기울어져 있음. 용도는 알 수 없으나, 혹 묘도바닥에 고인 물이 직접 묘실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막는 일종의 시설물일 수도 있음. 묘실 서부 입구 근처에는 적지 않은 대강 가공한 석재와 많은 란석·황사·석회가 뒤섞인 三合土가 쌓여 있었음. 당초에 석벽을 쌓아 묘실의 흔적을 덮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
벽화에 관해서는 우선 묘실 내의 벽·꼭대기부분·관대, 묘도 바닥의 큰 돌 내측에 이르기까지, 0.5㎝ 두께의 백회가 발라져 있는데, 현재는 묘실꼭대기부분은 아예 없는 등, 대부분 박락. 벽면에 일부 남아 있는 백회표면과 바닥에 떨어진 백회껍질에서 벽화를 볼 수 있음. 바로 백회 위에 벽화를 그림. 묘실 내의 벽화는 대부분 박락됨. 다만 일부 朱砂로 起稿한 듯한 흔적이 남아 있음.
묘실 서쪽방면에는 벽이 없고, 바로 묘도가 묘실 밖으로 나 있음.
묘도 바닥은 묘실바닥보다 75㎝ 높은데, 평평한 커다란 석재를 가지런하게 겹쳐 깔았음. 너비는 묘실과 비슷함. 안쪽 끝은 약간 뻗쳐져서 묘도로 들어가고, 길이는 1.6m 임. 묘도의 좌우 양벽은 파괴가 매우 심한데, 약간 다듬은 석재를 이용해서 쌓았고, 그 사이간의 거리(즉 묘도의 너비)는 묘실보다 약간 좁음. 묘도 바닥 윗면에 쌓여있는 석재는 묘실의 안쪽 끝 가장자리로 뻗어 들어가고, 각각 한 줄의 홈이 있으며, 천정석의 바깥 처마의 가늘게 파인 홈과 서로 마주하며 약간 밖으로 기울어져 있음. 용도는 알 수 없으나, 혹 묘도바닥에 고인 물이 직접 묘실로 흘러들어 가는 것을 막는 일종의 시설물일 수도 있음. 묘실 서부 입구 근처에는 적지 않은 대강 가공한 석재와 많은 란석·황사·석회가 뒤섞인 三合土가 쌓여 있었음. 당초에 석벽을 쌓아 묘실의 흔적을 덮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 동벽(묘도에서 보았을 때 바로 정면에 보이는 벽)에 있는 대들보 아래에는 청회색 가옥이 있고, 우변에는 아직 빨간선으로 윤곽을 그린 斜脊이 있음. 四坡頂으로 추정됨. 처마 아래에는 황색 장막이 늘어져 있음. 장막 아래 가운데부분에서 남쪽으로 치우진 곳에 한 남자가 있음. 황색에 붉은 점이 합해진 衽花衣를 입었고, 홍색으로 테두리를 둘렀으며, 남측을 향해 약간 돌아서 있음. 두 눈은 가늘며 길고, 코는 직절하며, 콧수염은 약간 휘었고, 입술은 선홍색을 띠며, 얼굴은 두텁한데, 당연히 묘주인으로 추정됨. 형상을 윤곽한 묵선은 꼼꼼하면서도 힘차고, 眉目부분의 운필은 가늘며, 면부에는 색을 덧칠해서 갈무리를 함. 동벽전체는 묘주인이 집에서 연회를 베푸는 모습을 그린 것임.
북벽에 있는 대들보 아래에는 정면에서 바라본 연화문이 그려져 있음. 8송이가 배열되어 있는데, 안에서 밖으로 홍색과 녹색을 번갈아가며 그림. 안쪽 변 6송이의 중심에는 구멍이 파여 있음. 그 아래 가운데 부분 안쪽으로 치우친 곳에 사슴의 후반신이 있음. 사슴의 뒷부분 아래쪽으로는 사람이 한명 있는데, 몸은 약간 앞으로 기울어져 있고, 고깔과 같은 절풍을 쓰고 있는 듯하며, 오렌지색 바지를 입고 있고, 자홍색의 장화를 신고 있음. 다시 안쪽으로 가서 기둥에 바짝 다가선 지점에 사람 한 명이 있는데, 네모난 幘을 쓰고 있고, 合衽衣를 입었으며, 허리띠를 매었음. 전체적으로 수렵도 계통으로 파악할 수 있음. 이 외에 북벽에는 ‘팔을 펴고 손가락을 펴는 듯한’ 나뭇가지가 엇갈려 있고, 벽면에 披針形의 녹색낙엽들이 자질구레하게 있음.
남벽은 박락이 심하여 거의 남아 있지 않음. 다만 중앙에서 바깥 아래에 어렴풋하게 사람 1명을 볼 수 있는데, 황색 合衽衣를 입었음. 벽면 상방, 북벽에 보이는 연화문과 대응하는 부분에는 6개의 작은 구멍이 있는데, 원래는 연화문이 그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 관대에도 백회가 발라져 있고, 얼룩덜룩한 자홍색도 남아 있는데, 어떠한 문양인지는 알 수 없음.
개정석부분은 벽화의 유무를 알 수가 없음.
묘실의 안쪽을 향하고 있는 묘도에 세워진 2개의 석재에는 백회가 발라져 있고, 얼룩덜룩한 자홍색도 남아 있는데, 어떠한 문양인지는 알 수 없음.
묘장은 일찍이 도굴을 당함. 남아 있던 인골과 유물은 대부분 묘실 앞부분에 쌓여 있던 삼합토 중에서 출토됨. 묘도 가운데와 묘실 내에 쌓인 숯의 상층에서도 발견되었으나, 하부에서는 발견되지 않음. 출토유물은 대부분 기구의 부속품에 속함. 전체적으로 개갑 및 마구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함. 이 외에 황색시유도기편과 관곽의 부속품 등도 적지 않게 출토.
내부규모 및 특징
1977년 보고서에서 한변 길이 약 20m, 높이 약 2.15m
1984년 보고서에서 한변 길이 약 20m.
997년(2002년 보고서)에 한변 길이 24m, 너비 21m, 높이 3m.
묘실은 거대한 화강암 판석을 이용해서 축조하여 기단의 중앙에 위치함. 평면은 장방형으로, 동서 길이 3.15m, 남북 너비 2.0m, 높이 2.32m. 방향은 245°(2008년 보고서에는 남서쪽 65°)로, 기단과 평행. 묘실 바닥은 지표보다 약간 낮고, 기단의 바닥부와 수평한 높이에 위치하는데, 당초 묘실의 바닥은 지면과 가지런하였다고 추정됨. 묘실의 동․남․북 세벽 아래에는 각각 석조 1개가 깔아져서 묘바닥이 20~25㎝ 높아짐.
묘도 길이 1.6m.
1984년 보고서에서 한변 길이 약 20m.
997년(2002년 보고서)에 한변 길이 24m, 너비 21m, 높이 3m.
묘실은 거대한 화강암 판석을 이용해서 축조하여 기단의 중앙에 위치함. 평면은 장방형으로, 동서 길이 3.15m, 남북 너비 2.0m, 높이 2.32m. 방향은 245°(2008년 보고서에는 남서쪽 65°)로, 기단과 평행. 묘실 바닥은 지표보다 약간 낮고, 기단의 바닥부와 수평한 높이에 위치하는데, 당초 묘실의 바닥은 지면과 가지런하였다고 추정됨. 묘실의 동․남․북 세벽 아래에는 각각 석조 1개가 깔아져서 묘바닥이 20~25㎝ 높아짐.
묘도 길이 1.6m.
역사적 의미
길림성박물관문물공작대(1977)에서 연구한 바, 우산하 1041호묘 묘실의 평면구조, 장벽 아래에 있는 기초석, 물이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꼭대기 돌 바깥처마에 파여 있는 가느다란 홈 등은 장군총의 배장묘와 유사. 다만 구조에 있어서 정교함이 더욱 더해졌고 묘실 바닥부는 지표보다 높지 않음(고구려 전·중기묘의 석실 혹은 묘광의 대부분은 지표보다 높고, 중기 이후의 석실 대부분은 지표와 같음). 일반적으로 장군총의 배장묘 축조연대를 대체로 장군묘와 동시기 혹은 약간 늦은 시기로 추정하므로, 축조연대를 5세기 초엽으로 추정. 구조형태를 볼 때, 우산하 1041호묘의 축조연대는 대략 배장묘보다 이르지 않음. 묘장의 벽화배치, 도안과 풍격 등을 고찰해 볼 때, 통구 12호묘와 마선구 1호묘와 거의 같음. 묘장에서 출토된 유물을 보면, 마선구 1호묘에서 출토된 유물과 대부분 서로 비슷함. 그러므로 우산하 1041호묘의 축조연대는 5세기 중엽으로 파악됨. 우산하 1041호묘가 축조된 5세기 중엽의 고구려묘장에서는 아직 돌을 쌓아 봉분을 조성하는 전통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어(내부구조에는 변화가 있었음), 상당히 농후한 보수성이 반영되어 있는 반면에, 고분벽화는 오히려 유행을 따르고 있음. 이러한 모순 같은 현상은, 신구의 사물교체과정 중의 필연적인 산물임. 역사상 사회경제기초의 변화에 따라 나온 새로운 의식형태이고, 결국 전쟁에서 이김과 아울러 일체의 지난 의식 형태를 대체한 것으로, 새로운 매장관습이 생겨남과 아울러 나날이 광범위하게 유행되어 질 때 잔존하던 옛 매장제도는 그 영향으로 깨끗이 씻겨지는 것임. 결국 점차적으로 양적·질적변화의 근본적인 개조가 이루어짐. 우산하 1041호묘에는 이러한 과정의 자취가 선명하게 반영되어 있음. 과거 일부 학자들은 통구지역의 고구려묘에 대해 “土(벽화묘 모두 여기에 있음)石異時”라고 인식하고, 고구려를 적석묘시기와 봉토묘시기 두 단계로 나누었음. 하지만 우산하 1041호묘의 정리를 통해, 위의 설명이 실제로는 완전히 부합하지 않은 정황을 명확하게 설명해줌. 만약 객관적 사물의 변증발전과정을 존중하지 않고, 간단하고 기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방법을 채택한다면, 억지로 번잡하게 서로 얽혀있는 변증발전 긴 흐름에 어떤 절대적 한계선을 긋는 것이며, 또한 억지로 고구려매장제도의 전체적인 변화를 이른바 “석분시대”와 “토분시대”라는 단순히 시간상으로 잘라 구분하는 것이 됨. 그렇게 되면 모두 단지 잘못된 길에만 들어서게 되어 과학적인 연구에 혼란을 주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음.
魏存成(1994년)은 사이전연호와 마구의 특징으로 볼 때, 5세기대로 추정.
方起東·劉萱堂(2002년)은 벽화내용의 배치가 통구12호묘와 거의 유사하고, 출토된 철제목심등자가 朝陽 袁臺子墓에서 출토된 등자와 유사하므로, 축조시기는 4세기 중엽~말엽으로 추정.
魏存成(1994년)은 사이전연호와 마구의 특징으로 볼 때, 5세기대로 추정.
方起東·劉萱堂(2002년)은 벽화내용의 배치가 통구12호묘와 거의 유사하고, 출토된 철제목심등자가 朝陽 袁臺子墓에서 출토된 등자와 유사하므로, 축조시기는 4세기 중엽~말엽으로 추정.
자연환경
통구분지 중부 태왕진 우산촌 1조 촌락 중에 위치. 우산묘구 중부에 위치. 우산 남쪽기슭 전방의 완만한 가장자리에 위치. 지면의 경사도는 약 6°임.
남쪽으로는 큰 도로(우산 남쪽기슭에서 果樹廠村에 이르는 길)가 있고, 도로 건너서는 평탄한 농경지임.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지점에 태왕릉이 있음. 동변 바로 옆에는 작은 시내가 있음. 북쪽으로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른 시기에 파괴된 3~4기의 적석묘와 작은 봉토석실묘를 제외하고, 다른 묘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음.
남쪽으로는 큰 도로(우산 남쪽기슭에서 果樹廠村에 이르는 길)가 있고, 도로 건너서는 평탄한 농경지임.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지점에 태왕릉이 있음. 동변 바로 옆에는 작은 시내가 있음. 북쪽으로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이른 시기에 파괴된 3~4기의 적석묘와 작은 봉토석실묘를 제외하고, 다른 묘장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음.
유물정보
金銅製 帶具 1개 외 金銅製 10점
銅製 葉 8편
銀製 八棱柱 장식 1개 외 銀製 1점
鐵製 鞍裝 1개, 鐵製 鐙子 1쌍, 철제 鞍板 장식 1점 외 鐵器類 202점
부뚜막 1개 외 사이전연호 3점
麻布 잔편, 漆皮 잔편, 人骨
銅製 葉 8편
銀製 八棱柱 장식 1개 외 銀製 1점
鐵製 鞍裝 1개, 鐵製 鐙子 1쌍, 철제 鞍板 장식 1점 외 鐵器類 202점
부뚜막 1개 외 사이전연호 3점
麻布 잔편, 漆皮 잔편, 人骨
참고문헌
· 吉林省博物館文物工作隊, 「吉林集安的兩座高句麗墓」『考古』 1977-2, 1977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魏存成,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方起東·劉萱堂, 「集安下解放第31號高句麗壁畵墓」『北方文物』 2002-3, 2002
· 孫仁杰·違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耿鐵華, 『高句麗古墓壁畵硏究』, 吉林大學出版社, 2008
· 전호태, 「고구려 집안권 벽화고분의 현황과 과제」『蔚山史學』 14, 蔚山大學校史學會,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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