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하 2112호묘(禹山下 2112號墓)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
연대
고구려
4~5세기대
내부규모 및 특징
석광 남북길이 6m, 동서너비 5m.
묘도 길이 4.60m, 너비 2.38m.
묘도 길이 4.60m, 너비 2.38m.
역사적 의미
묘의 위치, 규모, 건축구조, 출토유물을 볼 때, 이 묘의 피장자는 신분이 비교적 높다고 여겨지는데, 고구려 시기의 귀족으로 추정.
통구고분군의 분포정황을 살펴보면, 고구려 무덤은 대부분은 산비탈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배열되었는데, 비탈 위의 무덤 연대가 비교적 이르고, 일반적으로 적석곶묘임. 산 아래의 무덤은 대부분 독립된 봉토석실묘이고 그 연대는 비교적 늦음. 우산하 2112호묘가 위치한 지대는 우산 남쪽 비탈의 끝부분으로, 그 주위에 오회분, 사회분, 사신묘 등 대형봉토석실분이 많이 분포함. 축조연대는 그 고분들과 서로 비슷할 것임.
초기 적석총에 부장된 유물은 대부분 실용품이나, 4세기말 전후에서는 장식성 기물이 대량 증가하고, 5세기말 이후에는 장식성 기물이 매우 보편적이 됨. 우산하 2112호묘에서 금·은·금동 장식품이 대량 출토.
출토와당을 살펴보면 연문장식에 “V”자형의 돌기가 있고 연판 꼭대기부분 양측에 각각 한 개씩 乳釘이 있음. 태왕릉에서 출토된 와당에서는 乳釘이 연판 꼭대기 양측 외에도 蓮蕾(연꽃 꽃봉오리) 가운데에도 있음. 장군총에서 출토된 와당에는 蓮蕾 꼭대기에 2개의 乳釘은 있으나, “V”자형의 돌기를 볼 수 없음. 와당의 진행규칙을 살펴보면 우산하2112호묘, 태왕릉, 장군총 순임.
태왕릉에서 일찍이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명문전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광개토대왕의 능으로 추정. 광개토대왕은 392년에 즉위해서 412년에 죽었으며, 414년에 태왕릉에 안장됨. 계단적석묘인 우산하2112호묘는 태왕릉보다 이르므로 그 상대연대는 약 4세기 말~5세기 초가 됨.
張福有·孫仁傑·遲勇은 우산하 2112호묘를 적석묘가 봉토묘로 가는 과도기 단계로 보면서 피장자로 장수왕의 아들인 助多로 추정.
문헌자료 중 『양사』권 54 동이전 고구려전에 “其死 有槨無棺”이란 기록이 있는데, 초기 적석총 중에 목관구조가 발견되지 않아 고구려 적석총에 목곽은 있고, 목관은 없다고 대부분 인식함. 그런데 우산하 2112호묘에서는 형태가 같지 않은 棺釘 34건, 철제 扒鋦 45건이 출토됨. 棺釘은 목관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못이고, 扒鋦은 목곽에 만들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목관과 목곽이 이 묘에 동시에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음. 적석석광묘 중에 철제 관정이 출토되는 현상은 우산묘구의 여러 묘에서 보이는데, 그 무덤의 연대는 4~5세기 전후로, 우산하2112호묘와 가까움. 즉 4세기에 이르러 고구려에서 목관과 목곽이 적석석광묘에 동시에 사용되었다고 설명됨.
적석석광묘는 고구려 고유의 묘제로, 통구고분군의 적석묘에서 다수를 차지하는데, 석광은 無段·有段적석총 중에 존재함. 그 중 대부분은 단일석광이고, 평면은 장방형이고, 돌로 광벽을 쌓고, 일부에서 석광 한측에 墓道와 石箱, 耳室이 축조되어 있기도 함. 이러한 무덤의 연대는 상대적으로 늦음. 그 중 耳室이 축조된 묘가 石箱이 축조된 묘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음. 그 발전변화궤적은 ‘單一 石壙 - 石箱 - 墓道 - 耳室’이 됨. 耳室이 있는 적석석광묘는 비교적 늦은 묘 형태로, 우산하 2112호묘가 여기에 속함.
耳室이 있는 적석석광묘는 통구고분군에서 많이 발견되지 않음. 그 연대는 일반적으로 4~5세기에 존재함. 시간상으로 볼 때, 이러한 구조의 묘장은 비교적 짧고 명확한 발전과정을 보냄. 고구려 전통묘제를 대표하는 단일 석광적석묘가 어떤 변화로 耳室이 있는 석광묘로 이어졌는가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구려인이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거나 민족내부의 중대변화 후에 묘제가 변하였다고 볼 수 있음. 우산하 2112호묘는 처음에 묘도와 이실을 만든 후에 석괴로 채웠고, 묘 방향은 초기석광묘의 남향 혹은 서남향에서 늦은 시기의 봉토석실묘에서는 보편적으로 동남향으로 변하게 됨.
통구고분군의 분포정황을 살펴보면, 고구려 무덤은 대부분은 산비탈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배열되었는데, 비탈 위의 무덤 연대가 비교적 이르고, 일반적으로 적석곶묘임. 산 아래의 무덤은 대부분 독립된 봉토석실묘이고 그 연대는 비교적 늦음. 우산하 2112호묘가 위치한 지대는 우산 남쪽 비탈의 끝부분으로, 그 주위에 오회분, 사회분, 사신묘 등 대형봉토석실분이 많이 분포함. 축조연대는 그 고분들과 서로 비슷할 것임.
초기 적석총에 부장된 유물은 대부분 실용품이나, 4세기말 전후에서는 장식성 기물이 대량 증가하고, 5세기말 이후에는 장식성 기물이 매우 보편적이 됨. 우산하 2112호묘에서 금·은·금동 장식품이 대량 출토.
출토와당을 살펴보면 연문장식에 “V”자형의 돌기가 있고 연판 꼭대기부분 양측에 각각 한 개씩 乳釘이 있음. 태왕릉에서 출토된 와당에서는 乳釘이 연판 꼭대기 양측 외에도 蓮蕾(연꽃 꽃봉오리) 가운데에도 있음. 장군총에서 출토된 와당에는 蓮蕾 꼭대기에 2개의 乳釘은 있으나, “V”자형의 돌기를 볼 수 없음. 와당의 진행규칙을 살펴보면 우산하2112호묘, 태왕릉, 장군총 순임.
태왕릉에서 일찍이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명문전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광개토대왕의 능으로 추정. 광개토대왕은 392년에 즉위해서 412년에 죽었으며, 414년에 태왕릉에 안장됨. 계단적석묘인 우산하2112호묘는 태왕릉보다 이르므로 그 상대연대는 약 4세기 말~5세기 초가 됨.
張福有·孫仁傑·遲勇은 우산하 2112호묘를 적석묘가 봉토묘로 가는 과도기 단계로 보면서 피장자로 장수왕의 아들인 助多로 추정.
문헌자료 중 『양사』권 54 동이전 고구려전에 “其死 有槨無棺”이란 기록이 있는데, 초기 적석총 중에 목관구조가 발견되지 않아 고구려 적석총에 목곽은 있고, 목관은 없다고 대부분 인식함. 그런데 우산하 2112호묘에서는 형태가 같지 않은 棺釘 34건, 철제 扒鋦 45건이 출토됨. 棺釘은 목관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못이고, 扒鋦은 목곽에 만들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목관과 목곽이 이 묘에 동시에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음. 적석석광묘 중에 철제 관정이 출토되는 현상은 우산묘구의 여러 묘에서 보이는데, 그 무덤의 연대는 4~5세기 전후로, 우산하2112호묘와 가까움. 즉 4세기에 이르러 고구려에서 목관과 목곽이 적석석광묘에 동시에 사용되었다고 설명됨.
적석석광묘는 고구려 고유의 묘제로, 통구고분군의 적석묘에서 다수를 차지하는데, 석광은 無段·有段적석총 중에 존재함. 그 중 대부분은 단일석광이고, 평면은 장방형이고, 돌로 광벽을 쌓고, 일부에서 석광 한측에 墓道와 石箱, 耳室이 축조되어 있기도 함. 이러한 무덤의 연대는 상대적으로 늦음. 그 중 耳室이 축조된 묘가 石箱이 축조된 묘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음. 그 발전변화궤적은 ‘單一 石壙 - 石箱 - 墓道 - 耳室’이 됨. 耳室이 있는 적석석광묘는 비교적 늦은 묘 형태로, 우산하 2112호묘가 여기에 속함.
耳室이 있는 적석석광묘는 통구고분군에서 많이 발견되지 않음. 그 연대는 일반적으로 4~5세기에 존재함. 시간상으로 볼 때, 이러한 구조의 묘장은 비교적 짧고 명확한 발전과정을 보냄. 고구려 전통묘제를 대표하는 단일 석광적석묘가 어떤 변화로 耳室이 있는 석광묘로 이어졌는가에 대해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고구려인이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거나 민족내부의 중대변화 후에 묘제가 변하였다고 볼 수 있음. 우산하 2112호묘는 처음에 묘도와 이실을 만든 후에 석괴로 채웠고, 묘 방향은 초기석광묘의 남향 혹은 서남향에서 늦은 시기의 봉토석실묘에서는 보편적으로 동남향으로 변하게 됨.
자연환경
주위에 대형 봉토석실분이 많음. 묘 남측으로 60m 떨어진 지점에 오회분 3호와 4호, 묘 동측으로 60m 떨어진 지점에는 四神墓가 있음.
유물정보
금기 3점, 은기 1점, 금동기 140점, 철기 141점, 수막새 21점, 기타 44점.
참고문헌
· 董峰, 「集安洞溝古墓群禹山墓區2112號墓」『北方文物』 2004-2, 2004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