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하 2115호묘(禹山下 2115號墓)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
연대
고구려
6세기 초
조사내용
연도 | 조사기관 | 조사현황 |
1966 | 1966년 통구고분군 실측조사 때, 禹山墓區 2115號墓, 즉 JYM2115호라고 편호. | |
2004 | 張福有, 孫仁傑, 遲勇등이 참여함. 여러 차례에 걸쳐 조사·실측을 진행. 묘의 주변에서 기와 등 유물 출토. |
역사적 의미
오회분과 사신묘, 우산하 2114호묘와 우산하 2115호묘는 고구려가 평양천도 후에 다시 돌아와 장사를 지낸 봉토석실묘임.
우산하 2115호묘는 대형봉토석실묘인데, 규모, 출토된 기와, 고구려 왕릉구역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왕릉급의 묘라고 판단할 수 있음.
왕릉구역과 국내성 사이에 위치한 동대자유적은 왕릉제사와 관계가 있음.
북한 평양주위에도 고구려시기 중·대형 봉토석실묘와 벽화묘가 출토되고 있으나 무덤과 묘실의 규모, 석재 선택, 가공공예수준과 벽화내용 등의 다방면을 살펴볼 때, 고구려 삼경중의 하나에 못 미침. 국내성 주위의 같은 유형의 묘장은, 고구려왕이 여전히 건재했던 상황에서, 아무도 함부로 이렇게 장엄하고 화려한 능묘를 만들어 왕권을 참월하는 이가 없었음. 혹 누군가가 이러한 용기가 있다하더라도 이런 실력은 없을 것임.
張福有·孫仁傑· 遲勇 등은 평양 천도 후 고구려왕릉의례에서 처음으로 집안으로 回葬했던 고구려 제21대왕인 文咨明王의 무덤으로 추정.
우산하 2115호묘는 대형봉토석실묘인데, 규모, 출토된 기와, 고구려 왕릉구역에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왕릉급의 묘라고 판단할 수 있음.
왕릉구역과 국내성 사이에 위치한 동대자유적은 왕릉제사와 관계가 있음.
북한 평양주위에도 고구려시기 중·대형 봉토석실묘와 벽화묘가 출토되고 있으나 무덤과 묘실의 규모, 석재 선택, 가공공예수준과 벽화내용 등의 다방면을 살펴볼 때, 고구려 삼경중의 하나에 못 미침. 국내성 주위의 같은 유형의 묘장은, 고구려왕이 여전히 건재했던 상황에서, 아무도 함부로 이렇게 장엄하고 화려한 능묘를 만들어 왕권을 참월하는 이가 없었음. 혹 누군가가 이러한 용기가 있다하더라도 이런 실력은 없을 것임.
張福有·孫仁傑· 遲勇 등은 평양 천도 후 고구려왕릉의례에서 처음으로 집안으로 回葬했던 고구려 제21대왕인 文咨明王의 무덤으로 추정.
자연환경
중심지리좌표는 동경 126° 11′815″, 북위 41° 08′349″, 묘정상 최고해발은 246m.
우산 남쪽 기슭의 비교적 광활하고 완만한 비탈에 위치.
우산묘구의 북고남저의 완만한 비탈지의 중상부에 위치.
압록강 중류 右岸 충적평원과 인접.
동쪽으로 약 90m 지점에 우산하 2114호묘가 있음.
남쪽으로 약 120m 지점에 우산하 2113호묘가 있음.
우산 남쪽 기슭의 비교적 광활하고 완만한 비탈에 위치.
우산묘구의 북고남저의 완만한 비탈지의 중상부에 위치.
압록강 중류 右岸 충적평원과 인접.
동쪽으로 약 90m 지점에 우산하 2114호묘가 있음.
남쪽으로 약 120m 지점에 우산하 2113호묘가 있음.
유물정보
기와편 다수
참고문헌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