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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우산하 삼실묘(禹山下 三室墓)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514
  • 위치(출토지)
    集安市
  • 지역
    집안(集安市)
  • 유형
    고분>벽화고분
  • 형태사항
    가로: 30m, 세로: 30m, 높이: 5m  , 4점  , 석실 
출토지
집안시(集安市)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09 1909~1910년 谷井濟一, 栗山俊一에 의해 『주선고적도보』(1915)에 기록.
1913 關野貞에 의해 수차례 조사·기록. 관야정은 3개의 묘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삼실묘라고 부름.
1936 三上次男이 『高句麗と渤海』에 기록.
1956 1956년 봄 集安縣 文化科에 의해 무덤문 봉쇄.
1957길림성박물관
(吉林省博物館)
1957년 4월 王承禮, 周健鵬, 曲紹伯, 蘇才에 의해 전체적인 벽화묘조사 가운데 이루어짐.
1961 1961년 가을 무덤문 폐쇄.
1963 1963년 6월 무덤 앞에 나무설명표지판 설치.
1972 흙무지를 돋우고 무덤문을 새로 손보는 등의 무덤수리.
1975집안현문물보관소
(集安縣文物保管所)
1975년 5월 周云臺, 林至德에 의해 벽화에 대한 재조사와 벽화의 화학적 보존처리가 이루어졌고, 제1묘실 바닥의 진흙 제거. 인골·이배·鉢·壺·부뚜막 등을 발견.
1997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박물관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실측. 분구 한변 길이 30m, 높이 5m로 측정.
1935, 1936 池內宏, 濱田耕作, 梅原末治이 1935년 9월 및 1936년 9월 두 차례에 걸쳐 집안에 가서 삼실묘를 조사·기록하였는데, 그 내용이 『통구』下에 실림.
구조특징
봉토석실벽화묘
1914년 3개의 묘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삼실묘라고 부름. 우산하 2231호묘(JYM 2231)로 편호. 봉토에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고 함. 일찍이 도굴됨.
크기가 서로 비슷한 묘실로 이루어진 다실묘임. 3개 묘실이 동시에 축조되어 하나의 통일된 모습이 나타남. 모두 석재로 쌓았음. 먼저 긴 연도를 지나면 제1실에 도달하고, 그 왼쪽에 제2실이 있으며, 그 앞면에 제3실에 있는데, 각각 짧은 연도로 연결됨. 묘도의 입구는 돌로 막았는데, 그 너비는 3척 4촌, 길이는 13척임. 평면배치는 曲尺狀으로 연결됨. 석재에 백회를 바르고 백회벽면 위에 그림을 그림. 묘실지면에 백회를 발라, 매우 매끄럽고 정연함. 묘실 지면 백회층 아래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작은 면적을 시굴하였는데, 백회층 아랫면은 냇돌층이 있고, 그아래로는 항토 다짐층이며, 夯土層 아래는 生土였음. 삼실묘를 축조할 때, 먼저 땅을 다져서 지반을 단단하게 한 다음, 다져진 지반 위에 냇돌을 깔아 묘실에 습기가 스며들지 못하게 함(묘가 있는 지점이 산기슭이기 때문에 지하수위가 비교적 높음).
긴 묘도가 이 묘실 서벽중부를 통과하고, 묘실 안에서 方을 볼 수 있음. 제1실의 주위의 벽은 돌로 축조. 네 벽은 안으로 약간 기울어졌음. 네 벽 위에는 5층 평행고임을 구축하고, 다시 2층 말각고임을 구축한 다음, 그 위에 장방형 석판 2개를 덮었음. 백회가 발라져 있음. 일본인들이 이 고분을 조사할 때, 고분의 천정석을 열고 사다리를 이용해서 들어감.
제2실은 제1실의 북쪽에 위치. 두 묘실 사이에는 연도로 서로 연결됨. 연도는 제1실 북벽 동쪽 끝에 위치. 제2실은 제1실보다 약간 작음. 묘실평면은 방형임. 천정구조는 제1실과 같은데, 다만 4층 평행고임을 구축하고, 다시 2층말각고임을 구축한 후에, 그 위는 거대한 돌로 덮었음.
제3실은 제2실의 서쪽에 위치하고, 제2실 서벽과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음. 크기는 제2실과 거의 같음. 묘꼭대기 구조는 5단의 평행고임을 구축하고, 다시 3단의 말각고임을 구축함.
석재에 백회를 바르고 백회벽면 위에 그림을 그림. 연도, 통로, 3개 묘실 네 벽, 천정 모두 벽화가 그려짐. 벽화 전체의 주제는 생활풍속과 사신도임. 각 묘실의 네 벽 모서리와 벽 상단에는 적갈색 안료로 기둥과 두공, 도리를 그림.
네 벽은 사회풍속화를 주제로 함. 평행고임 천정에는 사신과 권운문을 그려 천공을 나타냄. 묘실 네벽 모서리에는 주홍색 斗拱이 그려졌음. 네 벽 위쪽 끝부분에는 홍색과 황색 두 색의 휘장을 그렸는데, 남벽 휘장은 바람에 펄럭이는 것 외에 瓔珞이 있음. 전체 묘실을 가옥처럼 꾸밈.
동벽은 제1실의 主壁으로, 남녀묘주가 가옥에서 대좌하는 벽화가 그려짐. 全壁에는 가옥 4채를 그렸음.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배치가 안정됨. 남쪽의 제1가옥과 북쪽의 제2가옥은 크기와 모양이 같고, 색깔이 약간 다름. 그 외 나머지 두 가옥은 앞의 두 가옥에 비하여 작고, 2층으로 그려짐. 1호 가옥(남에서 북으로 1~4호로 호칭)은 屋頂이 황색이고, 兩坡水式이며, 등마루 끝에는 치미가 있고, 檐角은 反翹임. 묵선으로 윤곽을 그렸고, 주색 기둥 4개가 있음. 가옥 안에는 황색관을 쓴 여인이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북쪽면을 향하여 무릎 꿇고 앉아 있음. 하반신은 박락되어 명확히 보이지 않음. 머리에는 황색관을 쓰고 묵색合袵紅服을 입었음.
1호 가옥 밖으로 남자시종이 북쪽을 향하고 서 있는데, 머리를 높이 묶었고, 合袵黑點黃服을 입었으며, 하반신을 박락되었음.
2호 가옥은 벽 정가운데 있는데, 2층으로 그려짐. 屋頂은 홍색이고, 兩坡水式이며, 등마루 중간에 寶頂을 그렸음. 아래층은 검은색 기둥임. 아래층에 한 여인은 얼굴을 북쪽을 향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음. 合袵黃色裙服을 입었고, 밑부분은 박락됨. 상술한 두 여인은 남주인의 처와 첩임.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여인 뒷면에는 시녀가 서 있음.
3호 가옥은 처마 아래에 홍·황색 두가지 색의 휘장이 있는데, 주홍색 기둥에 연결되어 있고, 가옥 내의 후벽 벽화에 황금색 비단 도안의 壁帳이 있다는 점에서 1호 가옥과 다름. 새깃을 꽂은 관을 쓴 남자가 남쪽을 향하여 앉아 있는데, 묘주인으로 추정. 붉은 입술과 짧은 수염이 있음. 위에는 황색合袵短襦를 입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대고 있으며, 하반신은 박락되었음.
4호 가옥은 2호 가옥과 마찬가지로 2층이지만, 寶頂이 없고 등마루에 치미가 있다는 점에서 2호 가옥과 다름. 아래층에는 시종 두 명이 무덤주인쪽을 향해 나란히 서 있음. 앞에 있는 시종은 머리를 높이 묶었고, 손에는 긴 손잡이가 달린 부채를 들었음. 뒤에 있는 시종은 홍색의복을 입고, 두 손은 가슴 앞으로 한 물건을 들고 있음.
동벽전체에는 가옥 4채를 그렸음. 사람은 7명, 남주인 1명, 여주인 2명으로, 각각 가옥을 차지하고 있음. 남여주인의 측면에 남녀노복 4명을 그렸음. 전체화면은 묘주인이 집에서 살고 있는 정경을 그림.
동남벽은 네모진 전돌이 깔린 듯한 가로로 길게 뻗은 길에 의해 위아래로 벽면을 나누어짐. 윗면에는 무덤주인부부 출행그림을 그리고(출행도), 아랫면에는 사냥그림을 그렸음(수렵도). 11명으로 이루어진 행렬은 안벽인 동북벽을 향하고 있으며 신분에 따라 사람크기가 다름. 양산을 받쳐 든 7, 8번째의 두 인물과 무엇인가를 받친 듯이 오른손 바닥을 위로 젖힌 11번째 인물 외에는 모든 인물이 두 손을 가슴 앞에 올려 맞잡은 채 걷고 있음. 인물들의 옷은 모두 맞섶(合袵)이며 대부분 고구려 특유의 점무늬 바지 혹은 점무늬 저고리 및 치마를 입었음. 첫 번째 사람은 인도하는 남자노복으로, 머리는 풀어 헤쳤음. 위에는 合袵黑點黃色短襦를 입었고, 허리를 매었으며, 아래에는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음. 바닥이 빨간 검은색 신발을 신었음.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서로 마주잡고 있음. 두 번째 사람은 남주인임. 머리에는 황색의 절풍을 썼음. 용모는 수려하고, 붉은 입술에 짧은 수염을 가졌으며, 두 손은 소매 끝을 가슴에 대고 있음. 위에는 合袵黑邊短襦를 입었고, 외투는 흑색의 짧은 마고자(掛)를 입었으며, 허리를 매었고, 아래에는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음. 황색 신발을 신음. 세 번째 사람은 여주인임. 머리에는 황색 巾帼을 씀. 몸에는 褉緣을 더한 左衽黃色裙服을 입었고, 허리에는 긴 띠를 매었으며,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서로 마주잡고 있음. 네 번째 사람은 아이임. 머리는 풀어헤침. 위에는 合袵紅色短襦를 입었고, 아래에는 흑점이 있는 통이 넓은 황색바지를 입었음. 붉은 바닥의 신발을 신었음.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서로 마주잡고 있음. 다섯 번째 사람은 남자임. 얼굴에 짧은 수염이 있음. 머리에는 황색 절풍을 썼음. 合袵黑袖金黃色短襦와 圓領內衣를 입었고, 허리는 매었으며, 흑점이 있는 통이 넓은 황색 바지를 입었음. 붉은 바닥의 검은색 신발을 신었음.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서로 마주잡고 있음. 여섯 번째는 여자의 모습임. 검은색 머리를 어깨에 늘어뜨렸음. 褉緣을 더한 合袵裙服을 입었음. 두 손은 가슴 앞에서 서로 마주 잡고 있음. 용모는 희미해서 자세히 알 수 없음.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사람은 노복 남녀 두명으로, 손에 양산을 잡고 있음. 남자는 앞에 있는데, 머리는 벗겨짐. 黃色合袵短襦와 흑점이 있고 통이 넓은 황색 바지를 입었음. 붉은 바닥의 검은색 신발을 신었음. 여자는 뒤편에 있는데, 褉緣을 더한 合袵黑點金黃色裙을 입었고, 허리는 몸 뒤로 매었음. 아홉 번째는 여인의 모습임. 몸의 크기는 앞에서 언급한 남여주인 다음으로 큰데, 남주인의 첩으로 추정됨. 검은색 머리를 頭頂에 매었음. 圓領內衣와 褉緣을 더한 左袵裙服을 입었음. 두 손은 가슴앞에서 마주잡았음. 열 번째와 열 한번째 사람은 두 명의 노복으로, 긴 행렬의 뒤를 따르고 있음. 두 명 모두 황색 절풍을 쓰고, 턱 아래에 홍색 띠를 둘렀음. 수염이 조금 나 있음. 앞에 있는 사람은 흑점이 있는 황색 상의를 입었고, 허리를 동여 매었으며, 자색의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음.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모으고 있음. 뒤에 있는 사람은 나이가 많아, 등이 약간 굽었고, 짧은 수염이 있음. 오른쪽 팔은 굽혀서 손바닥을 위로 향하여 있고, 왼손은 주먹을 쥐고 가슴 옆에 대고 있음. 合袵자색 상의를 입었고, 허리를 매었으며, 황색바지를 입었음. 출행도를 보면, 一字雁行으로 왼쪽으로 향하고 있음. 우산을 들고 있는 두 명과 뒤의 노복을 제외하고 모두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바로 고구려인이 가진 특유의 ‘行必揷手’ 의 표현임.
남벽 아랫부분에 벽화 절반이 남아 있는데, 수렵을 주제로 한 벽화로, 묘주인 생전에 사냥한 정경을 묘사한 것임. 현재는 말을 타고 있는 인물 두 명이 남아 있음. 앞에 있는 사람은 상반신만 남아 있고, 타고 있는 말은 박락되었음. 머리에 관을 썼는데, 관에 새깃 2개를 꽂았음. 몸에는 황색緊袖襦衣를 입었고, 허리는 동여 매었으며, 화살통을 차고 있음. 사냥을 하고 있음. 뒤에 있는 사람은 홍색의 말을 타고 앞으로 달려가고 있음. 머리는 풀어 헤쳤음. 紅袵緣緊袖黃襦衣를 입었고, 허리는 동여 매었음. 왼쪽 팔은 앞으로 뻗었는데, 새매(鷂)가 팔에 머물고 있음. 말 앞에는 매가 꿩을 쫓고 있음.
북벽에는 공성도가 있음. 성벽 바깥의 벌판에서는 말갑옷과 말투구로 무장한 말을 탄 두 갑주무사가 긴 창을 휘두르며 서로 쫓고 쫓기고 있음. 말 한 마리는 적색이고, 다른 마리는 흑색임. 城垣은 굽어져 있고, 문과 樓가 있으며, 성안에 가옥이 있음. 성벽 바깥의 오른쪽 상단에서는 두 사람이 격투를 벌이고 있음. 성안에는 한 인물이 담벽에 기대서 겁먹은 모습으로, 성 밖에서 싸우는 모습을 몰래 보고 있음.
벽의 중앙으로 연도가 나 있어, 좌우 두 부분으로 나누어짐. 묘실입구 좌벽과 우벽에는 각각 실물크기의 문지기를 그렸음. 남측에 있는 문지기는 머리에 연화관을 썼고 영대가 휘날림. 이마는 넓고 눈이 크며, 짧은 수염이 있음. 선량한 문관풍으로 그림. 圓領長服을 입고, 허리는 동여 매었음. 북측에 있는 문지기는 머리를 높이 묶고, 영대를 매었음. 두 눈을 부릅뜨고 검보라빛 얼굴을 지닌 무인형으로 묘사. 붉은 가슴을 노출시켰고, 어깨에는 赭石과 수건을 걸침. 자색 바지를 입었음. 두 손은 가슴에 모으고 있음.
천장고임벽화는 평행고임 제1중과 2중, 4중의 일부 면에만 남아 있음. 제1중 梁枋 측면에 꼬인구름무늬(권운문)가 그려졌는데, 꼬인구름무늬(권운문)는 벽 사방을 통과하는 연속된 도안임. 제1중 梁枋 위는 평행고임으로, 각 층 백회는 대부분 박락되었는데, 제2중 石側 서면에 두 마리의 주작이 서로 바라보면서 서 있는 벽화가 남아 있음. 주작 양측에는 각각 보리수 한 그루가 있음. 동벽에는 현무 한쌍이 있음. 평행고임 제4중 앞면에는 봉황으로 보이는 새 한 마리가 남아 있음. 천정에 남아 있는 벽화를 볼 때, 제2중 측면은 쌍사신도를 그렸는데, 현무는 동면, 주작은 서면에 그렸음. 이것은 묘의 방향 혹은 묘주인 장식과 연관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화가가 방향을 판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북방신의 상징인 현무를 동벽에 그린 것이라고 추정됨.
연도 양측에 벽화가 그려져 있으나 대부분 박락. 남벽에 묘실을 향한 인물행렬의 일부, 천장면에 해와 달을 비롯한 10여개의 별 그림이 남아 있음.
네 벽에는 제1실에서와 달리 역사와 장수를 그렸음. 천정에는 연화, 새, 짐승, 祥雲, 선인, 星宿을 그렸음. 남·북·동 세 벽에는 각각 역사 한명이 그려져 있음. 두 다리는 기마자세를 취하고, 두 팔로는 도리 밑을 받쳐 들고 있음. 세 역사는 자세는 같으나 의복은 다름. 남벽 역사는 검은 머리를 頭頂에서 매었음. 황색 얼굴색에 붉은 입술, 큰 귀, 짧은 수염이 있음. 圓領緊袖金黃色錦衣를 입었는데, 緊袖에 蓮瓣紋이 장식되어 있음. 허리에 황색띠를 매었고, 대퇴도 매었으며, 몸 뒤에 휘날리고 있음. 아래에는 황색의 꼭 끼는 바지를 입었음. 다리부분은 희미하여 명확하지 않음. 북벽 역사는 검은 머리를 頭頂에서 매었음. 붉은빛 얼굴색에 큰 귀와 짧은 수염이 있고, 윗니는 아랫입술을 꽉물고 있음. 황색圓領緊袖羽衣를 입었고, 허리에는 홍색띠를 매었으며, 綠色羽袴를 입었음. 맨발임. 두 다리에는 각기 한 마리씩의 뱀이 감겼으며 온몸에서는 상서로운 기운이 뻗어 나오고 있음. 푸른빛 얼굴의 동남벽 역사의 짧은 소매 끝은 연꽃잎무늬로 장식되었으며 두 다리 부분은 안료의 퇴색이 심하여 뱀이 감겨 있는지 여부가 확실치 않음. 제3실의 연도와 이어지는 제2실 서남벽의 장수는 뿔 모양의 장식이 좌우로 뻗은 투구와 목가리개가 달린 갑옷, 뾰족한 못이 박힌 전투용 신발로 무장하였으며, 오른손에는 긴 창을 짚고, 왼손에는 환두대도를 칼집 째 들었음. 무사도 상대편 過道 옆에는 권운문이 있음. 묘실 내 서남모서리와 동북모서리에는 각각 흑색의 斗拱을 그렸고, 밑에는 흑색 柱礎를 그렸음.
천장부 평행고임 제1중에는 앞뒤좌우의 방향에 맞추어 雙四神을 그렸음. 동남면의 마주 보는 두 주작 사이에는 연꽃화생을 그렸음. 남쪽에는 청룡 두 마리가 있는데, 머리를 맞대고 서쪽으로 날고 있음. 북벽에는 백호 두 마리가 있는데, 입을 벌리고 이빨을 드러내며, 서쪽으로 달리고 있음. 흡사 청룡과 대칭하는 것 같음. 동벽에는 현무 2마리가 있는데, 두 현무는 뱀이 서로를 한 번 감은 후, 각기 자기가 휘감은 거북과 머리를 마주하게 그렸음. 제2중 고임에는 꽃받침과 받침줄기가 달린 5판연화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 동벽에는 두 송이, 북벽에는 네 송이가 있고, 그 사이에는 작은 연화가 있음. 서벽에는 세 송이가 있고, 중간에 한 송이가 사람에게 꺾이고 있음. 남벽에는 네 송이가 있는데, 서쪽으로 두 번째 송이는 칼로 잘려진 흔적이 있음. 제3중의 서남면과 잇닿는 제4중의 다른 세 면은 天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상서동물로 장식. 고임 제5중에 해당하는 삼각고임 제1중의 각 면에는 남녀연꽃화생 및 소머리에 사람몸을 한 神人, 여러 종류의 飛天과 奏樂天을 그렸음. 삼각고임 제2중에는 갖가지 비천을 묘사하였고 삼각고임 제1중과 제2중의 밑면에는 커다란 연꽃을 그림. 천장석에는 해와 달, 북두5성, 남두6성으로 장식.
제1실에서 제2실로 통하는 연도 좌벽과 우벽에는 문지기 장수를 한 사람씩 그렸음. 두 문지기는 서로 侍立하고 있고, 제1실 쪽을 향하면서 2실을 수호하고 있음. 두 문지기 모두 황색 투구를 썼음. 백색 띠를 매었고, 앞뒤로 휘날리고 있음. 菊黃色 얼굴색에, 눈은 엄숙하고, 짧은 수염이 있음. 두 손에는 긴 창을 잡고 있음. 홍색 袍服을 입었고, 허리에 띠를 매었음. 雙叉를 세우고 어깨에는 황금색 두건을 둘렀으며, 두 팔을 동여매어 아래로 내려뜨림. 다리부분은 박락됨.
제 3실 네 벽에는 역사, 천정에는 사신·연화·새·祥雲·짐승, 星宿 등이 그려짐. 묘실 네 구석에는 흑색 斗拱이 그려짐. 네 벽에는 하늘세계를 떠받드는 역사를 한 사람씩 그렸음. 서북벽, 동북벽, 동남벽의 역사는 제2실 세 벽의 역사와 얼굴, 자세, 옷차림새 등이 같음. 서북벽 역사의 오른쪽 윗편에는 두 뱀이 몸을 뻗쳐오르면서 교미하는 모습을 그렸음. 동북벽 역사의 두 다리 사이에는 연꽃이 한 송이 떠 있으며, 동남벽 역사의 소매 끝은 연꽃잎무늬로 장식. 서남벽 역사는 뱀이 감긴 오른팔로는 창방을 받쳐 들고, 왼팔은 나무기둥근처로 뻗은 자세로 서 있음.
평행고임 제1중에는 방향에 맞추어 쌍사신을 그렸음. 서벽에는 주작 두 마리가 그려짐. 주작은 날개를 펴고 마주보며 서 있음. 주작의 뒤에는 측면에서 바라본 연화가 배치되어 있음. 동벽에는 현무 두 마리가 그려졌는데, 뱀이 거북이몸을 휘감고 있음. 뱀의 두 머리는 相交하면서, 머리를 돌려 거북이 머리를 서로 보고 있음. 두 현무 사이에는 꽃봉오리 한 개가 있고, 남쪽의 현무 뒷편에 그려진 물고기를 문 백로(白鷺)의 모습이 눈에 뜨임. 남벽에는 청룡 두 마리가 그려짐. 머리를 들고 입을 벌리며 혀를 내밀고 있음. 몸은 황색으로 붉은색 비늘이 있음. 용의 발가락은 3개임. 북벽에는 백호 두 마리가 그려짐. 입은 벌리고 혀를 내밀면서 앞으로 달려가고 있음. 앞의 호랑이는 청색이고, 뒤의 호랑이는 황색임.
평행고임 제2중의 서북면, 동북면, 동남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옆에서 바라본 五瓣연꽃을 그렸음. 매벽에는 세 송이가 있는데, 색은 주홍색이고 묵선으로 윤곽을 함. 그 동벽의 제2층고임과 남·서·북벽의 3층고임은 서로 연결되었고, 주홍색의 권운문이 있음.
평행고임 제4중의 각 면에는 상서로운 새들과 구름을 그렸으며 제4단의 뒷면과 제5단의 앞면 및 좌우 면에는 비둘기, 봉황, 긴꼬리 새, 백로 등과 같은 갖가지 상서로운 새를 묘사.
제1층 말각석 밑에는 각각 연화가 그려져 있음. 제1층 말각석 측면에는 여러 짐승이 있는데, 동남모서리에는 뿔 한 개가 있는 짐승이 있고, 동북모서리에는 천마 한마리가 있음. 서남·서북 모서리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음. 제2층 말각석 측면에는 측면에서 바라본 五瓣연화 한송이가 있는데, 말각석 밑으로 뻗어 있음. 천장석에는 해와 달, 여러 가지 별자리를 배치.
2실에서 3실로 통하는 연도 좌벽과 우벽에는 긴 창을 쥐고 무덤칸을 지키는 문지기 장수를 한 사람씩 그렸는데, 2실을 향하고 있으면서 제3실을 수호하고 있음. 역사들은 제1실에서 제2실로 통하는 연도의 역사와 같이 긴 창을 들고 서 있음.
내부규모 및 특징
묘도는 서쪽으로 나 있는데, 길이 4.5m, 너비 1.2m, 높이 1.2m, 방향은 남서쪽 73°
제1실은 약간 큰데, 길이 2.9m, 너비 3m, 높이 3.2m.
역사적 의미
삼실묘의 배치는 새롭고 안정되어 고구려석조건축예술의 발전수준을 보여 주고 있음. 묘실구조를 보면 여러 층의 평행고임을 구축한 다음, 말각고임을 구축하는 방법을 채용하고, 그런 연후에 말각을 쌓는 일정한 기초를 세웠음. 벽화를 보면 각저묘, 무용묘, 통구 12호묘, 마선구 1호묘보다 새로운 내용이 풍부함. 예컨대 雙四神, 들보를 받치는 역사, 蓮花仙子, 뿔 하나 가진 짐승, 출행도, 공성도, 鷺鹚, 우수인신상 등임.
벽화내용을 보면 묘주인이 거주한 집은 상당히 화려함. 휘장이 걸려있고, 높이 들어서 橫梁에 묶고, 포대를 내려뜨는데 流苏와 같음. 벽에도 織錦式 도안을 그린 화려한 휘장이 있음. 이러한 건물은 고구려 일반인이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상층 통치계급의 주거지라고 할 수 있음. 그리고 남자 한 명과 여자 두 명이 각각 한 가옥을 차지하고 있음. 묘실구조의 재결합은 3실이 서로 연결되는 것임. 제1실 동벽 출행도에는 남자 한명과 여자 두 명의 주인이 가솔과 노복을 거느리고 출행하고 있는데, 삼실묘 묘주가 일남일처일첩이라는 것을 알려줌. 제1실 북벽의 공성도를 볼 때, 남자 묘주인은 이름 있는 장군으로 추정됨. 공성도는 묘주인이 어느 전장에서 공을 세운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추정.
關野貞(1932년)은 연화문이 북위이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동진시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평양천도 이전으로 추정.
李殿福(1981년)은 묘실구조, 벽화내용, 제1실에서 출토된 시유도기 등을 살펴볼 때, 축조연대는 대체로 북위시기에 해당하는데, 통구 12호묘와 마선구 1호묘보다는 늦고, 사신묘와 오회분 4·5호묘보다 이르다고 할 수 있음. 대체적으로 5세기 혹은 5세기 이후로 추정됨.
魏存成(1994년)은 귀갑묘, 산연화묘, 장천 1호묘, 장천 4호묘, 하해방 31호묘, 모두루묘, 환문묘와 더불어 5세기 말~6세기 초로 추정.
方起東·劉萱堂(2002년)은 집안에서 발견된 벽화묘의 연대 및 분기와 관련하여, 4기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3기로 파악. 제3기는 일부 단실과 삼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쌍실묘가 주를 이룸. 묘꼭대기부분은 여러 층의 평행 고임과 覆斗式이 나타나는데, 말각고임의 간격(跨度)이 더욱 커짐. 묘방향은 대부분 서향임. 벽화내용은 묘주인의 생전생활장면과 장식무늬(도안) 두 유형이 주를 이루는데, 조성된 도안의 단독모양이 더욱 커짐. 이 시기의 사신그림은 더욱 완전해지고, 점차 돌출되며, 신선과 불교주제의 그림이 더욱 증가함. 이 시기의 묘장에는 장천 1호묘, 삼실묘, 환문묘, 모두루묘, 귀갑묘 등이 있고, 축조연대는 5세기 중엽~6세기 초로 추정.
孫仁杰·違勇(2007년)은 제1실은 山谷도상 위주이고, 제2·3실은 역사 위주이며, 천정은 雙사신도가 배치되어 있음. 사신도상은 각저묘·무용묘보다 늦고, 사신묘·오회분 4·5호묘보다 이르다고 할 수 있음. 화풍과 분포가 장천 2호묘와 비슷. 묘 내에서 출토된 황색시유도기 등은 고구려 중·만기의 유물임. 그러므로 축조연대는 5세기로 추정.
자연환경
우산묘구 서쪽에 위치. 통구평원중부 우산남쪽기슭 태왕진 우산촌 5조 밭에 위치.
북쪽으로 20m 떨어진 지점에 통집철로 3호 표지가 이웃하고 있음.
남쪽으로 250m 떨어진 지점에 오회분이 있음.
유물정보
人骨 다수
부뚜막 1개 외 土器類 7개
鐵釘 다수
동물뼈 다수
참고문헌
· 關野貞, 「滿洲輯安縣及び平壤附近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遺跡(一)」『考古學雜誌』 5-3, 日本考古學會, 1914
· 關野貞 外, 『朝鮮古蹟圖譜』 上, 1915
· 關野貞, 『朝鮮美術史』, 朝鮮史學會, 1932
· 池內宏·梅原未治, 『通溝』 下: 満洲国通化省輯安県高句麗壁畫墳, 日滿文化協會, 1940
· 集安縣文物保管所·吉林省文物工作隊, 「吉林集安洞溝三室墓淸理記」『考古與文物』 1981-3, 1981
· 李殿福, 「集安洞構三室墓壁畵著錄補正」『考古與文物』 1981-3, 1981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편, 『조선유적유물도감』 6, 1990
· 조선일보사, 『集安 고구려 고분벽화』, 조선일보사출판국, 1993
· 魏存成,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한국방송공사, 『고구려 고분벽화』, 한국방송공사, 1994
· 강현숙, 『고구려 고분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0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출판사, 2000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方起東·劉萱堂, 「集安下解放第31號高句麗壁畵墓」『北方文物』 2002-3, 2002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의 세계』, 서울대학교출판부, 2004
· 孫仁杰·違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耿鐵華, 『高句麗古墓壁畵硏究』, 吉林大學出版社, 2008
· 전호태, 「고구려 집안권 벽화고분의 현황과 과제」『蔚山史學』 14, 蔚山大學校史學會,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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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하 삼실묘(禹山下 三室墓) 자료번호 : ku.d_0001_0040_0030_2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