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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우산하 3319호묘(禹山下 3319號墓)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516
  • 위치(출토지)
    集安市 洞溝古墳群 禹山墓區
  • 지역
    집안(集安市)
  • 유형
    고분>벽화고분
  • 형태사항
    가로: 21m, 세로: 21m, 높이: 2.65m  , 57점  , 기타 
출토지
집안시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61길림성문물보사대
(吉林省文物普査隊)
“丁巳□□□□歲□□□□□□萬世太歲在丁巳五月廿日”이라고 적혀진 기년명 와당 반쪽을 발견.
1962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
1962년 4월 실측조사.
1966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관소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官所)
통구묘군에 대한 실측조사때, 우산하 3319호묘로 편호.
1979집안시박물관
(集安市博物館)
1979년 10월 묘상에서 盤口청자호 1점을 발견.
1983집안시박물관조직문물
(集安市博物館組織文物)
묘 측면에서 “□□□□□□四時興詣□□□□萬世太歲在丁巳五月廿日”이라고 적혀진 기년명 와당 반쪽을 발견.
1984집안시박물관조직문물
(集安市博物館組織文物)
인면석각에 대해 철제난간을 설치. 묘 측면에서 1/4만 남아 있고, “千谷民造”라고 적혀진 권운문 와당을 발견.
1997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박물관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1997년 5월 1일~5월 20일 方起東(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소장, 측량·도안), 孫仁傑(集安市博物館, 측량·도안), 趙書勤, 張玉春, 王昭(이상 발굴작업), 谷德平(촬영), 林世賢, 林世香(실내 유물 정리 및 복원), 王新勝, 郝海波(이상 유물정리 및 도면)에 의해 통구고분군과 환도산성에 대한 대규모 조사·측량작업 중에 조사가 이루어짐. 66점의 유물과 일부 건축부재 등이 발견. 무덤칸 안에서 벽화묘임을 확인.
2003 張福有에 의해 민간인이 소장하고 있었던 명문와당 반쪽을 발견하였는데, “日爲中郞及夫人造蓋墓瓦又作民四千”이라고 식별함. 1962년, 1983년, 2003년에 각 1점씩 발견된 명문 와당편을 같은 내용을 담은 와당들의 남은 조각으로 보고 명문을 조합하여 “太歲在丁巳五月卄日爲中郞及夫人造盖墓瓦又作民四千餟盦収用盈時興詣得享萬世”로 읽기도 함. 다만 그 가운데 及, 夫 두 글자는 확정되지 않은데, 혹은 “爲中郞將大人造蓋墓瓦”라고 읽을 수도 있음.
2003 張福有에 의해 보수작업 실시.
구조특징
階壇積石磚室壁畵墓
계단적석전실벽화묘
도굴 및 자연파괴 등을 입었으며, 묘 위에는 나무와 잡초가 가득하고, 쌓았던 계단석은 붕괴하여 원래자리를 이탈하였음. 묘 정상의 가운데부분에는 커다란 함몰구덩이가 있고, 묘 위와 주변에는 많은 벽돌과 기와가 흩어져 있었음.
평면은 방형임. 묘는 내부, 외부 두 부분으로 축조. 내부에는 벽돌로 묘실을 쌓았고, 외부는 돌로 계단을 구축하였으며, 중간은 깬돌로 채움. 무덤을 건축하기 전, 구조상 전체적 설계와 심혈을 기울이는 공사를 하였는데, 안과 밖 차례로 진행함. 먼저 묘의 내부부터 축조한 후, 다시 외부를 축조. 묘장 내부구조는 묘실, 연도, 이실, 묘도 네 부분으로 구성. 묘의 위 아래로 많은 암키와와 수키와가 흩어져 있는데, 묘 위에 건축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묘장 서남 모서리에서 4m 떨어진 지점에 끌질을 한 회색 화강암이 있는데, 원래는 묘장 남측에 있었던 계단석으로, 현지 주민에 의해 옮겨져 하나의 작은 碾盤으로 만들어짐. 나머지 돌은 반월형이 나타남.
묘실의 축조방법은 먼저 산비탈면을 평평하게 한 후, 묘실 범위내에 0.5m 두께의 靑膏泥를 평평하게 깔았음. 그리고 膏泥 외측에 돌로 둘레를 한 바퀴 두름. 둘레돌은 지표에서부터 쌓았는데, 동·남·북 세면이 남아 있고, 높이가 2m, 두께는 0.5m 임. 이러한 둘레돌은 묘실 외측에도 쌓았는데, 묘실의 증가하는 높이에 따라 축조. 서측석장은 靑膏泥와 높이가 같음. 석장은 0.4m 크기의 강돌로 쌓았음. 膏泥 윗면에는 10㎝ 정도 두께의 백회가 깔아져 있음. 백회 위에는 회색 벽돌 2겹을 깔아 묘실의 바닥을 만듦. 깔려진 벽돌의 쌓는 방법은, 아래층의 벽돌은 서로 잘 맞추어 깔았고, 위층 벽돌은 人字形으로 깔았음. 깔려진 벽돌 윗면에서 묘실부터 네벽을 쌓기 시작함. 묘실 네벽 모두 깔려진 벽돌 위에 축조되었고, 벽은 밖으로 가면서 약간 호선을 그리며, 벽돌 쌓는 법은 나란히 2行 3順 1丁임. 쌓은 벽돌 사이의 틈은 백회를 이용하여 붙였고, 벽의 두께는 0.65m 임. 네면 장벽 모두 파괴로 인해, 높이가 같지 않은데, 북벽 높이는 1.59m 정도이고, 그 나머지 세 벽은 1.4m 정도임. 전실의 동·남·북 세벽 외측과 서벽 남북 양단의 외측은 0.4m 두께의 백회를 계란 크기의 자갈 및 혼합물과 섞어 단단히 덮고, 혼합물 바깥쪽은 바로 0.5m 두께의 강돌벽임. 묘실 정상부는 파괴가 심하여 명확하지 않지만, 묘실 안에 쌓여 있는 부분적인 褉形 벽돌과 弧形 벽돌을 볼 때, 이 묘의 정상부는 네 면이 안으로 오므라드는 사아식 천정으로 추정됨. 묘실 내 깔려있는 벽돌 윗면에는 6㎝ 두께의 목탄이 깔아져 있고, 목탄 윗면에 다시 5㎝ 두께의 백회가 깔아져 있으며, 백회 윗면의 묘실 양측에는 벽돌 3겹을 깔고, 동측에는 벽돌 4층이 깔려 있음. 묘실 안에는 관대가 만들어졌음. 북측 관대는 전체 길이가 4.95m, 너비는 1.65m, 높이는 묘실바닥에서부터 0.18m 임. 남측 관대는 전체 길이가 4.95m, 너비는 1.2m, 높이는 묘실바닥에서부터 0.18m 임. 동측은 길이 2.1m, 너비 1.65m, 높이는 묘실바닥으로부터 0.23m 임. 묘실바닥 네 모서리와 중간에 도굴로 인한 깊은 구덩이가 나 있음. 유물과 인골은 모두 흩어져 있었음.
연도는 묘실 서벽 가운데 부분에 나 있음. 연도입구에는 원래 석문함, 석문광, 석문미, 석문선 등의 시설이 설치되어 있고, 묘실로 통하였을 것이나, 도굴자들이 부수었고, 그것들이 연도와 이실 사이를 채우고 있음. 拼接한 석문함의 窩으로부터 측정한 문의 너비는 1.2m이고, 높이는 알 수 없음.
이실은 연도 남북에 위치함. 구조는 엉성함. 이실에 쌓은 벽돌이 묘실에 쌓은 磚室과 서로 연결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묘실을 완성한 후, 이실을 축조한 것으로 보임. 이실 또한 三順一丁방법으로 축조하였음. 이실 정상부는 모두 붕괴되었고, 삼면의 벽만 겨우 남아 있음. 남쪽 이실 바닥의 벽돌은 席紋임. 이실 안에서는 자기편, 도기편, 금동장식 등이 대량으로 출토됨. 북쪽 바닥에는 평전을 평평하게 깔았으며, 이실 내에서 철제 갑편이 출토. 두 이실의 사이에서는 관목잔편, 홍색의 칠편, 사람의 肢骨 등이 출토됨.
묘도는 이실의 서쪽에 접해 있음. 묘도의 서쪽 끝부분은 벽돌로 쌓아서 막았는데, 막았던 돌은 이미사라짐.
묘의 외부는 가공을 거친 화강암으로 계단을 쌓았는데, 현재는 4단을 볼 수 있으나, 계단석은 대부분 붕괴되어 원래 자리를 이탈했거나, 혹은 자리를 떠나 사용됨.
제1단 계단은 지표에 축조. 묘장은 남쪽이 낮고 북쪽이 높은 산구릉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남면 제1단 계단은 4층으로 쌓아서 높이를 더해줌으로써, 북면과 평행하게 하고자 함. 바닥층과 네 모서리에 있는 돌들은 비교적 큰데, 가장 큰 돌은 길이가 2.5m, 너비가 0.8m, 높이가 0.1m 임. 위로 갈수록 그리고 가운데부분의 돌은 비교적 작은데, 일반적으로 길이는 1.5m, 너비는 0.8m, 높이는 0.3m 정도임. 동서 양단의 계단은 비교적 보존이 좋으나, 가운데 부분의 계단은 붕괴되었음. 변의 길이는 22.5m, 높이는 2.4m 정도이나, 높이는 같지 않음. 동면 계단 북단은 2층이고, 가운데 부분은 붕괴되었는데, 변의 길이는 20.5m, 북단의 높이는 0.7m 정도임. 북면 계단의 변 길이는 21m, 높이는 0.7m 정도이나, 높이는 같지 않음. 서면 계단 가운데부분은 붕괴되면서 밖으로 벌어졌고, 변의 길이는 20m, 남단의 높이는 2m, 북단의 높이는 0.6m 임. 계단과 묘실 외측 석장 사이는 강돌로 채웠는데, 강돌의 크기는 0.4m 정도임. 강돌로 평평하게 만든 후, 그 윗면에 안으로 들여서 제2단 계단을 축조함.
제2단 계단은 제1단 계단 윗면에 축조하였는데, 네 면에서 안으로 약 1.5~2m 정도 들여 쌓았음. 2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남은 높이는 0.5m 정도임. 계단석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동남모서리와 서남모서리가 남아 있음. 계단 안에 돌로 채워 평평하게 만든 후, 그 윗면에 3단 계단을 축조.
제3·4단 계단 모두 각 계단으로부터 안으로 1.5m 정도 들여 쌓았음. 계단석은 대부분 유실되어, 동남모서리 1층만 볼 수 있는데, 남은 높이는 0.3m 정도임. 묘장의 현재 높이를 볼 때, 계단은 5단으로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
묘실 네벽 墻面에는 모두 백회가 발라져 있으나, 백회 대부분은 박락됨. 정리 중 장벽에서 발견된 박락된 백회잔편에서는 주홍색·녹색·흑색 등을 볼 수 있음. 현재 묘실 동북모서리 墻面에 홍색과 녹색으로 채색된 벽화면이 세 곳 남아 있음. 그 위치를 볼 때, 묘실 네 모서리에 홍색 기둥을 그리고, 중간에 녹색의 장식도안을 그렸던 것으로 추정됨.
묘장 동남 모서리에서 9m 떨어진 지점에 길이 1.04m, 너비 0.54m, 두께 0.9m이고, 아래가 위보다 넓은 청회색 침적암이 있는데, 그 석면에는 단도를 이용해서 새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인상이 있음. 인상은 몸이 반라이고, 머리에는 릉형에 가까운 책관을 쓰고 있는데, 책관의 꼭대기부분에는 鳥羽가 장식되어 있음. 얼굴은 桃形이고, 턱은 뾰족함. 五官의 위치는 위쪽으로 치우쳐져 있는데, 눈썹은 두 갈고리모양의 호선으로 새겼고, 두 눈은 대추씨 형태로 새김. 콧날은 곧은 쌍선으로 새기었고, 鼻翼은 두툼함. 입 역시 대추씨 형태이고, 귀는 궁형임. 목은 길고, 목부분 아래는 단순한 호선으로 어깨, 팔, 가슴, 가느다란 몸을 새김. 가슴 앞에 2개의 둥근 원은 유두를 표현하고 있음. 목부분과 가슴부분에는 깎아 새긴 19개의 둥근 점이 한 바퀴 둘러져 있고, 두 유두 윗부분 중간을 중심으로, 둥근 점 두 열이 가로세로 십자형으로 배치되어 있음.
우산하 3319호묘는 일찍이 도굴과 파괴를 입어, 출토유물은 모두 원래 위치에서 이탈해 있었음. 정리할 당시, 유물은 파손되어 흩어져, 묘실·이실·묘 위의 적토에서 분포되어 있었음. 66점의 기물, 그리고 건축부재 및 부분기물잔편들이 출토. 금동기는 장식품이 주를 이루고 있고, 절대다수가 이실 안에서 출토됨. 금동 대부분은 박락됨.
우산하 3319호묘 위아래로 많은 벽돌·수키와·암키와 등이 흩어져 있음. 비록 완전히 수집하지는 못하였지만, 가지런히 정리해서 쌓아본다면, 벽돌은 11여 입방미터, 암키와는 3.5입방미터, 수키와는 1.2입방미터 정도임. 쌓은 묘실, 천정 결실이 많지 않은 점, 수집된 와건의 틈과 맞물림 등을 고려할 때, 35㎡를 덮고 있는 가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렇게 덮고 있는 면적은 단지 묘실범위를 덮을 수 있을 정도임. 기와는 모두 니질의 회색임.
내부규모 및 특징
階壇積石磚室壁畵墓
계단적석전신벽화묘
1997년(2002년 보고서)는 변길이 20m, 높이 1.5m.
2005년 보고서는 변길이 약 21m, 높이 2.65m, 방향은 남서쪽 75°.
묘실 평면은 정방형이고, 변의 길이 4.95m.
연도의 너비 1.9m, 길이 1.05m.
남쪽 이실 깊이 2m, 너비 1.2m, 서벽의 남은 높이 0.48m, 남벽의 남은 높이 0.5m, 동벽의 남은 높이 0.8m.
북쪽 이실 깊이 2m, 너비 1.1m, 서벽의 남은 높이 1m, 북벽의 남은 높이 1.3m, 동벽의 남은 높이 1.4m.
묘도 너비 1.4m, 길이 1.2m, 남은 높이 0.5m.
역사적 의미
우산하 3319호묘는 통구고분군 가운데 위치가 돋보이고 일정정도 규모를 갖추었음. 형상과 구조가 분명해, 진일보한 시대구분과 순서배열을 편리하게 해주는 묘장임. 묘장 동남모서리에서 약간 떨어진 커다란 돌에 음각된 人像이 있어서, 국내외 학자들은 이 묘에 대해 왕릉으로 보기도 하고, 혹은 고구려묘장 가운데, 석광묘에서 석실묘로 바뀌는 표준으로 추정하기도 함. 우산하 3319호묘는 계단전실묘임. 계단전실묘는 10000여기의 통구고분군 가운데 현재까지 2기가 발견되었음. 나머지 1기는 마선구 682호묘인데, 묘장규모는 중형으로, 우산하 3319호묘와 같음.
현재 고구려묘장에 대한 연구성과를 볼 때, 적석묘는 고구려 고유의 묘제임. 고구려의 외부구조를 보면 무단-유단-계단의 변천과정을 거침. 또한 내부구조는 석광-광실-석실 세단계로 나뉨. 5세기 전후에 이르러, 적석묘는 점차 쇠퇴하고, 봉토석실묘가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유행함. 적석묘와 봉토석실묘로의 교체과정 중에, 그 묘장내부는 석실을 축조. 이러한 묘장형태의 근본변화는, 고구려의 사회발전과 의식형태영역의 진보 뿐 아니라, 고구려와 주변민족 간의 흡수와 융합관계를 설명함. 우산하 3319호묘의 전실구조는 중원 漢晋시기에 유행한 전실묘제구조와 기본적으로 일치함. 묘장에서 채용하고 있는 靑磚三順一丁砌築墓室, 바닥에 푸른 벽돌을 깐 형태, 사아식 천정 구조 등의 축조방법은 서에서 동으로 전파발전한 것임. 고구려 묘장내부에 아직 광실계단이 남아 있고, 우산하 3319호묘는 전실구조가 출현하였는데, 이는 고구려묘제 변화의 효시를 열었던 것이고, 동시에 고구려묘장 내부석실의 생산과 발전에 대해, 인도·촉진작용을 하였음. 우산하 3319호묘의 외부구조는 고구려전통의 계단적석묘방식을 채용하고 있음. 묘의 계단석 가장자리에 끌질을 거친 홈이 없고, 네 변에 호분석이 없음. 현재까지 연구성과를 보면, 계단석 가장자리에 끌질을 거친 홈은 4세기 말 중·대형의 독립된 묘장에서 보이는 석조공예에서 채용하고 있는 기술임. 천추묘·태왕릉 모두 이러한 홈을 볼 수 있는데, 이보다 이른 시기의 묘장에서는 기본적으로 볼 수 없음. 우산하 3319호묘에서 출토된 청자는 전형적인 동진시기의 청자로, 그 기형은 남경 中央門外 郭家山4호묘에서 출토된 청자반구호와 같은데, 청자 분기의 2기에 해당함. 이로 볼 때, 절대연대는 동진전기, 즉 317~357년임. 마침 1961년과 1983년에 출토된 “丁巳”기년명 와당연대와도 비슷한데, 357년이 “丁巳”명 와당연대라고 할 수 있음. 그리고 “乙卯年癸酉”명 와당의 연대는 355년이고, 동시에 우산하 3319호묘의 연대라고 할 수 있음.
耿鐵華(1993년)는 우산하 3319호묘에 대하여 왕릉급이라고 주장하면서, 구체적으로 고구려 17대왕인 소수림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함.
方起東·劉萱堂(2002년)은 집안에서 발견된 벽화묘의 연대 및 분기와 관련하여, 4기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1기로 파악. 제1기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단실묘이고 연도 양측에 이실이 축조되어 있다는 구조를 들 수 있음. 묘실은 궁륭식과 사아식, 혹은 여러 층의 고임 및 네 모서리에 간혹 작은 말각석이 더해진 천정을 갖추고 있음. 그리고 묘방향은 서쪽을 향하고 있음. 벽화의 내용으로는 묘주인의 생전생활이나, 연화 혹은 王자 문양으로 조성된 문양 등을 그렸음. 묘실 네 모서리에는 나무구조물을 그려 넣었고, 菱形문양 혹은 螭문양을 그리기도 하였으며, 천정부분에는 주로 연화와 云紋을 그렸음. 이 시기의 전형적인 벽화묘로는 마선구 1호묘, 통구 12호묘, 산성하 332호묘, 장천 1호묘 등으로 파악. 축조시기는 4세기 중엽~말엽으로 추정. 그러면서 특수한 케이스로 우산하 3319호묘를 지목. 평면구조가 제1기에 속하는 묘장과 거의 같으므로, 1기로 포함시킴.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외(2008년)는 우산하 3319호묘의 변길이는 21m 정도인데, 통구고분군 가운데 이정도의 중형묘장은 백여기에 이름. 이 시기의 고구려왕릉의 규모를 보면, 변의 길이는 30m 이상임. 그리고 묘역이 협소하고 주변에 다른 묘장이 분포하고 있음. 왕릉은 묘역이 광활하고, 지세가 높으며, 제사지, 능장, 陪墳 등이 있음. 이로 볼 때, 우산하 3319호묘는 고구려 왕릉이 아니라는 주장. 우산하 3319호묘 묘주의 신분에 대해서 살펴보면, 묘장의 내부·외부구조와 출토유물을 종합해 볼 때, 묘주는 중원에서 왔고, 진시기에 고구려로 의탁한 평주자사 동이교위 崔毖의 무덤으로 추정. 그 주요근거로는 첫 번째, 우산하 3319호묘 묘주는 중원의 전통묘제를 직접 고구려전통의 적석묘에 그대로 답습하여 사용. 즉 중원의 묘제를 주로 하면서 고구려묘제와 결합한 매장방식을 채용하고 있는 것임. 그리고 묘실에서 출토된 많은 벽화편과 묘벽에 남아 있는 벽화를 볼 때, 당연히 벽화묘로, 현재 발견된 고구려 벽화묘 가운데 연대가 가장 이른 무덤임. 두 번째, 묘에서 출토된 기년명 와당과 관련하여, “太歲在丁巳五月廿日爲中郞及夫人造蓋墓瓦又作民四千餟盦禾 又 用盈時興詣得享萬世”라고 파악하기도 하는데(張福有), 이 와당의 완벽한 판독은 묘 주인의 신분을 추정하는데 있어 중요한 의의를 제공. 와당면에 남아 있는 筆畵와 文意를 분석해 보면, “中郞及夫人” 혹은 “中郞將大人”이라고 읽을 수 있는데, 晋시기 고구려에서 “中郞”이라는 관직을 볼 수 없음. 435년 북위는 고구려 장수왕을 “都督遼海諸將軍, 征東將軍, 領護東夷中郞將, 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라고 봉함. 최비는 晋시기 동북의 최고관직에 있었음. 고구려는 진왕조에 대해 시종일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진왕조에 조공을 바쳤는데, 직접 平州刺史 東夷校尉 崔毖의 관할을 받아서, 최비로부터 고구려의 대소관원들이 관작을 받음. 집안에서 일찍이 “晋高句麗率善仟長”, “晋高句麗率善佰長”, “晋高句麗率善邑長” 등의 官印이 출토됨. 이런 점을 볼 때, 당시 오직 최비만이 “中郞將大人”의 자격을 갖출 수 있음. 『晋書』慕容廆載記와 『資治通鑑』晋紀 中宗中 등에는 晋元帝 太興 2년(319년) 12월 “鮮卑慕容廆襲遼東. 平州刺史東夷校尉 崔毖奔高句麗”라고 기재되어 있음. 최비는 고구려와 단씨·우문씨 등 선비세력을 이용해서 모용선비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에 실패하게 되는데, 모용선비는 고구려종주국에 대한 지위에 대한 획득을 재촉하게 됨. 최비는 수십의 기병과 집을 버리고 고구려로 도망을 갔다고 하는데, 이는 최비와 고구려의 밀접한 관계를 볼 수 있음. 최비는 고구려에 생을 마감하는데, 고구려왕도에서 장사를 지냈을 가능성이 높음. 다만 최비의 일생과 관련한 정황은 문헌에서는 아직 찾지 못함. 세 번째, 부장품들이 대부분 동진에서 왔다는 점임. 고구려의 시유도기는 대부분 무덤에서 나왔고, 유지에서는 매우 적게 출토됨. 이번 발굴에서 출토된 시유도기는 모두 실용품인데, 계수호, 훈로, 이배, 호자 모두 晋시기의 유행품임. 이러한 시유도기는 고구려묘장에서는 대부분 볼 수 없는 유물로, 당연히 중원에서 유입된 것임. 사이시유도기호를 보면, 고구려토기 가운데 같은 유형에서 보이는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데, 고구려에서 烧造한 것으로 추정됨. 마선구 1호묘에서 출토된 시유도기호와 비교하여, 우산하 3319호묘에서 출토된 시유도기호는 목이 짧고, 구연부는 밖으로 펼쳐지지 않았는데, 이는 비교적 초기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임. 네 번째, 우산하 3319호묘에서 출토된 많은 암키와와 수키와, 그리고 출토량이 적은 와당 모두 蓋墓瓦인데, 이러한 현상은 현재 고구려왕릉 가운데에서는 볼 수 있음. 고구려에는 무덤 위에 가옥을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고 함. 묘 위의 건축물의 성질은 秦漢시기의 寢殿제도를 따랐던 것으로 추정. 고구려 능묘 위의 건축침전은 묘주인의 영혼출입을 제공하고, 또한 성묘를 제공함. 제사와 供奉의 직책은 마땅히 “作民”이 맡아야 했음. “作民”은 민중을 부려 먹는다는 의미로, 제사를 지내는 규칙을 잘 알고 있는 役民을 말함. 화장은 고구려전통의 풍습으로, 유행시간은 길고, 소용온도는 높은데, 적석석광묘에서는 불탄 용석들이 서로 엉켜진 것을 항상 볼 수 있음. 대략 5세기 전후에 이르면, 이러한 火燒의 풍습은 변화하게 됨. 우산하 3319호묘의 발굴과정에서 불사른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런 측면을 볼때, 묘주인이 고구려인이 아니라는 것을 반영하는 것임. 묘 위에서 출토된 기년명 와당 가운데, “乙卯年癸酉”는 355년이고, “丁巳”는 357년임. 우산하 3319호묘의 묘주인은 355년에 죽고, 357년에 장사를 지냈다고 할 수 있음. 이러한 장법은 고구려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이 412년에 죽고 414년에 장사지낸 것과 일치함. 그리고 『북사』고구려전의 “死者, 殡在屋內, 經三年, 擇吉日而葬”이라는 기록과도 부합함.
인면석각은 현재까지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석각예술임. 석각묘의 성격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하고 있음. 석각인물이 우산하 3319호묘의 호위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魏存成, 1994년), 인면석각에 표현된 내용이 제사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견해, 인면석각이 고구려의 모신상이라는 견해(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년), 인면석각이 우산하 3319호묘의 연대가 같지 않고 인면석각의 연대가 이르다는 견해(張文彬) 등이 있음. 상술한 견해들은 인면석각에 대한 관찰각도와 연구기준에 따라 다름. 네 번째 견해는 인면석각의 암석성질을 보았을 때, 청회색 침적사암에 속하는데, 우산하 3319호묘와 사용한 석재와 같지 않다고 함. 그리고 새겨진 인물형상의 선이 투박하고 소박한 점은, 연대가 비교적 이른 원시적인 특징을 반영한다고 하면서, 압록강유역 초기의 지방특색을 갖춘 유물에 속한다고 보았음.
인면석각은 우산하 3319호묘의 동남측에 위치하는데, 장군총의 동남모서리에 배분이 있고, 태왕릉의 동북모서리에 태왕비 및 제대가 있으며, 우산하 992호묘의 동서 양측에 제사지가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음. 우산하 3319호묘에 설치된 인면석각은 제사 수묘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음. 인면석각은 가슴이 풍만하고 허리가 잘록한 여성형상이 표현됨. 머리에 쓰고 있는 幘冠 위에는 조우가 꽂혀 있는데, 『수서』동이 고구려전에는 “人皆皮冠, 使人加揷鳥羽”라는 기록이 있음. 장천 1호묘의 벽화에 보이는 수문위사도에도 머리에 幘冠을 쓰고 있는데, 우산하 3319호묘의 인면석각에 머리에 쓰고 있는 책관과 유사함. 우산하 3319호묘의 묘주인은 엄격한 고구려 수묘제도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의 일개 망명관리라고 할 수 없음. 인면석각은 자기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일 가능성이 높음. 인면석각 흉부 앞에 있는 둥근 점과 관련하여, 화환이라는 견해와 天象이라는 견해가 있음.
자연환경
국내성 북쪽 약 1㎞ 떨어진 산 중턱에 위치하여, 묘 정상에서 집안시구를 내려다 볼 수 있음. 장백산에서 발원해서 노령산맥으로 이어진 한줄기의 우산이 동북에서 서남으로 쭉 늘어져 국내성의 서북단까지 이르고, 노령산맥 중간에서 흘러나오는 통구하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 우산 북측을 거치고, 다시 우산서쪽으로 꺾어 압록강으로 들어감. 우산의 남․북․서 세면은 강으로 둘러싸여, 비교적 개활한 하곡이 형성됨. 우산의 북쪽구릉은 산성하고분군이고, 서쪽 구릉으로 통구하 넘어서면 만보정묘구임. 남쪽구릉은 길이가 4㎞, 너비가 1m의 완만한 구릉지대로 3000여기의 고구려묘장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 지역이 바로 통구고분군의 우산하묘구임. 우산하 3319호묘는 바로 우산 서단의 산언덕에 위치.
동경 126° 10′ 43.4″, 북위 41° 07′ 55.2″, 해발 252m.
남측은 낭떠러지임. 북면은 점점 높아지는 우산의 주봉과 접해 있음. 서측은 골짜기이고, 골짜기 안에 배나무가 가득함. 현지사람은 梨園이라고 불렀는데, 이원 남면에는 고구려시기 건축지, 즉 이수원남유적지가 있음. 동쪽은 구릉지대로, 고구려묘장이 분포하고 있음. 산 위의 도로가 묘장의 남․서 양측을 돌아, 우산 봉우리 정상까지 빙빙 돌아감.
유물정보
金銅製 十版梅花形 步搖裝飾 16점, 金銅製 圓形 步搖裝飾 8점 외 金銅 裝飾 6점, 기타 金銅製 유물 6점
鐵製 재갈 1점 외 鐵器類 555점
鳥首壺1점, 虎子 1점, 薰爐2점, 土器類 22점
石門檻 1개, 石門楣 1개 외 石器類2개
瓦當1점 외 瓦片 6점
벽돌 7점
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耿鐵華, 「高句麗墓上建築及其性質」『高句麗硏究文集』, 延邊大學出版社, 1993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方起東·劉萱堂, 「集安下解放第31號高句麗壁畵墓」『北方文物』 2002-3, 2002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集安市博物館, 「洞溝古墓群禹山墓區JYM3319號墓發掘報告」『東北史地』 2005-6, 2005
· 孫仁杰·違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 香港亞洲出版社, 2007
· 耿鐵華, 『高句麗古墓壁畵硏究』, 吉林大學出版社, 2008
· 吉林省集安市文物局, 『高句麗王城王陵及貴族墓葬』, 上海世界圖書出版公司, 2008
· 전호태, 「고구려 집안권 벽화고분의 현황과 과제」『蔚山史學』 14, 蔚山大學校史學會,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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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하 3319호묘(禹山下 3319號墓) 자료번호 : ku.d_0001_0040_0030_2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