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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배장묘(陪葬墓)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430
  • 위치(출토지)
    吉林省 集安市 太王鎭
  • 지역
    집안(集安市)
  • 유형
    고분>기타
  • 형태사항
    7점  , 기타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태왕진 (吉林省 集安市 太王鎮)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12년 鳥居龍藏이 참여하여, 집안의 산성자산성(환도산성) 등의 고구려 유적들을 조사 시 태왕릉도 함께 조사함.
1913년 關野貞, 今西龍이 조사함. 1915년 『朝鮮古蹟圖譜』에 태왕릉 사진이 수록되었고, 1939년 『通溝』(上卷)에 태왕릉 실측도가 수록됨.
1935년 池內宏, 梅原末治, 黑田源次, 三上次男이 참여함.
1938년 『通溝』 보고서를 출간함. 국내성과 환도산성, 광개토왕비, 장군총, 태왕릉, 천추총 및 오회분, 무용총, 각저총, 삼실총, 사신총, 모두루총과 환문총 등 집안의 도성 및 중요한 고분들의 조사 내용이 기록됨.
1935년 關野貞, 三宅俊成, 伊藤伊八이 참여하여, 집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에 대한 조사를 실시함.
三宅俊成는 『東北亞考古硏究』에 당시 조사 성과를 보고. 關野貞은 그동안의 고구려 벽화고분의 조사 내용을 종합하여 1941년에 『朝鮮の建築と藝術』을 발간함.
1940년 일제 고적조사로 藤田亮策이 참여하여 장군총과 태왕릉 등의 대형 적석총 주변 조사함.
1966년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
통구고분군 조사를 진행하면서 우산묘구 제541호묘(JYM0541)로 편호함.
1990년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현문물보관소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縣文物保管所)
方起東(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邢頤(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馬建華(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林至德(집안시문물보관소), 孫仁杰(집안시문물보관소), 遲龍(집안시문물보관소)이 참여하여 고분 위의 이른 시기 도굴 구덩이와 묘실 조사 및 묘실과 석곽의 보수 작업을 진행함.
19세기 淸의 봉금조치 해제 이후 光緖 初年에 광개토왕릉비의 탁본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인근에 자리한 태왕릉이 주목됨.
1880년(光緖 6년)에 奉天軍 糧署의 王知修가 集安에서 가서 고찰한 후에 1895년(光緖 21년) 『高句麗永樂太王古碑歌考』 저술하였는데, 벽돌(磚)에 예서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가 쓰여 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 이후 연구자들은 碑와 명문 전돌로 인해 태왕릉으로 칭함.
2003년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保管所)
4월 28일 ~ 7월 31일에 걸쳐 王洪峰(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邵春華(길림성박물관), 王志剛(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遲勇(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谷芃(백산시문물관리위원회판공실), 夏宏宇(백성시박물관), 邢春光(농안현문물보호연구소), 蔣剛(길림대학문학원 박사연구생), 趙明星(길림대학문학원 석사연구생)이 참여하여 고분 아래로 떨어진 돌과 계단과 도굴 구덩이, 묘역에 대해 부분적으로 발굴 조사함. 고분 주변의 광범위 陵園 유적 확인을 위한 탐사를 실시함.
조사방법을 보면 태왕릉 계단 구조는 고분 아래로 떨어진 돌과 분구 위의 쌓인 흙을 발굴하는 동시에 계단상의 封石을 절개하여 단면을 조사함. 발굴조사가 진행되던 당시 태왕릉의 떨어진 돌과 떨어져 내린 돌과 계단을 배수 시설과 능원유적의 탐사가 진행됨. 폭 1m의 탐색갱을 고분 주위에 넣어 수직과 수평으로 각각의 긴 탐색갱을 파고 폭넓게 탐사를 시작한 후에, 목표한 유적을 찾아내어 광범위한 발굴을 재차 진행하는 방식을 취함.
구조특징
동북 지구의 전국시기에 일찍이 보이던 석붕묘와 서로 동일하여 4개의 입석과 바닥석·뚜껑돌 모두 6매의 석재로 만들어졌음. 태왕릉과 같이 JYM541P1은 황토층에 축조되었으며 강돌과 묘역의 판석이 모두 그 주위에까지 깔려 있어 태왕릉 묘역과 동시에 구축된 것이 확실함. 묘주는 호태왕과 상당히 관련 있는 인물이어야 함.
P1을 구축한 석재는 모두 청회색 응회암이며 절리는 혈암에 가까워 구조가 비교적 얇은 조각으로 떨어져 나가기 쉬운 약한 성질임. 지금은 바닥석은 갈라지고 뒤틀어졌으며 뚜껑돌은 없어졌으며, 북측 입석은 이미 고분 안으로 기울어져 있고, 남측 석판은 散水 자갈층 위에 평평하게 떨어져 있고, 양측(동측과 서측) 입석만이 자리를 옮기지 않고 지하에 비교적 깊게 묻혀 있음. 태왕릉 묘실 도굴 당시에 한번 훼손된 것으로 추정됨. 바닥석은 장방형으로 가지런히 가공되었는데, 길이 2.5m, 너비 2.3m, 두께 0.15m이며, 지금은 훼손되어 세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음. 동측 벽석의 상부는 이미 훼손되어 길이 2.5m, 두께 0.3m이며, 散水石보다 0.7m 높으며 그 안쪽면 북단에는 너비 10㎝의 얕은 홈(淺槽)이 뚫려 있음. 서측 벽석은 길이 2.7m, 두께 0.35m이고, 자갈 위로 높이는 1.9m이며, 그 안쪽면 북단에는 역시 얕은 홈(淺槽)이 뚫려 있음. 이 석판의 上緣은 원래 지표에 노출되어 있었으나 근년에 진흙에 의해 지하에 묻힘. 위치상 보면, 석판은 남쪽으로 약 0.6m 어긋나서 동측 석판과 대칭을 이루지 않는데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음. 북측 벽석은 길이 2.9m, 너비 2.1m, 두께 0.15m이며 가장자리는 평평하게 손질하였음. 원래는 양측(동측과 서측) 입석의 홈(凹槽)의 안에 끼워 넣는 것으로 하부를 깊게 묻을 필요가 없음. 지금 덮개돌의 압력이 없어졌는데 혹자는 덮개돌이 부서지면서 고분 내로 기울어졌다고 함. 남측 벽석의 평면은 사다리꼴로 길이 2.5~3.35m, 너비 1.65m, 두께 0.13m임(그림 21). 석붕묘의 일반적 규칙을 보면 이 석판은 門石으로 남측에 막아 세운 것이며 수시로 계속해서 사람과 부장품을 매장하기 위해 열고 닫을 수 있었음. 지금 석판은 이미 넘어져 있고 석판의 동측에는 매우 정교하게 가공된 장방형의 니질암 석재가 있었으며, 서측에는 불에 타 깨진 뼈무지가 있었고 8조각의 니질 灰陶조각이 나왔음. 고분의 덮개돌은 이미 파괴되어 관 안에 3~4개의 크기가 다른 잔편으로 떨어져 있으며, 나머지 부분은 행방이 불분명함.
P1 내부 바닥돌은 북단 석판과의 좁은 틈에서 비교적 많은 동물뼈와 깨진 뼈가 출토되는 것과 함께 백회, 기와 잔편, 벽돌 잔편, 금 장식 1점 등이 발견됨. 門石의 서측에는 비교적 커다란 석재가 있으며, 석재의 형상은 불규칙한데 길이 1.4m, 너비 0.5m, 두께 0.4m임. 그 동남에는 두 개의청회색 큰벽돌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위에 ‘未豆’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음. 그 서쪽과 고분 북쪽 일대에는 마름모형 花紋磚이 약간 출토됨.
고분 내 골격은 감정을 거쳐 오소리, 말, 사슴, 물고기, 조류 등 뿐만 아니라 인골이 있음. 인골은 불에 탄 깨진 뼈임. 이전에 알려진 바에 의하여 석붕묘는 한대에 점차 소실되었으며, 이런 류는 이미 흔히 볼 수 없는데 이는 조상에 대한 회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안에 안장된 것이 호태왕의 직계 혈족일 가능성이 있음.
자연환경
SG1 중앙부에 위치하고, 북으로는 태왕릉 남측 제1층과 3m 정도 떨어져 있으며 편호는 03JYM541P1임.
참고문헌
· 朝鮮總督府, 『朝鮮古蹟圖譜』 1, 1915
· 鳥居龍藏, 「南満州調査報告」『鳥居龍藏全集』 10, 朝日新聞社, 1976
· 池內宏, 『通溝』 上: 滿洲國通化省輯安縣高句麗遺蹟, 日滿文化協會, 1938
· 關野貞, 「滿洲輯安縣及び平壤附近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遺跡(一·二)」『考古學雜誌』 5-3·4, 日本考古學會, 1914
· 關野貞, 「滿洲國輯安縣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遺跡」『朝鮮の建築と藝術』, 岩波書店, 1941
· 三宅俊成, 『東北アシア考古學の硏究』, 國書刋行會, 1975
· 三上次男, 「輯安行 - 高句麗時代の遺跡調査」『歷史地理』 71-1, 日本歷史地理硏究會, 1938
· 三上次男, 「東滿風土雜記」『高句麗と渤海』, 吉川弘文館, 1990
· 藤田亮策, 「通溝附近の古墳と高句麗の墓制」『池內博士還曆記念東洋史論叢』 164, 座右寶刊行會, 1940
· 藤田亮策, 「通溝附近の古墳と高句麗の墓制」『朝鮮考古學硏究』 (再收錄), 高桐書院, 1948
· 浜田耕策, 「高句麗広開土王陵墓比定論の再検討」『朝鮮学報』 119·120, 朝鮮学会, 1986
· 永島暉臣慎, 「集安の高句麗遺跡」『好太王碑と集安の壁畵古墳』, 木耳社, 1988
· 西谷正, 「高句麗王陵コンプレックス」『史淵』 134, 九大史學會,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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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蘇才, 「集安高句麗遺跡調査簡記」『吉林省文物工作通訊』, 1957
· 吉林省博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國家文物局 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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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杰·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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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道學, 「太王陵과 將軍塚의 피장자 문제 재론」『고구려연구』 19, 고구려발해학회, 2005
· 李道學, 「集安 地域 高句麗 王陵에 관한 新考察」『高句麗渤海硏究』 30, 고구려발해학회, 2008
· 孔錫龜, 「集安지역 高句麗 王陵의 造營」『高句麗渤海硏究』 31, 고구려발해학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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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장묘(陪葬墓) 자료번호 : ku.d_0001_0040_0030_2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