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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하해방 0031호묘(下解放 0031號墓)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521
  • 위치(출토지)
    集安市 下解放
  • 지역
    집안(集安市)
  • 유형
    고분>벽화고분
  • 형태사항
    가로: 16m, 세로: 16m, 높이: 6m  , 석실 
출토지
집안시 하해방(集安市 下解放)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63집안현문물보관소
(集安縣文物保管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발견 당시 묘문은 이미 열려져 있었고, 안에 벽화가 있었다고 함. 묘 입구를 폐쇄함.
1966길림성박물관집안고고대, 집안현문물보관소
(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 集安縣文物保管所)
徐漢煊, 李殿福, 方起東, 段一平에 의해 통구고분군에 대한 대대적인 실측조사때, 하해방묘구 0031호묘라고 편호. 6월 12일에는 方起東이 실측하고 기록.
1983집안문물보사대
(集安文物普査隊)
1983년 10월 재검사.
1997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박물관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재실측.
구조특징
봉토석실벽화묘
봉분은 절두방추형임. 봉토는 황색 점사토임. 무덤 방향은 동으로 25˚기운 남향임. 석실을 축조하는데 사용한 돌은 모두 가공을 거쳐서 가지런한데, 석질은 현지에서 나오는 석회암 계통임. 묘의 구조는 봉토 외에 묘도, 전실, 연도, 묘실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구조는 정연함. 전실과 묘실에는 각각 천정이 축조. 묘도와 연도 모두 중축선상에 있어, 중축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
묘도는 대체로 3단계로 나눌 수 있음. 첫 번째 단계는 가장 북단에 위치한 부분으로 길이는 0.68m, 너비는 1.1m 임. 벽면은 약간 안으로 기울어져 있고, 그 위에 개정석이 있으며, 높이는 1.4m 임. 두 번째 단계는 가운데부분에 위치하고 있고, 길이는 0.53m 임. 북쪽 끝과 제1단과 서로 연접된 곳의 너비는 동서로 1.26m 넓고, 바깥으로 갈수록 양측은 확장됨. 그 위로 개정석이 있음. 높이는 1.78m 임. 세 번째 단계는 남쪽 끝으로, 길이는 1.17m 임. 바깥입구에서 1.44m에 이르기까지 양측 돌은 계단형태로 쌓았고, 개정석은 없음. 묘도 좌우에 당토장을 쌓았는데, 挡土墻은 내단이 약간 높고, 외단은 낮고 평평함.
전실의 네 벽은 약간 안으로 기울여져 있는데, 위로 갈수록 안으로 들여지는 정도가 심해짐. 높이는 1.4m 임(연도와 묘도의 개정석 높이와 정확히 부합). 천정의 축조방법을 보면, 남북 양면 정 가운데 꼭대기 가까운 지점에 각각 하나의 작은 替石이 뻗어 나왔고, 替石 위로 石枋을 받치고 있으며, 石枋에는 천정꼭대기 부분이 동서 둘로 나누어 각각의 천정석을 덮음. 전체적으로 꺾음식임. 천정석에서 지면까지의 높이는 2.2m 임.
연도는 연도 남쪽 끝과 전실 북벽이 연접된 두 개의 벽 모서리돌을 절척형으로 오목하게 파냄. 그 윗부분의 개석은 연도 개석보다 0.24m 높음. 연도 남쪽 끝의 윗부분과 좌우 양면에 凹槽가 형성되어 있는데, 원래는 목질의 문미와 문틀을 설치했던 부위로 보임. 연도의 벽면은 약간 안으로 기울어졌고, 판석으로 천정을 덮었음.
묘실 네벽 상부는 안으로 기울어져 있음. 네 벽 위에 축조된 천정은 먼저 3층평행고임으로 제작하고, 그 위에 다시 2층으로 커다란 말각석을 올린 다음, 마지막으로 천정석을 꼭대기에 올림. 네 벽의 높이는 2.08m이고, 천정부분을 더하면 묘실 높이는 3.46m 임.
벽화의 경우, 묘도 이내의 전실, 연도, 묘실 지면·벽면·꼭대기면 모두 백회가 발라져 있고, 백회 위에 벽화가 그려져 있음. 발견되었을 당시에 회껍질은 벗겨져서 거의 남아 있지 않음. 벽화 흔적은 남은 것이 거의 없음. 벽화는 묘실에만 남아 있음. 묘실 네 벽 곳곳에 연꽃무늬가 남아 있고, 천장고임에 새, 달, 별자리, 연꽃, 보주화염문 등이 남아 있음. 동벽 북부 상단에 인접한 천정고임부분에 묵선으로 그려진 보주화염문이 있음. 보주염화문은 고구려고분벽화에서 일찍이 볼 수 있는 것임. 천정아래 삼층평행고임부 측면에서는 모두 연화문을 볼 수 있는데, 모두 삼판을 그린 후에 양판이 덧대어짐. 일부는 주로 홍색, 일부는 주로 흑색이 나타나는데, 서로 사이에 두고 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 현재 서벽 남쪽 모서리의 제1층에서 한 송이를 볼 수 있고, 제2층에서도 한 송이를 볼 수 있음. 남벽 제2층에서도 한 송이를 볼 수 있음. 북벽 제2층 동쪽 끝과 서쪽 끝에서 각각 한 송이를 볼 수 있고, 제3층에서는 세 송이를 볼 수 있음.
천정 윗부분 2층 말각고임석 위, 서북모서리 1층 말각석 아래측에 별상이 그려서 있음. 별(星辰)은 흑선으로 원모양으로 그렸는데, 6顆이 분포되어 있음. 일부 별 사이에는 쌍선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별자리로 보이기도 함. 북면 제2층 말각석 측면에 회색 원형과 그 중간에 흑색도상이 있음. 어떤 것을 표현한 건지는 판단할 수 없으나, 둥근 달과 두꺼비로 추정됨(그림4-5). 그 동쪽에는 회백색의 새가 있음.
내부규모 및 특징
1984년 보고서에서 주변길이 60m, 높이 약 6m, 묘방향 남동쪽 30°.
1997년(2002년 보고서)에 변 길이 16m, 높이 5m. 묘방향 남동쪽 25°.
2002년 보고서에서 주변 길이 50여m, 높이 약 6m. 묘의 방향은 남동쪽 30°.
묘도는 전실 남벽 정가운데에 나 있고, 전체 길이 2.38m.
전실은 묘실보다 규모가 작고, 약간 횡장방형으로 축조. 깊이 2.15m, 너비 2.74m.
연도는 묘실과 전실 사이의 연도는 묘실 남벽 정가운데에 나 있는데, 길이 0.84m, 너비 1m, 높이 1.36m.
묘실은 정방형으로, 매변 길이 3.6~3.8m.
역사적 의미
方起東·劉萱堂(2002년)은, 집안에서 발견된 벽화묘는 29기(현재는 모두 36기)인데, 발견 및 정리시기에 따라, 대체로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음. 제1단계는 1900년대 초기~30년대에 해당하는데, 모두 9기가 발견·정리되었음. 그 가운데 삼실묘, 각저묘, 무용묘, 사신묘, 환문묘, 모두루묘 등이 보존이 비교적 양호. 산연화묘는 발견 초에는 양호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파괴됨. 귀갑묘와 미인묘는 파괴가 심하였음. 제2단계는 1960년대에 해당하는데, 모두 8기가 발견·정리되었음. 그 가운데 오회분 4호묘와 5호묘는 비교적 보존이 양호. 통구 12호묘(마조총), 산성하 332호묘, 산성하 982호묘, 만보정 1368호묘는 일정 정도 파괴되었음. 마선구 1호묘는 꼭대기에 구멍이 있었다가, 이후에 허물어져 없어짐. 하해방 31호묘는 바로 이 단계에 발견되고 기록된 벽화묘임. 제3단계는 1970~1990년대에 해당하는데, 모두 12기가 확인됨. 그 가운데 장천 1호묘와 장천 2호묘는 보존이 비교적 양호하고, 우산하 1041호묘는 벽화박락이 너무 심하여, 일부분만 남아 있음. 산성하 365호묘, 절천정묘, 장천 4호묘, 만보정 645호묘, 산성하 1305호묘, 산성하 1405호묘, 산성하 1407호묘, 산성하 798호묘, 우산하 3319호묘 등 다른 9기의 묘의 벽면도 박락이 너무 심하여 벽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음.
魏存成(1994년)은 귀갑묘, 산연화묘, 장천 1호묘, 장천 4호묘, 모두루묘, 환문묘, 삼실묘와 더불어 5세기 말~6세기 초로 추정.
方起東·劉萱堂(2002년) : 집안에서 발견된 벽화묘의 연대 및 분기와 관련하여, 4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음. 제1기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단실묘이고 연도 양측에 이실이 축조되어 있다는 구조를 들 수 있음. 묘실은 궁륭식과 사아식, 혹은 여러 층의 고임 및 네 모서리에 간혹 작은 말각석이 더해진 천정을 갖추고 있음. 그리고 묘방향은 서쪽을 향하고 있음. 벽화의 내용으로는 묘주인의 생전생활이나, 연화 혹은 王자 문양으로 조성된 문양 등을 그렸음. 묘실 네 모서리에는 나무구조물을 그려 넣었고, 능형문양 혹은 螭문양을 그리기도 하였으며, 천정부분에는 주로 연화와 云紋을 그렸음. 이 시기의 전형적인 벽화묘로는 마선구 1호묘, 통구 12호묘, 산성하 332호묘, 장천 1호묘 등이 있음. 축조시기는 4세기 중엽~말엽으로 추정. 한편 비교적 특수한 벽화묘로는 우산하 3319호묘와 절천정묘를 들 수 있음. 우산하 3319호묘는 계단적석석실묘로, 묘실은 방형이고, 천정은 궁륭식으로 추정되며, 묘도는 서향이고, 좌우에 이실을 갖추고 있음. 묘실서벽 모서리에 있는 벽돌에는 백회가 발라져 있고, 그 위로 홍갈색 안료가 있는 것으로 보아, 벽화임을 알 수 있음. 절천정묘는 1983년과 1985년에 정리조사 시, 많은 벽화잔편이 발견됨. 이 두 묘장 모두 벽화는 없어졌지만, 평면구조는 제1기에 속하는 묘장과 거의 같음. 이 외에 만보정 645호묘, 산성하 1305호묘, 산성하 1407호묘 모두 이 유형에 속하므로, 이 묘장 역시 제1기에 속함. 우산하 1041호묘는 비록 평면구조가 다른 묘장과 같지 않지만, 벽화내용의 배치가 통구12호묘와 거의 유사하고, 출토된 철제목심등자가 조양 원대자묘에서 출토된 등자와 유사하므로, 제1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음. 제2기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묘방향은 서향임. 그리고 단실묘에 연도로 이어진 전반실을 갖추고 있는 구조가 주를 이루는데, 전반실은 두 개의 이실천정이 서로 연결되어 통한 결과임. 전반실 꼭대기부분은 횡장복두식이고, 묘실 꼭대기부분은 궁륭식 혹은 여러 층의 말각고임으로, 간혹 작은 말각이 더해진 천정을 이루고 있음. 벽화내용은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첫 번째는 묘주인의 생전생활을 주로 그렸지만, 천정에 일월성진, 신선과 사신이 출현하기 시작한 내용으로, 다만 사신은 완전하지는 않음. 다른 한 유형은 아직 문양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배치가 더욱 정연한 모습을 보이고 있음. 이 시기의 묘장에는 각저묘, 무용묘, 산연화묘 등이 있고, 축조연대는 4세기 말~5세기 초엽으로 추정. 제3기는 일부 단실과 삼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쌍실묘가 주를 이룸. 묘꼭대기부분은 여러 층의 평행 고임과 覆斗式이 나타나는데, 말각고임의 간격(跨度)이 더욱 커짐. 묘방향은 대부분 서향임. 벽화내용은 묘주인의 생전생활장면과 장식무늬 두 유형이 주를 이루는데, 조성된 도안의 단독모양이 더욱 커짐. 이 시기의 사신 그림은 더욱 완전해지고, 점차 돌출되며, 신선과 불교주제의 그림이 더욱 증가함. 이 시기의 묘장에는 장천 1호묘, 삼실묘, 환문묘, 모두루묘, 귀갑묘 등이 있고, 축조연대는 5세기 중엽~6세기 초로 추정. 만보정 1368호묘의 벽화에서는 흑색으로 그린 나무기둥대들보를 볼 수 있음. 그 柱頭雀替양식은 장천 1호묘와 삼실묘 중의 柱頭雀替과 비슷하고, 평면은 고구려만기에 보이는 刀形구조에 속하므로, 연대는 그리 이르지 않고, 대체로 이 시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음. 제4기는 구조가 방형단실인데, 중원 북조 후기의 묘제와 같음. 묘실은 가지런하게 다듬은 대형 석조로 축조함. 묘실 꼭대기부분은 매우 간결한 큰 跨度의 말각고임식임. 묘방향은 서향임. 벽화는 백회 위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가지런하게 다듬은 석벽 위에 직접 그렸음. 내용은 사신이 주체가 되어 네벽을 차지하고, 네 모서리와 천정에는 괴수, 盤龍, 일월신, 기악신선, 일월성진 등으로 가득 채웠음. 그려진 인물들은 대부분 높은 관을 쓰고, 큰 신발을 신었으며, 소매가 큰 옷과 넓은 띠를 갖추고 있는데, 남조대 인물의 풍조가 나타남. 이 기에 해당하는 묘장에는 사신묘, 오회분 4호묘와 5호묘가 있음. 그 축조연대는 6세기~7세기 초로 추정됨. 산성하 365호묘에서는 연대가 비교적 늦은 반구장경병이 출토되어, 연대가 더 늦을 수도 있는데, 일부 학자는 발해시기로 추정하기도 함. 하해방 31호묘의 평면은 짧은 연도를 갖추고 있는 쌍실묘구조로, 제3기 벽화묘임이 분명함. 다만 일반적으로 짧은 연도를 갖추고 있는 쌍실묘는 전·후 양실의 면적이 대체로 같은 반면에, 하해방 31호묘의 전실은 묘실과 비교해 보면 면적이 작음. 이는 전실의 기능과 작용이 점차 약해지는 것을 의미함. 더욱이 묘실축조에 사용된 석재는 가지런하게 가공한 석조를 사용하였는데, 가지런한 큰 석조로 묘실을 만들었던 제4기 벽화묘와 비교적 가까움. 그리고 묘향은 남향임. 이로 볼 때, 하해방 31호묘는 제3기 가운데에서도 늦은 벽화묘로 추정되고, 장천 1호묘와 삼실묘보다 약간 늦는다고 할 수 있음. 즉 3기의 축조연대로 추정되는 5세기 중엽~6세기초엽에서 후기로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음.
孫仁杰·遲勇(2007년)은 하해방 31호묘의 축조기술이 독창성을 갖추고 있음. 석회암의 취약·풍화·부서짐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替石이 여기에 미치는 압력을 분담하여 견고하게 하고, 게다가 단석으로 하여금 걸쳐있는 跨度를 지키도록 함. 이러한 축조기술은 고구려인들의 높은 지혜와 끊이지 않고 향상시켰던 석조건축수준을 보여준다고 함. 하해방 31호묘의 구조와 벽화의 내용을 분석해 볼 때, 산성하 0983호묘(연화묘)와 축조시기가 멀지 않으므로, 5세기 즈음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
자연환경
하해방묘구 중부에 위치. 下解放은 원래명칭이 下羊魚頭로, 압록강 중류 우안의 작은 분지임. 서쪽으로 약 7㎞ 떨어진 지점에 집안시구가 있음. 남쪽으로는 강 건너 북한 만포가 보임. 하해방은 강을 끼고 있는 넓은 평지로, 지금은 경작지임. 북쪽은 용산에 기대어 있는 평평하고 완만한 산구릉인데, 산구릉의 경사도는 크지 않음. 또한 농지를 개간하고 새로 길을 내어 평지와 비탈사이를 적절히 이어줌. 하해방촌 동북 200여m의 산구릉과 평지에는 고분들이 집중분포하고 있음. 1966년 통구고분군에 대한 실측조사때, ‘하해방묘구’라고 부름. 1962년에는 약 50여기가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30기가 남아 있음. 묘구 가운데부분 산허리에서 산기슭에 이르기까지, 일렬로 배열된 대형봉토묘가 주목되는데, 하해방 31호묘는 배열된 무덤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
동남쪽으로 약 40m 떨어진 산구릉에 환문묘가 있음. 서남쪽으로 약 100m 떨어진 평지에 모두루묘가 있음.
참고문헌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魏存成,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方起東·劉萱堂, 「集安下解放第31號高句麗壁畵墓」『北方文物』 2002-3, 2002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吳廣孝, 『集安高句麗壁畵』, 山東畵報出版社, 2006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耿鐵華, 『高句麗古墓壁畵硏究』, 吉林大學出版社, 2008
· 전호태, 「고구려 집안권 벽화고분의 현황과 과제」『蔚山史學』 14, 蔚山大學校史學會,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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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해방 0031호묘(下解放 0031號墓) 자료번호 : ku.d_0001_0040_0030_26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