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자 유적 (東臺(擡)子 建築遺址)
출토지
집안시가지 동쪽 승리 시멘트공장의 북쪽 (集安市 東側 勝利 水泥製品廠 北側)
연대
392년(고국양왕 9)에 수리했다는 왕실의 종묘와 사직으로 추정하는 견해(方起東), 고구려 말기로 보는 견해(關野貞) 등이 있음.]
구조특징
동대자 건축 유적은 둘레에 회랑을 돌린 가옥으로 正屋(Ⅰ실과 Ⅱ실로 구성됨)과 偏房(Ⅲ실과 Ⅳ실로 구성됨)으로 구성되어 있음. 정실 두 칸의 중간에는 남북으로 길고 좁은 통로가 있고, 처마 돌출 부분의 支柱에 잇대어 복도가 나 있음. 正屋의 면적은 동서 길이 35m, 남북 폭 36m임.Ⅲ실과 Ⅳ실은 모두 正屋과 연결되어 있거나 부속관계가 있음. 정옥의 회랑과 偏房의 복도는 서로 이어져 통함.
正屋Ⅰ실(東室) 正屋 동쪽 칸에 위치. 동서 길이 15m, 남북 폭 11m. 평면은 장방형이며, 보존이 가장 잘되어 있음. 건물의 기초부는 강돌과 황토로 깔아 견고하게 다짐. 기초부의 폭은 1.5-2m, 깊이는 0.3-0.5m임. 기초부 윗면에 초석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음. 초석은 판상 모양의 석괴로서 修飾을 가하지는 않음. 그 중에 몇 개는 약간 가공을 하였으나 가공 정도는 거침. 건물 바깥의 회랑에는 기초부없이 초석 아랫면에만 강돌을 2-3층으로 둥글게 깔아 초석을 안정시킴. 옥내의 초석은 평평한 돌을 대충 다듬어 사용했으나, 회랑의 초석은 아주 정밀하게 다듬음. Ⅰ실의 중앙에 길이 0.8m. 폭 0.6m 높이 0.1m의 장방형 石座가 있는데, 석좌의 윗면은 실내 지면에서 0.6m 높이이고, 건물 지하로로 0.4m 묻혀있음. 석좌의 윗면 중앙에는 동서방향으로 4개의 장방형 홈이 파여있는데 홈 길이는 9㎝, 폭 4㎝, 깊이 8㎝. 석좌의 서측과 남측에도 파여진 흔적이 남아있음. 석좌 주위의 토층은 이미 파괴되었음. 제반 상황으로 보아 석좌는 파괴된 거석의 일부이고, 윗면의 장방형 홈은 후대인에 소행임을 추정할 수 있음. 석좌가 노출된 실내 지면의 하부 주위에는 냇돌이 깔려있고, 일직선으로 석좌의 기초부까지 묻혀있어 석좌를 고정시켜 줌. 석좌의 본체 주위에 깔려있는 냇돌층의 면적은 4㎡로, 실내 면적의 1/5을 차지하고 있음. 석좌 주위에 깔려있는 냇돌이 지면보다 높아 실내 중앙에 기초가 둥근 방주형의 석좌를 조성해줌. 실내 동벽의 南端 부근에서 아궁이터 발견. 매우 두터운 재흙와 불에 탄 흙덩이가 있으며, 재흙에는 탄덩이(炭塊)가 대량으로 섞여 있음. 그 부근에서 출토된 유물로 토기편과 쇠솥편이 있고, 아궁이터 최하단에서 냇돌과 기와편이 발견되었음. 기와편은 그을리고 불탄 흔적이 있음. 재흙의 면적과 두께로 보아 이 아궁이는 크지 않으며, 아궁이 입구는 원래 지면보다 낮았을 것으로 추정됨. 아궁이와 연결된 南面에 장방형의 재구덩이가 있고, 그 南端은 남벽의 기초 아래와 연결됨. 깊이는 0.6m, 폭은 약 2m. 안에서는 기와편과 재찌꺼기가 소량 있었고, 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음. 이 재구덩이로 보아 아궁이 앞면은 본래 움푹 패인 공터로 추정됨. 아궁이 北面은 烟道와 연결됨. 연도는 동벽과 북벽의 기초부를 따라 이어지다가 북벽의 西端에서 돌아 나감. 연도의 전체 길이는 22m, 폭 0.7, 높이 0.25m. 연도의 양 벽 아랫면에는 각각 냇돌을 한층 깔았고, 냇돌의 윗면에는 크고 작은 기와편을 층층이 쌓았는데, 기와의 안쪽면은 아래쪽을 향하도록 가지런히 쌓았음. 연도의 바닥에도 와편을 깔았는데, 안쪽면이 아래를 향하도록 가지런히 깔았음. 연도 윗면에는 石板을 덮었는데 실내 연도 윗면의 석판은 비교적 얇아 두께 약 2-3㎝이며, 실외의 연도 윗면에는 두께 5-10㎝인 석판을 덮었는데, 석판은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이 잘 맞추어 덮었음. 연도 안에는 검은 그을음이 묻은 재흙이 있는데, 색깔이 비교적 엷은 것으로 보아 연도의 사용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임. 연도 바닥은 실내에서 시작해 실외에 이를 때까지 점점 경사가 낮아지지만 차이가 크지는 않음. 연도 끝에는 직경 1m의 원형 연통(굴뚝)이 있음. 연통의 바닥에는 냇돌을 깔았고, 연도벽은 기와편으로 쌓았는데, 발굴 당시 2-3층, 높이 약 0.5m 정도가 보존되어 있었음. 연통의 앞면과 좌우에는 냇돌과 황토로 쌓은 벽이 있는데, 좌우 양면은 이미 무너졌으나 앞면은 잘 보존되어 있었음. 길이 2.3m, 폭 0.5, 높이 0.4m로서 연통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됨. 실외 연도 양측과 기초 부근에 1단의 석괴열이 있는데, 석괴는 대체로 삼각형 모양임. 평평한 면이 바깥을 향하도록 가지런하게 쌓았음. 東室에서 발견된 연도는 일종의 난방 설비임. 동실의 남벽을 따라 놓은 기초는 동, 서, 북 3벽면의 기초보다 적은데, 이는 남벽 정중앙이나 좌우 각각 문을 설치했을 가능성을 시사함. 동실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연통(굴뚝) 서측의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발견되었음. 모두 대형 토기편으로 실내에서는 철제 솥의 잔편이 발견되었음. 와당은 대부분 처마 아래의 초석 부근에서 발견되었음.
正屋 Ⅱ실(西室)은 正屋의 西間이며 동서 길이 15m, 남북 폭 14m임. 평면은 방형에 가깝고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음. 4벽 기초 아래에 정교하게 다듬은 초석이 분포되어 있는데 대체로 네모난 모양에 기둥자리(柱坐)는 원형임. 초석 하부에는 냇돌을 2-3층 둥글게 깔아서 다진 적심부가 있는데, 초석의 함몰을 방지하기 위한 기초임. 초석의 간격은 1-2m로 초석 사이에 기초를 조영하지는 않음. 서벽과 남벽의 초석은 대부분 후대인에 의해 옮겨져서 초석 아래에 깔았던 냇돌만 남아 있음. Ⅱ실(西室)의 남벽 外面에 동실 남벽 외면과 서로 평행하는 회랑이 있었을 것임. 다만 서실의 남벽 外側이 파괴되어 원래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음. 북벽에 커다란 구들이 있음. 3개의 구들벽이 2개의 구들을 형성함. 구들 사이의 간격은 0.25m, 구들의 폭 0.3m, 깊이 0.2m. 구들에는 아주 두터운 재흙이 있고, 아궁이 부근의 구들에는 목탄 부스러기가 있음. 기와편을 이용해 구들벽을 쌓아올렸고 구들 바닥에는 두께 0.3-0.5m의 판석을 깔았는데 대부분 파괴됨. 구들 면적은 길이 11m, 폭 2m. 구들은 실내 지면보다 약간 높지만 실외지면보다는 낮거나 평행함.
-재흙더미의 출토 유물 : 구들 南端에서 두께 0.3m의 재흙더미를 발견. 그 속에서 붉은색의 불탄 흙덩이, 토기편, 깨진 쇠솥조각 등이 포함. 최하단에는 냇돌이 있었는데 아마 구들의 아궁이로 추정됨. 구들 西端의 북쪽 치우친 곳에서 석괴로 축조한 3열의 구들벽과 구들을 발견. 구들벽의 잔존 높이는 0.25-0.3m, 구들 간격은 0.15-0.2m. 구들은 동서방향으로 바닥에 두께가 일정하지 않은 그을음이 낀 재흙 퇴적층이 있음. 구들 면적은 동서길이 3m, 남북 폭 2m. 炕面의 높이는 앞의 것과 같음. 이 구들은 남쪽의 구들과 서로 연결되어 통하는데, 통하는 곳의 南面에 아궁이가 하나 있음. 아궁이는 솥바닥 모양의 원형 구덩이로서 깊이 0.25m, 직경 1m임. 아궁이 윗면에는 매우 불규칙한 석괴가 놓여져 있고, 윗면과 그 주위에는 재흙더미가 있음. 아궁이 모양은 이미 흐트러졌고, 아궁이의 西端은 연도와 서로 연결됨. 연도는 남북방향으로 양벽은 잔돌덩이(碎石塊)를 사용해서 쌓았는데 길이 6, 폭 0.8m. 높이는 석괴의 유실로 인해 자세히 알 수 없음. 연도의 끝에 원형의 연통(굴뚝)이 있는데, 벽의 기초부는 석괴로 쌓아올렸고, 기초부 주위에는 부서진 삼각형의 석괴가 둘러져 있음. 연통의 직경 1m, 기초벽의 잔고 0.25m. 실내 중앙의 서남쪽에 정교하게 다듬은 초석 1개가 있는데, 기둥자리는 2단으로 다듬은 원형이며, 초석 몸체는 두께가 육중하며, 아랫면에 냇돌을 깔았음. 아궁이 부근에 토기편이 있고, 구들 주변과 그 내부에 쇠못과 쇠편이 있었으며, 두 구들의 연결 부분 北面에서 절구 1건, 철촉, 토제 가락바퀴, 四足帶孔陶器 1건 등 출토됨.
偏房 Ⅲ실은 正屋 Ⅱ실의 북쪽 6m되는 곳(서북 모퉁이)에 위치함. 평면은 대략 方形으로 남북 2室로 나누어져 있으며 南室은 길이가 길고 좁으며, 북실은 비교적 탁 트이고 폭이 넓음. 북벽, 동벽, 서벽은 모두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고, 남벽의 기초만 보존이 잘 되어 있음. 길이 약 11m임. 초석은 모두 판석 모양의 석괴를 가져다가 가지런히 배열했으나 아주 세밀하지는 않음. 기초의 외측에 석괴를 한층을 놓았고, 석괴는 대체로 삼각형으로 머리를 밖으로 향하게 가지런히 쌓았는데 미관상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임. 그것이 놓인 위치도 正屋과 같은 모양으로 처마 아래에 있는데, 외관상 그다지 보기좋은 모양은 아니며, 처마 밑으로 비가 들이쳐 기저부의 흙을 침식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됨.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이 철기(鐵器)이고, 토기편이 소량 발견됨.
偏房 Ⅳ실은 正屋Ⅰ실의 동남 모퉁이에 위치. 동, 남 서 3면의 기초는 심하게 훼손되었음. 북벽의 기초 東段도 잘려져 나갔으며 북벽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함. 기초부 내외면은 모두 가지런한 석괴를 이용해 잘 쌓았는데, 바닥은 평평하게 하고, 그 위에는 비교적 큰 석괴를 한층 깔았음. 그런 다음 냇돌을 홈에 넣고 그 사이에 황토를 바르고, 다시 반복해 견고한 기초를 만들었음. 기초부의 폭 2.5m, 깊이 1m. 북벽 기초에는 남으로 경사져 함몰한 부분이 있음. 함몰한 곳의 외측에 길이 1.8m, 폭 1.4m, 깊이 0.8m의 재구덩이가 있고, 재구덩이 양측 벽의 기울기는 기초부의 기울기와 거의 비슷함. 재구덩이 안의 재흙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기와편이 많음. 이 곳의 기초부는 재구덩이 부근에 있어서 벽체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구덩이 쪽으로 함몰된 것으로 추정됨. 토기편, 철제 솥편, 철촉 등이 출토됨.
正屋Ⅰ실(東室) 正屋 동쪽 칸에 위치. 동서 길이 15m, 남북 폭 11m. 평면은 장방형이며, 보존이 가장 잘되어 있음. 건물의 기초부는 강돌과 황토로 깔아 견고하게 다짐. 기초부의 폭은 1.5-2m, 깊이는 0.3-0.5m임. 기초부 윗면에 초석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음. 초석은 판상 모양의 석괴로서 修飾을 가하지는 않음. 그 중에 몇 개는 약간 가공을 하였으나 가공 정도는 거침. 건물 바깥의 회랑에는 기초부없이 초석 아랫면에만 강돌을 2-3층으로 둥글게 깔아 초석을 안정시킴. 옥내의 초석은 평평한 돌을 대충 다듬어 사용했으나, 회랑의 초석은 아주 정밀하게 다듬음. Ⅰ실의 중앙에 길이 0.8m. 폭 0.6m 높이 0.1m의 장방형 石座가 있는데, 석좌의 윗면은 실내 지면에서 0.6m 높이이고, 건물 지하로로 0.4m 묻혀있음. 석좌의 윗면 중앙에는 동서방향으로 4개의 장방형 홈이 파여있는데 홈 길이는 9㎝, 폭 4㎝, 깊이 8㎝. 석좌의 서측과 남측에도 파여진 흔적이 남아있음. 석좌 주위의 토층은 이미 파괴되었음. 제반 상황으로 보아 석좌는 파괴된 거석의 일부이고, 윗면의 장방형 홈은 후대인에 소행임을 추정할 수 있음. 석좌가 노출된 실내 지면의 하부 주위에는 냇돌이 깔려있고, 일직선으로 석좌의 기초부까지 묻혀있어 석좌를 고정시켜 줌. 석좌의 본체 주위에 깔려있는 냇돌층의 면적은 4㎡로, 실내 면적의 1/5을 차지하고 있음. 석좌 주위에 깔려있는 냇돌이 지면보다 높아 실내 중앙에 기초가 둥근 방주형의 석좌를 조성해줌. 실내 동벽의 南端 부근에서 아궁이터 발견. 매우 두터운 재흙와 불에 탄 흙덩이가 있으며, 재흙에는 탄덩이(炭塊)가 대량으로 섞여 있음. 그 부근에서 출토된 유물로 토기편과 쇠솥편이 있고, 아궁이터 최하단에서 냇돌과 기와편이 발견되었음. 기와편은 그을리고 불탄 흔적이 있음. 재흙의 면적과 두께로 보아 이 아궁이는 크지 않으며, 아궁이 입구는 원래 지면보다 낮았을 것으로 추정됨. 아궁이와 연결된 南面에 장방형의 재구덩이가 있고, 그 南端은 남벽의 기초 아래와 연결됨. 깊이는 0.6m, 폭은 약 2m. 안에서는 기와편과 재찌꺼기가 소량 있었고, 다른 유물은 발견되지 않음. 이 재구덩이로 보아 아궁이 앞면은 본래 움푹 패인 공터로 추정됨. 아궁이 北面은 烟道와 연결됨. 연도는 동벽과 북벽의 기초부를 따라 이어지다가 북벽의 西端에서 돌아 나감. 연도의 전체 길이는 22m, 폭 0.7, 높이 0.25m. 연도의 양 벽 아랫면에는 각각 냇돌을 한층 깔았고, 냇돌의 윗면에는 크고 작은 기와편을 층층이 쌓았는데, 기와의 안쪽면은 아래쪽을 향하도록 가지런히 쌓았음. 연도의 바닥에도 와편을 깔았는데, 안쪽면이 아래를 향하도록 가지런히 깔았음. 연도 윗면에는 石板을 덮었는데 실내 연도 윗면의 석판은 비교적 얇아 두께 약 2-3㎝이며, 실외의 연도 윗면에는 두께 5-10㎝인 석판을 덮었는데, 석판은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이 잘 맞추어 덮었음. 연도 안에는 검은 그을음이 묻은 재흙이 있는데, 색깔이 비교적 엷은 것으로 보아 연도의 사용기간이 그다지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임. 연도 바닥은 실내에서 시작해 실외에 이를 때까지 점점 경사가 낮아지지만 차이가 크지는 않음. 연도 끝에는 직경 1m의 원형 연통(굴뚝)이 있음. 연통의 바닥에는 냇돌을 깔았고, 연도벽은 기와편으로 쌓았는데, 발굴 당시 2-3층, 높이 약 0.5m 정도가 보존되어 있었음. 연통의 앞면과 좌우에는 냇돌과 황토로 쌓은 벽이 있는데, 좌우 양면은 이미 무너졌으나 앞면은 잘 보존되어 있었음. 길이 2.3m, 폭 0.5, 높이 0.4m로서 연통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됨. 실외 연도 양측과 기초 부근에 1단의 석괴열이 있는데, 석괴는 대체로 삼각형 모양임. 평평한 면이 바깥을 향하도록 가지런하게 쌓았음. 東室에서 발견된 연도는 일종의 난방 설비임. 동실의 남벽을 따라 놓은 기초는 동, 서, 북 3벽면의 기초보다 적은데, 이는 남벽 정중앙이나 좌우 각각 문을 설치했을 가능성을 시사함. 동실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연통(굴뚝) 서측의 약간 남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발견되었음. 모두 대형 토기편으로 실내에서는 철제 솥의 잔편이 발견되었음. 와당은 대부분 처마 아래의 초석 부근에서 발견되었음.
正屋 Ⅱ실(西室)은 正屋의 西間이며 동서 길이 15m, 남북 폭 14m임. 평면은 방형에 가깝고 보존 상태가 비교적 좋음. 4벽 기초 아래에 정교하게 다듬은 초석이 분포되어 있는데 대체로 네모난 모양에 기둥자리(柱坐)는 원형임. 초석 하부에는 냇돌을 2-3층 둥글게 깔아서 다진 적심부가 있는데, 초석의 함몰을 방지하기 위한 기초임. 초석의 간격은 1-2m로 초석 사이에 기초를 조영하지는 않음. 서벽과 남벽의 초석은 대부분 후대인에 의해 옮겨져서 초석 아래에 깔았던 냇돌만 남아 있음. Ⅱ실(西室)의 남벽 外面에 동실 남벽 외면과 서로 평행하는 회랑이 있었을 것임. 다만 서실의 남벽 外側이 파괴되어 원래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음. 북벽에 커다란 구들이 있음. 3개의 구들벽이 2개의 구들을 형성함. 구들 사이의 간격은 0.25m, 구들의 폭 0.3m, 깊이 0.2m. 구들에는 아주 두터운 재흙이 있고, 아궁이 부근의 구들에는 목탄 부스러기가 있음. 기와편을 이용해 구들벽을 쌓아올렸고 구들 바닥에는 두께 0.3-0.5m의 판석을 깔았는데 대부분 파괴됨. 구들 면적은 길이 11m, 폭 2m. 구들은 실내 지면보다 약간 높지만 실외지면보다는 낮거나 평행함.
-재흙더미의 출토 유물 : 구들 南端에서 두께 0.3m의 재흙더미를 발견. 그 속에서 붉은색의 불탄 흙덩이, 토기편, 깨진 쇠솥조각 등이 포함. 최하단에는 냇돌이 있었는데 아마 구들의 아궁이로 추정됨. 구들 西端의 북쪽 치우친 곳에서 석괴로 축조한 3열의 구들벽과 구들을 발견. 구들벽의 잔존 높이는 0.25-0.3m, 구들 간격은 0.15-0.2m. 구들은 동서방향으로 바닥에 두께가 일정하지 않은 그을음이 낀 재흙 퇴적층이 있음. 구들 면적은 동서길이 3m, 남북 폭 2m. 炕面의 높이는 앞의 것과 같음. 이 구들은 남쪽의 구들과 서로 연결되어 통하는데, 통하는 곳의 南面에 아궁이가 하나 있음. 아궁이는 솥바닥 모양의 원형 구덩이로서 깊이 0.25m, 직경 1m임. 아궁이 윗면에는 매우 불규칙한 석괴가 놓여져 있고, 윗면과 그 주위에는 재흙더미가 있음. 아궁이 모양은 이미 흐트러졌고, 아궁이의 西端은 연도와 서로 연결됨. 연도는 남북방향으로 양벽은 잔돌덩이(碎石塊)를 사용해서 쌓았는데 길이 6, 폭 0.8m. 높이는 석괴의 유실로 인해 자세히 알 수 없음. 연도의 끝에 원형의 연통(굴뚝)이 있는데, 벽의 기초부는 석괴로 쌓아올렸고, 기초부 주위에는 부서진 삼각형의 석괴가 둘러져 있음. 연통의 직경 1m, 기초벽의 잔고 0.25m. 실내 중앙의 서남쪽에 정교하게 다듬은 초석 1개가 있는데, 기둥자리는 2단으로 다듬은 원형이며, 초석 몸체는 두께가 육중하며, 아랫면에 냇돌을 깔았음. 아궁이 부근에 토기편이 있고, 구들 주변과 그 내부에 쇠못과 쇠편이 있었으며, 두 구들의 연결 부분 北面에서 절구 1건, 철촉, 토제 가락바퀴, 四足帶孔陶器 1건 등 출토됨.
偏房 Ⅲ실은 正屋 Ⅱ실의 북쪽 6m되는 곳(서북 모퉁이)에 위치함. 평면은 대략 方形으로 남북 2室로 나누어져 있으며 南室은 길이가 길고 좁으며, 북실은 비교적 탁 트이고 폭이 넓음. 북벽, 동벽, 서벽은 모두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고, 남벽의 기초만 보존이 잘 되어 있음. 길이 약 11m임. 초석은 모두 판석 모양의 석괴를 가져다가 가지런히 배열했으나 아주 세밀하지는 않음. 기초의 외측에 석괴를 한층을 놓았고, 석괴는 대체로 삼각형으로 머리를 밖으로 향하게 가지런히 쌓았는데 미관상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임. 그것이 놓인 위치도 正屋과 같은 모양으로 처마 아래에 있는데, 외관상 그다지 보기좋은 모양은 아니며, 처마 밑으로 비가 들이쳐 기저부의 흙을 침식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됨.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이 철기(鐵器)이고, 토기편이 소량 발견됨.
偏房 Ⅳ실은 正屋Ⅰ실의 동남 모퉁이에 위치. 동, 남 서 3면의 기초는 심하게 훼손되었음. 북벽의 기초 東段도 잘려져 나갔으며 북벽의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함. 기초부 내외면은 모두 가지런한 석괴를 이용해 잘 쌓았는데, 바닥은 평평하게 하고, 그 위에는 비교적 큰 석괴를 한층 깔았음. 그런 다음 냇돌을 홈에 넣고 그 사이에 황토를 바르고, 다시 반복해 견고한 기초를 만들었음. 기초부의 폭 2.5m, 깊이 1m. 북벽 기초에는 남으로 경사져 함몰한 부분이 있음. 함몰한 곳의 외측에 길이 1.8m, 폭 1.4m, 깊이 0.8m의 재구덩이가 있고, 재구덩이 양측 벽의 기울기는 기초부의 기울기와 거의 비슷함. 재구덩이 안의 재흙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기와편이 많음. 이 곳의 기초부는 재구덩이 부근에 있어서 벽체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구덩이 쪽으로 함몰된 것으로 추정됨. 토기편, 철제 솥편, 철촉 등이 출토됨.
역사적 의미
유적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있다. 첫째 관청과 침실설(吉林省博物館)로 길림성박물관은 1958년 발굴에서 나타난 건축구조와 유적현상을 통해 정옥의 1실(동실)은 관청, 2실은 침실로 추정함. 다만 3-4실은 성격을 추정하기 힘들다고 파악함. 건축물의 평면 분포로 보아 화려한 외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고구려 건축의 특징도 보여줌. 분포와 구조가 균형이 잡혀있고, 격식이 근엄하고, 비례가 정확하여 形式美가 각 부분에 상호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파악. 고구려의 문화와 중국 문화의 관계도 엿볼 수 있다고 파악. 수키와와 연화문와당, 정치하게 다듬은 초석 등은 중국 漢-南北朝 시기의 예술풍격과 유사함. 다만 건축물의 구조와 조영술 등은 모두 고구려인이 외래문화를 흡수해 자신의 문화를 발전시킨 과정을 보여줌. 고구려 민족문화의 우수한 전통과 독특한 풍격을 보여주고 있음.
두 번째는 왕실의 종묘와 사직설(吉林省博物館과 方起東)임. 吉林省博物館(1958):Ⅰ실의 구들은 폭 90㎝로서 매우 좁아 사람이 생활하기에 적당치 않음. 어떤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장소로 추정됨. 반면 Ⅱ실에는 폭 2m의 구들이 있고, 두꺼운 재가 있어 항상 불을 피웠음이 확실함. 더욱이 구들과 아궁이 부근에서 돌절구, 토제 가락바퀴, 네발토기 등의 생활용구 발견. 문헌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왼쪽에 큰 집을 세워 귀신에게 제사지냈다고 함. Ⅰ실은 바로 유적지 좌측에 있어 문헌기록과 서로 부합함. 이 건축들은 제왕의 궁실이면서 사직에 제사지내던 장소로 추정되는데, Ⅰ실 전체가 地母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祀地이고, 중앙의 방형巨石은 사직제단으로서 392년(고국양왕 9년)에 수리한 왕실의 사직과 종묘였을 가능성이 높음. 方起東(1982) : Ⅰ실 중앙의 장방형 巨石은 기능면에서 일상 생활에 어울리지 않으며, 왕궁이나 관부일 가능성도 적음. 또 실내에서 출토된 유물이 대단히 적고 건축물도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을 종합해볼 때 제사나 의례에 사용된 건축물일 가능성이 가장 높음. 중앙에 있는 장방형 거석은 臺座의 형상을 갖추지 않았고 그 위에 어떤 물건(어떤 형태의 神祗 또는 우상)을 얹었던 흔적도 없으며, 외형상 대단히 조잡함. 고구려 건축물에서 외부로 노출된 받침용 석재는 초석을 포함해 모두 정치하게 다듬었으며 조형미도 뛰어남.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장방형 거석은 ‘石坐’가 아니라, “거석숭배”와 연관된 모종의 신비한 성격을 부여받은 어떤 神祗의 상징물로서 숭배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음. 더욱이 역대 중국에서 거행되었던 社제사의 神主와 극히 유사하 모습임. 결국 동대자 유적은 제사와 예배를 행하던 장소로서 Ⅰ실 전체는 지모신을 제사하던 社의 유적이고, Ⅰ실 중앙에 있는 장방형 거석은 社主로 추정됨. Ⅱ실은 農神인 稷을 제사하던 장소일 가능성이 매우 큼.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392년(고국양왕 9) 국사를 세우고 종묘를 수리했다고 하는데, 전연 모용황의 침공으로 파괴된 社를 재건립한 것으로 추정됨. 따라서 동대자 유적은 392년에 수리한 왕실의 종묘와 사직으로 추정됨. 세번째는 고구려 후기의 건물지설(關野貞 등)임. 동대자유적에서 출토된 연화문와당은 고구려 후기의 특징을 많이 보유하고 있음. 이로 보아 동대자유적은 고구려 후기의 건축물로 추정됨.
두 번째는 왕실의 종묘와 사직설(吉林省博物館과 方起東)임. 吉林省博物館(1958):Ⅰ실의 구들은 폭 90㎝로서 매우 좁아 사람이 생활하기에 적당치 않음. 어떤 제사 의식을 거행하던 장소로 추정됨. 반면 Ⅱ실에는 폭 2m의 구들이 있고, 두꺼운 재가 있어 항상 불을 피웠음이 확실함. 더욱이 구들과 아궁이 부근에서 돌절구, 토제 가락바퀴, 네발토기 등의 생활용구 발견. 문헌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왼쪽에 큰 집을 세워 귀신에게 제사지냈다고 함. Ⅰ실은 바로 유적지 좌측에 있어 문헌기록과 서로 부합함. 이 건축들은 제왕의 궁실이면서 사직에 제사지내던 장소로 추정되는데, Ⅰ실 전체가 地母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祀地이고, 중앙의 방형巨石은 사직제단으로서 392년(고국양왕 9년)에 수리한 왕실의 사직과 종묘였을 가능성이 높음. 方起東(1982) : Ⅰ실 중앙의 장방형 巨石은 기능면에서 일상 생활에 어울리지 않으며, 왕궁이나 관부일 가능성도 적음. 또 실내에서 출토된 유물이 대단히 적고 건축물도 일상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을 종합해볼 때 제사나 의례에 사용된 건축물일 가능성이 가장 높음. 중앙에 있는 장방형 거석은 臺座의 형상을 갖추지 않았고 그 위에 어떤 물건(어떤 형태의 神祗 또는 우상)을 얹었던 흔적도 없으며, 외형상 대단히 조잡함. 고구려 건축물에서 외부로 노출된 받침용 석재는 초석을 포함해 모두 정치하게 다듬었으며 조형미도 뛰어남.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장방형 거석은 ‘石坐’가 아니라, “거석숭배”와 연관된 모종의 신비한 성격을 부여받은 어떤 神祗의 상징물로서 숭배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음. 더욱이 역대 중국에서 거행되었던 社제사의 神主와 극히 유사하 모습임. 결국 동대자 유적은 제사와 예배를 행하던 장소로서 Ⅰ실 전체는 지모신을 제사하던 社의 유적이고, Ⅰ실 중앙에 있는 장방형 거석은 社主로 추정됨. Ⅱ실은 農神인 稷을 제사하던 장소일 가능성이 매우 큼.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따르면 392년(고국양왕 9) 국사를 세우고 종묘를 수리했다고 하는데, 전연 모용황의 침공으로 파괴된 社를 재건립한 것으로 추정됨. 따라서 동대자 유적은 392년에 수리한 왕실의 종묘와 사직으로 추정됨. 세번째는 고구려 후기의 건물지설(關野貞 등)임. 동대자유적에서 출토된 연화문와당은 고구려 후기의 특징을 많이 보유하고 있음. 이로 보아 동대자유적은 고구려 후기의 건축물로 추정됨.
자연환경
주변보다 약간 높은 동서 방향의 황토 대지로서 속칭 “동대자”로 불렸는데, 남쪽은 탁 트인 충적 평원임. 대지의 동서 길이는 약 500m이고 남북 폭은 약 150m임. 주변 지표면보다 8-10m 정도 높음. 통화-집안 철로가 유적지 중부를 통과하며, 현재 유적지 일대에는 民家가 들어서 있음.
유물정보
철제솥 토기등 유물 출토됨.
참고문헌
· 關野貞, 「滿洲輯安縣及び平壤附近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遺跡(二)」『考古學雜誌』 5-4, 日本考古學會, 1914
· 關野貞, 「滿洲國輯安縣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遺跡」『朝鮮の建築と藝術』, 岩波書店, 1941
· 池內宏, 『通溝』 上: 滿洲國通化省輯安縣高句麗遺蹟, 日滿文化協會, 1938
· 張馭寰, 「輯安附近高句麗時代的建築」『文物』 1958-4, 1958
· 方起東, 「集安東臺子高句麗建築遺址的性質和年代」『東北考古與歷史』 1982-1, 1982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方起東·林至德, 「集安高句麗考古的新收穫」『文物』 1984-1, 1984
· 徐永大 譯, 「集安 東擡子 高句麗 建築遺跡의 性質과 年代」『人文科學硏究所論文集』 16, 仁荷大學校人文科學硏究所, 1990
· 吉林省地方志編纂委員會 編, 「東臺子遺址」『吉林省志』 43(文物志), 吉林人民出版社, 1991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최무장, 『고구려 고고학』, 민음사, 1995
· 方起東, 「集安 東臺子 고구려 건축유지의 성격과 연대」『中國境內 高句麗遺蹟 硏究』, 예하출판, 1995
· 魏存成(신용민 역), 『高句麗考古』, 호암미술관, 1996
· 김도경·주남철, 「集安 東臺子遺蹟의 建築的 特性에 關한 硏究」『大韓建築學會論文集』 179, 대한건축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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