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원자남 유적 (梨樹園子南遺址; 果樹園子南遺址)
출토지
집안시 당교 내 (集安市 黨校 內)
연대
4세기(338년으로 편년되는 ‘戊戌’명 권운문 와당 출토)
조사내용
연도 | 조사기관 | 조사현황 |
1937년 | 일본학자들이 이 일대를 조사하여 건물 초석과 와당, 기와편 등을 확인하고, 만주국의 병사 막사가 있는 곳이라 하여 병사유적[兵舍遺址]이라고 명명함. 일제시기에 ‘戊戌’명과 ‘十谷民造’명 권운문 와당 등이 출토됨. | |
1958년 8월 | 원래 식량창고였던 이곳에서 곡식을 햇빛에 말리기 위한 지면을 정리하다가 백옥이배(白玉耳杯) 1건, 금동화살촉(鎏金箭頭) 20건, 금동그릇 뚜껑 1건, 금동갈고리 1건 등이 출토됨. | |
1980년대 | 유적에서 고구려 시기의 연화문, 인동문, 수면문 와당을 다수 채집함. |
구조특징
유적 서쪽에 동서로 배열된 거대한 화강암 초석 4개가 있었음. 초석열 연장선상의 지하에는 초석이 대량으로 묻혀 있었음. 당시 건축 규모를 상상할 수 있음.
역사적 의미
일제시기에 출토된 ‘戊戌’명과 ‘十谷民造’명 권운문와당 등은 이 유적이 4세기에는 이미 형성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함. 이 유적에서는 권운문와당 이외에도 蓮花紋, 忍冬紋, 獸面紋 등의 화려한 와당과 더불어 方格紋, 蓆紋, 菱形紋 등의 붉은색 기와편도 많이 출토되었음. 이는 이 유적에 화려한 기와건물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함. 또한 백옥이배(白玉耳杯), 금동화살촉, 금동그릇뚜껑, 금동갈고리 등 고급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백옥이배는 漢代 궁중에서 사용하던 물품으로 확인됨. 건물지의 규모와 출토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고구려 시기의 별궁이나 관청 등으로 추정됨. 왕실이나 귀족의 거주지로 추측하기도 함. 현재 이 건축물의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이 유적에서 권운문와당이 출토되었다는 점에서 4세기경에 이미 국내성지 외곽에도 중요한 건축물을 조영했음을 파악할 수 있음.
자연환경
뒤로는 禹山을 등지고 있으며 남쪽으로 집안분지가 펼쳐짐. 남쪽으로 고구려 두 번째 도성이었던 국내성지가 바라다보이며, 북쪽 약 100m 거리에 우산하고분군 3341호와 3340호로 편호된 대형 봉토석실묘가 있음.
주변보다 높은 대지에 위치. 주변 평지보다 7-10m 높고, 경사도는 약 5°임.
주변보다 높은 대지에 위치. 주변 평지보다 7-10m 높고, 경사도는 약 5°임.
유물정보
와당을 비롯한 다수의 유물 출토됨.
참고문헌
· 藤田亮策·梅原末治, 『朝鮮古文化綜鑑』 4, 養德社, 1966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魏存成(신용민 역), 『高句麗考古』, 호암미술관, 1996
· 吉林省文物志編纂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國家文物局 主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文物出版社, 1992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魏存成(신용민 역), 『高句麗考古』, 호암미술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