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선구 0001호묘(麻線溝 0001號墓)
출토지
길림성 집안시 마선구(吉林省 集安市 麻線溝)
연대
4세기 말
조사내용
연도 | 조사기관 | 조사현황 |
1961 | 집안현문물보관소 (集安縣文物保管所) | 여름에 최초 발견. |
1962 | 길림성박물관 집안고고대(이전복, 방기동, 임지덕) (吉林省博物館集安考古隊(李殿福, 方起東, 林至德)) | 縣境 내 일반적인 조사시 함께 조사함. 가을에 발굴 착수하고자 하였으나, 날씨가 너무 추워서 중단함. |
1963 | 길림성박물관(조자지, 유훤당, 방기동) (吉林省博物館(曹者祉, 劉萱堂, 方起東)) | 8월 조사 당시 일찍이 천정이 파괴되면서 도굴을 당하였고, 유골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고 함. |
1972 | 집안현문물보관소, 길림성박물관 (集安縣文物保管所, 吉林省博物館) | 발굴 당시 벽화는 이미 대부분 박락됨. |
구조특징
봉토석실벽화묘임. 1964년 보고서에서 둘레 50m, 봉토 높이 5m로 보고되었다가 1997년(2002년 보고서)에 한변 길이 13m, 높이 5m로 재보고됨.
봉토가 계속해서 유실되면서 묘실의 북벽과 동벽을 쌓았던 돌들이 외면에 노출됨. 묘실 천정 북변이 무너져 내리면서 구멍이 생겼는데, 구멍을 통해 출입이 가능함. 묘실 내부는 크기가 다른 돌로 석실을 쌓았고, 외부는 황색점토로 봉토를 이루었으며, 내면에는 백회를 발라 광택이 나게 함. 묘 바닥은 현재 지표보다 약 30~35㎝낮음. 묘도, 연도, 남북 이실, 묘실 등으로 구성됨. 묘실, 연도, 이실 내에는 진흙과 부식토가 중간 깊이까지 채워져 있음.
묘도는 돌과 백회를 이용해서 쌓았고, 연도에 연접된 묘도의 동단 좌우에는 흙과 돌을 쌓아 연도를 폐쇄하는데 이용하였음. 폐쇄된 흙의 두께는 2.1m, 묘도는 0.5m임. 폐쇄된 돌더미 중상부에 일찍이 생긴 도굴 구멍이 있는데, 현재 막혀 있음. 묘도의 폐쇄석은 강돌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강돌 사이에 숯과 숯덩이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음.
연도는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음. 연도 북면은 묘실보다 5㎝ 정도 낮음. 연도 바깥입구에서 1.25m 떨어진 지점에 원래는 나무로 만든 묘문이 설치되었으나, 지금은 썩었기 때문에 백회를 바른 문틀·문지방·문미 등의 흔적만이 남아 있음. 정리할 때, 썩은 나무에 붙어 있는 철제 門釘과 철제 문고리 2개가 발견됨. 문은 목질이고 외면에는 회를 칠하였는데, 정리할 때 문틀의 안쪽을 향하여 더 넓어진 백회흔적이 약간 보임. 이로 볼 때, 묘문은 문틀이 안쪽에 있어 안쪽으로 향하여 열리는 兩傘木扉임을 알 수 있음. 묘실에서 0.7m 떨어진 지점에 있는 묘실 문은 밖을 향해 열리는 양쪽 화강암 石扉임. 가운데 부분에는 모두 철제 문고리가 있음. 문비의 윗 문지도리는 원형인데, 현재는 백회가 발라진 목질의 문비가 썩어서 훼손된 채 끼워져 있음. 아랫 문지도리는 타원형인데, 지면에 직접 닿아 있음. 석문의 내측에는 아직 백회를 바른 문틀과 문지방이 있음.
연도 가운데의 좌우부분에 각각 남북 이실이 있는데 모두 장방형임. 남쪽 이실은 묘문에서 0.9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함. 입구는 통로는 거침. 동·서·남 세 벽은 약간 안으로 들여져 있고, 그 위는 四阿式 천정으로 이루어졌음(『集安高句麗墓葬』에서는 ‘覆頭式’으로 기록). 북쪽 이실은 묘문에서 1m 떨어져 있음. 입구는 통로를 거침. 이실 세 벽은 약간 안으로 들여져 있고, 그 위는 말각고임식 천정으로 이루어졌음. 천정은 이실 벽면으로부터 위로 계속해서 비스듬히 기울여졌음. 천정 네 모서리에는 작은 고임돌을 놓아 각을 죽이고, 고임돌 위에 1층 돌을 놓았으며, 그 돌과 평행하게 고인 후, 맨 위에 천정석을 놓았음. 천정석에는 회를 발랐음.
묘도는 방형으로 네 벽은 안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음. 서벽 중간에는 연도가 있어서 벽 사이를 갈라놓고 있음. 네 벽 위에서 묘 꼭대기까지 점점 안으로 들여져 있고, 표면에 백회를 발랐으며, 사아식 천정에 가까운 모서리를 죽인 궁륭천정을 구성함. 석회 껍질이 벗겨진 천정 동남모서리에서 다음 사이에 작은 말각석을 볼 수 있음. 묘실 중앙에는 돌을 쌓아 만든 원형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직접 천정막음석을 떠받치고 있음. 기둥 표면에는 백회를 발랐고, 직경은 0.62m임. 궁륭식 천정의 네 면 정중앙의 아래쪽에 치우친 곳에 각각 작고 네모난 구멍 1개가 있음. 구멍 안은 계단 모양으로 쌓았음. 대체로 목질 부속품을 세웠던 것으로 보임. 중심에 있는 원형 기둥의 남북 양측에는 2개의 관대가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석판으로 축조하였고, 표면은 백회를 발라 광택이 남. 남쪽 관대는 길이 2.5m, 너비 1.05m임. 북쪽 관대는 길이 2.53.m, 너비 1.2m임. 높이는 모두 0.25m임.
마선구 1호묘는 마선구 고분군에서는 유일한 벽화묘임. 이실이 남북으로 나 있고 묘실이 하나 있는 두 방 구조이나 이실의 규모가 제법 있어서 네 벽면과 천정에 골고루 벽화를 그려 마치 세칸 무덤처럼 보이기도 함. 연도, 좌우 이실, 묘실의 벽면 상부 전체, 벽면 하부 약 30㎝, 중심의 둥근 기둥과 관대 등에 벽화가 그려짐. 먼저 주홍색의 얇은 선으로 초고를 잡고, 이어서 편평하게 발라 색칠을 하였으면 마지막에 묵선으로 윤곽을 그림. 사용된 색은 적갈색, 짙은 홍색, 귤색, 청회색, 짙은 녹색, 황토색, 백색 등이 있음. 현재 백회껍질이 박락되어 벽화는 명확하지 않음. 또한 진흙과 습기가 침투하면서 약간 남은 벽화 중에서도 일부는 초고의 얇은 선만 남아 있고, 일부는 定槁線이 탈실된 후에 벽면상에 남아 있는 하얗게 된 흔적만 찾을 수 있을 뿐임.
묘실 네 모서리에는 木柱櫨斗가 그려져 있는데, 적갈색으로 채색. 櫨斗 아래에는 皿板을 놓았고, 櫨斗위에는 梁枋을 올렸으며, 적갈색에 대어서 묵선으로 된 능형권운문을 연속적으로 도안함. 묘실에는 묘주부 부도와 매를 다루는 사람, 무용도와 개마 무사도 등 주로 생활장면을 그렸음. 돌기둥 위에 남아 있는 벽화는 측면 연화 도안임. 묘실의 바닥에 놓인 관대 2개 중 남쪽 관대에는 연화문과 호피 무늬 장식이 그려져 있음. 묘실 서벽의 벽화는 남아 있지 않고 남벽에는 기와집과 두 모용수의 모습이 보임. 묘실 동벽에는 매사냥꾼, 시종들, 무덤 주인부부 등이 묘사됨. 북벽에는 개마무사의 행렬을 배치하였으며 안벽에 해당하는 동벽에는 무덤 주인부부의 모습이 남아 있음. 벽 상부에 측면 연꽃이 묘사되었고, 천정고임에도 연꽃이 표현됨.
묘실 동벽에는 시종들이 서있는 사이로 묘주 부부가 (찻)상을 받는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부부대좌도에는 현재 일곱 명 가량의 인물 흔적이 남아 있음. 찻상은 모두 보이지 않지만 상 위의 찻잔 하나가 남아 보임(이 당시의 차문화에 대해서는 아직 고증이 필요한 단계임). 매를 다루는 사람도 그려짐. 동벽 상부에 측면 연화문 도안이 그려져 있음.
묘실 남벽에는 춤사위를 주고 받는 두 사람의 무용도가 남아 있음.
북벽에는 갑주를 두른 개마를 타고 갑옷과 투구를 쓴 기갑무사 그림이 일부 남아 있음.
梁枋 위의 천정은 회껍질이 일부 떨어져 나가고 조각조각 흩어진 연화문이 보임. 모두 九瓣으로, 일부는 짙은 홍색, 일부는 흑색을 주로 하였는데 형상은 조금 다름.
2기의 관대가 있는데, 그 중 남쪽 관대 표면에는 호피 모양의 장식무늬가 그려져 있고, 좁은 면에는 연화문도 일부 보임.
남쪽 이실 동벽 구름무늬 아래로 창고가 그려짐. 남벽에는 창문이 있는 고상창고(부경)을 그렸고, 그 아래로 織機를 그렸는데, 방앗간을 그린 것으로 추정됨. 남쪽 이실 서벽에는 유운문 아래로 외양간이 있고, 그 속에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고기창고를 배치함. 궁륭식 천정고임에는 남측과 북측에 1송이씩 동측과 서측에 2송이씩 모두 8송이의 측면 연꽃을 그렸고, 천정석에는 활짝 핀 평면 연꽃을 묘사함. 벽과 천정 사이의 도리에는 마름모꼴 연속격자무늬 안에 연꽃송이꼴 장식무늬를 그려 넣었음.
북쪽 이실 서벽에는 기와 지붕을 인 건물 두채가 나란히 서 있음. 좌측 건물 속 들보 위에 새 7마리가 있고, 그 아래 줄에는 사냥한 듯한 무언가가 줄 위에 걸려 있는데, 푸주간으로 보기도 함. 북쪽 이실 동벽에는 말을 타고 달리는 무사가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며 사슴 두 마리를 사냥하는 그림이 묘사되어 있음. 그 앞쪽에도 동일한 장면이 그려졌을 것이나 무사가 탄 말의 뒷태만 남아 있음. 북쪽 이실 천정석에도 남쪽 이실 천정처럼 측면 연화문과 16瓣 둥근 연화문이 그려졌는데, 16판 연화문은 천정석 막음돌에, 나머지는 북측과 남측 고임돌에 하나씩, 서쪽과 동쪽에는 3개씩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됨.
출토 유물은 일찍이 도굴을 당하고, 이후에 진흙으로 흘러들어서 남아있던 유물 모두 원래 자리를 이탈함. 대부분 묘문 내외 양측의 충적토에 집중되어 있는데 어떤 시유도기는 깨져서 그 잔편들이 묘도, 연도, 묘실 등에서 나뉘어 출토되기도 함. 금동기는 비교적 얇고, 표면은 대부분 녹이 심하게 슬었음. 거의 대부분 작은 형태의 부속품이거나 장식품으로 그 가운데 일부는 마구와 관련이 있음. 출토된 토기는 모두 니질의 홍색임. 짙은 홍색으로 소성되고, 유색은 황토색이지만 희미하게 녹색이 드러남. 釉質은 매끄럽고 고와서 윤택이 나지만 탈락이 심함.
봉토가 계속해서 유실되면서 묘실의 북벽과 동벽을 쌓았던 돌들이 외면에 노출됨. 묘실 천정 북변이 무너져 내리면서 구멍이 생겼는데, 구멍을 통해 출입이 가능함. 묘실 내부는 크기가 다른 돌로 석실을 쌓았고, 외부는 황색점토로 봉토를 이루었으며, 내면에는 백회를 발라 광택이 나게 함. 묘 바닥은 현재 지표보다 약 30~35㎝낮음. 묘도, 연도, 남북 이실, 묘실 등으로 구성됨. 묘실, 연도, 이실 내에는 진흙과 부식토가 중간 깊이까지 채워져 있음.
묘도는 돌과 백회를 이용해서 쌓았고, 연도에 연접된 묘도의 동단 좌우에는 흙과 돌을 쌓아 연도를 폐쇄하는데 이용하였음. 폐쇄된 흙의 두께는 2.1m, 묘도는 0.5m임. 폐쇄된 돌더미 중상부에 일찍이 생긴 도굴 구멍이 있는데, 현재 막혀 있음. 묘도의 폐쇄석은 강돌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강돌 사이에 숯과 숯덩이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음.
연도는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음. 연도 북면은 묘실보다 5㎝ 정도 낮음. 연도 바깥입구에서 1.25m 떨어진 지점에 원래는 나무로 만든 묘문이 설치되었으나, 지금은 썩었기 때문에 백회를 바른 문틀·문지방·문미 등의 흔적만이 남아 있음. 정리할 때, 썩은 나무에 붙어 있는 철제 門釘과 철제 문고리 2개가 발견됨. 문은 목질이고 외면에는 회를 칠하였는데, 정리할 때 문틀의 안쪽을 향하여 더 넓어진 백회흔적이 약간 보임. 이로 볼 때, 묘문은 문틀이 안쪽에 있어 안쪽으로 향하여 열리는 兩傘木扉임을 알 수 있음. 묘실에서 0.7m 떨어진 지점에 있는 묘실 문은 밖을 향해 열리는 양쪽 화강암 石扉임. 가운데 부분에는 모두 철제 문고리가 있음. 문비의 윗 문지도리는 원형인데, 현재는 백회가 발라진 목질의 문비가 썩어서 훼손된 채 끼워져 있음. 아랫 문지도리는 타원형인데, 지면에 직접 닿아 있음. 석문의 내측에는 아직 백회를 바른 문틀과 문지방이 있음.
연도 가운데의 좌우부분에 각각 남북 이실이 있는데 모두 장방형임. 남쪽 이실은 묘문에서 0.9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함. 입구는 통로는 거침. 동·서·남 세 벽은 약간 안으로 들여져 있고, 그 위는 四阿式 천정으로 이루어졌음(『集安高句麗墓葬』에서는 ‘覆頭式’으로 기록). 북쪽 이실은 묘문에서 1m 떨어져 있음. 입구는 통로를 거침. 이실 세 벽은 약간 안으로 들여져 있고, 그 위는 말각고임식 천정으로 이루어졌음. 천정은 이실 벽면으로부터 위로 계속해서 비스듬히 기울여졌음. 천정 네 모서리에는 작은 고임돌을 놓아 각을 죽이고, 고임돌 위에 1층 돌을 놓았으며, 그 돌과 평행하게 고인 후, 맨 위에 천정석을 놓았음. 천정석에는 회를 발랐음.
묘도는 방형으로 네 벽은 안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음. 서벽 중간에는 연도가 있어서 벽 사이를 갈라놓고 있음. 네 벽 위에서 묘 꼭대기까지 점점 안으로 들여져 있고, 표면에 백회를 발랐으며, 사아식 천정에 가까운 모서리를 죽인 궁륭천정을 구성함. 석회 껍질이 벗겨진 천정 동남모서리에서 다음 사이에 작은 말각석을 볼 수 있음. 묘실 중앙에는 돌을 쌓아 만든 원형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직접 천정막음석을 떠받치고 있음. 기둥 표면에는 백회를 발랐고, 직경은 0.62m임. 궁륭식 천정의 네 면 정중앙의 아래쪽에 치우친 곳에 각각 작고 네모난 구멍 1개가 있음. 구멍 안은 계단 모양으로 쌓았음. 대체로 목질 부속품을 세웠던 것으로 보임. 중심에 있는 원형 기둥의 남북 양측에는 2개의 관대가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석판으로 축조하였고, 표면은 백회를 발라 광택이 남. 남쪽 관대는 길이 2.5m, 너비 1.05m임. 북쪽 관대는 길이 2.53.m, 너비 1.2m임. 높이는 모두 0.25m임.
마선구 1호묘는 마선구 고분군에서는 유일한 벽화묘임. 이실이 남북으로 나 있고 묘실이 하나 있는 두 방 구조이나 이실의 규모가 제법 있어서 네 벽면과 천정에 골고루 벽화를 그려 마치 세칸 무덤처럼 보이기도 함. 연도, 좌우 이실, 묘실의 벽면 상부 전체, 벽면 하부 약 30㎝, 중심의 둥근 기둥과 관대 등에 벽화가 그려짐. 먼저 주홍색의 얇은 선으로 초고를 잡고, 이어서 편평하게 발라 색칠을 하였으면 마지막에 묵선으로 윤곽을 그림. 사용된 색은 적갈색, 짙은 홍색, 귤색, 청회색, 짙은 녹색, 황토색, 백색 등이 있음. 현재 백회껍질이 박락되어 벽화는 명확하지 않음. 또한 진흙과 습기가 침투하면서 약간 남은 벽화 중에서도 일부는 초고의 얇은 선만 남아 있고, 일부는 定槁線이 탈실된 후에 벽면상에 남아 있는 하얗게 된 흔적만 찾을 수 있을 뿐임.
묘실 네 모서리에는 木柱櫨斗가 그려져 있는데, 적갈색으로 채색. 櫨斗 아래에는 皿板을 놓았고, 櫨斗위에는 梁枋을 올렸으며, 적갈색에 대어서 묵선으로 된 능형권운문을 연속적으로 도안함. 묘실에는 묘주부 부도와 매를 다루는 사람, 무용도와 개마 무사도 등 주로 생활장면을 그렸음. 돌기둥 위에 남아 있는 벽화는 측면 연화 도안임. 묘실의 바닥에 놓인 관대 2개 중 남쪽 관대에는 연화문과 호피 무늬 장식이 그려져 있음. 묘실 서벽의 벽화는 남아 있지 않고 남벽에는 기와집과 두 모용수의 모습이 보임. 묘실 동벽에는 매사냥꾼, 시종들, 무덤 주인부부 등이 묘사됨. 북벽에는 개마무사의 행렬을 배치하였으며 안벽에 해당하는 동벽에는 무덤 주인부부의 모습이 남아 있음. 벽 상부에 측면 연꽃이 묘사되었고, 천정고임에도 연꽃이 표현됨.
묘실 동벽에는 시종들이 서있는 사이로 묘주 부부가 (찻)상을 받는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부부대좌도에는 현재 일곱 명 가량의 인물 흔적이 남아 있음. 찻상은 모두 보이지 않지만 상 위의 찻잔 하나가 남아 보임(이 당시의 차문화에 대해서는 아직 고증이 필요한 단계임). 매를 다루는 사람도 그려짐. 동벽 상부에 측면 연화문 도안이 그려져 있음.
묘실 남벽에는 춤사위를 주고 받는 두 사람의 무용도가 남아 있음.
북벽에는 갑주를 두른 개마를 타고 갑옷과 투구를 쓴 기갑무사 그림이 일부 남아 있음.
梁枋 위의 천정은 회껍질이 일부 떨어져 나가고 조각조각 흩어진 연화문이 보임. 모두 九瓣으로, 일부는 짙은 홍색, 일부는 흑색을 주로 하였는데 형상은 조금 다름.
2기의 관대가 있는데, 그 중 남쪽 관대 표면에는 호피 모양의 장식무늬가 그려져 있고, 좁은 면에는 연화문도 일부 보임.
남쪽 이실 동벽 구름무늬 아래로 창고가 그려짐. 남벽에는 창문이 있는 고상창고(부경)을 그렸고, 그 아래로 織機를 그렸는데, 방앗간을 그린 것으로 추정됨. 남쪽 이실 서벽에는 유운문 아래로 외양간이 있고, 그 속에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고기창고를 배치함. 궁륭식 천정고임에는 남측과 북측에 1송이씩 동측과 서측에 2송이씩 모두 8송이의 측면 연꽃을 그렸고, 천정석에는 활짝 핀 평면 연꽃을 묘사함. 벽과 천정 사이의 도리에는 마름모꼴 연속격자무늬 안에 연꽃송이꼴 장식무늬를 그려 넣었음.
북쪽 이실 서벽에는 기와 지붕을 인 건물 두채가 나란히 서 있음. 좌측 건물 속 들보 위에 새 7마리가 있고, 그 아래 줄에는 사냥한 듯한 무언가가 줄 위에 걸려 있는데, 푸주간으로 보기도 함. 북쪽 이실 동벽에는 말을 타고 달리는 무사가 활시위를 팽팽히 당기며 사슴 두 마리를 사냥하는 그림이 묘사되어 있음. 그 앞쪽에도 동일한 장면이 그려졌을 것이나 무사가 탄 말의 뒷태만 남아 있음. 북쪽 이실 천정석에도 남쪽 이실 천정처럼 측면 연화문과 16瓣 둥근 연화문이 그려졌는데, 16판 연화문은 천정석 막음돌에, 나머지는 북측과 남측 고임돌에 하나씩, 서쪽과 동쪽에는 3개씩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됨.
출토 유물은 일찍이 도굴을 당하고, 이후에 진흙으로 흘러들어서 남아있던 유물 모두 원래 자리를 이탈함. 대부분 묘문 내외 양측의 충적토에 집중되어 있는데 어떤 시유도기는 깨져서 그 잔편들이 묘도, 연도, 묘실 등에서 나뉘어 출토되기도 함. 금동기는 비교적 얇고, 표면은 대부분 녹이 심하게 슬었음. 거의 대부분 작은 형태의 부속품이거나 장식품으로 그 가운데 일부는 마구와 관련이 있음. 출토된 토기는 모두 니질의 홍색임. 짙은 홍색으로 소성되고, 유색은 황토색이지만 희미하게 녹색이 드러남. 釉質은 매끄럽고 고와서 윤택이 나지만 탈락이 심함.
내부규모 및 특징
묘도 길이 7m, 너비 1.38~1.8m, 방향 285°(북편향 75°)
연도 길이 4.65m, 윗너비 1m, 아랫너비 1.22m, 높이 1.6m
남쪽 이실 통로 너비 0.95m, 높이 1.24m, 깊이 0.35m
남쪽 이실 너비 0.9m, 높이 2.15m, 깊이 1.3m
북쪽 이실 통로 너비 0.95m, 높이 1.27m, 깊이 0.3m
북쪽 이실 너비 0.95m, 높이 2.08m, 깊이 1.25m
묘실 남·북벽 길이 4.28m, 동벽 길이 4.15m, 서벽 전체 길이 4.23m(『集安高句麗墓葬』에서는 동서길이 4.2m로 기록), 높이 4.05m
연도 길이 4.65m, 윗너비 1m, 아랫너비 1.22m, 높이 1.6m
남쪽 이실 통로 너비 0.95m, 높이 1.24m, 깊이 0.35m
남쪽 이실 너비 0.9m, 높이 2.15m, 깊이 1.3m
북쪽 이실 통로 너비 0.95m, 높이 1.27m, 깊이 0.3m
북쪽 이실 너비 0.95m, 높이 2.08m, 깊이 1.25m
묘실 남·북벽 길이 4.28m, 동벽 길이 4.15m, 서벽 전체 길이 4.23m(『集安高句麗墓葬』에서는 동서길이 4.2m로 기록), 높이 4.05m
역사적 의미
말각조정식 천정, 묘실과 연도의 배치, 돌로 쌓은 후 회를 바른 점 등은 모두 고구려 전·중기벽화의 공통적인 특색임. 다만 묘실 중앙에 세워진 원형기둥이 천정을 높임으로써 실내 공간을 넓힌 구조인데, 고구려 고분에서는 유일하게 보이는 사례임. 과거에 발견된 고구려고분 가운데에 기둥이 세워진 것은 있으나 그 무덤들은 묘실의 중앙에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조상 같다고 할 수 없음.
마선구1호묘에 나타난 벽화는 묘주인의 생전 생활을 주제로 하였는데, 의복과 관대는 고구려 전·중기 벽화묘에서 보이는 공통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음. 다만 시녀 비녀(頭簪), 뵤요, 창고, 날아가는 구름, 비조 등의 도안은 드물게 보이는 사례임. 이 묘의 벽화에 대해 기술이 졸렬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어떠한 부분은 기교성 있는 처리에 속하기도 함. 예를 들어, 춤추는 사람의 나부끼는 긴 소매,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등 움직이는 것들의 표현 방면은 다른 고구려 전·중기의 벽화와 비교해 볼 때, 기교가 매우 높음. 이 외에 벽화표층에서 탈락된 일부 부분에서 윤곽흑선까지 색채를 덮은 현상을 볼 수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초고의 빨간 선이 노출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 벽화를 그리는 순서를 드러내 주는 것으로, 당시 회화예술에 대해 전면적인 이해를 증진시켜 줌.
출토유물을 보면, 금제장식과 금동공예기술은 매우 수준이 높음. 황색시유도기의 질은 고운 태토로 단단하고, 유색은 선명한데, 이는 제작기술과 소성기술의 수준을 보여줌. 출토된 철기는 당시 철의 사용이 보편적이었음을 알려 줌. 현재 알려진 것 가운데 고구려의 시유도기는 대부분 무덤에서 출토되었는데, 집안 유적지 조사 중에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음. 오로지 순장명기로 추정됨.
넓은 묘실, 수려한 벽화, 아름답고 정교한 많은 유물, 벽화 중에 표현된 가옥 毗連과 시비들의 무리, 연회 및 가무 등은 묘주인 생활의 사치스러움을 보여주는 것임.
축조연대를 보면, 方起東(1964년)은 묘의 천정구조는 층층 중첩하였을 뿐만 아니라, 작은 말각석을 더하여 설치하였고, 더욱이 이실 중에 2중의 말각조성식 천정이 출현하는데, 이 점은 무용묘와 각저묘에 비해 확연히 진보하였고, 통구12호묘와 더불어 조금 늦은 시기에 축조된 삼실묘와 유사한 것이 많다고 봄. 벽화를 분석해 보면, 주제·풍격·천정장식 등이 통구 12호묘와 거의 유사함. 심지어 무용도에 보이는 춤을 추는 사람, 개마도에 보이는 중장기병, 수렵도에 보이는 弓馬步獸, 연화문과 능형운문도안 등의 모습 역시 통구 12호묘에서 거의 다 찾아 볼 수 있음. 다만 움직이는 것들의 표현은 약간 더 진보하였다고 추정함. 이로 볼 때, 묘의 축조연대는 무용묘와 각저묘보다는 늦고, 통구12호묘에 비해서는 비슷하거나 약간 늦을 거승로 추정되므로, 약 5세기에 해당한다고 보았음.
魏存成(1994년)은 이실의 퇴화, 불교와 관련된 연화문 등이 등장하는데, 불교는 4세기 후엽에 고구려에 전파되었으므로 불교소재의 광범위한 전파는 이보다 늦을 것이기 때문에 5세기 대로 추정함.
方起東, 劉萱堂(2002년)은 집안에서 발견된 벽화묘의 연대 및 분기와 관련하여 4기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1기로 파악함. 제 1기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단실묘이고 연도 양측에 이실이 축조되어 있다는 구조를 들 수 있음. 묘실은 궁륭식과 사아식 혹은 여러 층의 고임 및 네 모서리에 간혹 작은 말각석이 더해진 천정을 갖추고 있음. 그리고 묘방향은 서쪽을 향하고 있음. 벽화의 내용으로는 묘주인의 생전생활이나 연화 혹인 王자 문양으로 조성된 문양 등을 그렸음. 묘실 네 모서리에는 나무 구조물을 그려 넣었고, 능형문 혹은 螭문양을 그리기도 하였으며, 천정부분에는 주로 연화와 운문을 그렸음. 이 시기의 전형적인 벽화묘로는 마선구 1호묘, 통구 12호묘, 산성하 332호묘, 장천 1호묘 등이 있다고 파악함. 축조시기는 4세기 중엽~말엽으로 추정함.
고분에 부장된 행엽이나 호록 등 마구류나 사이전연호의 형태상의 특징을 볼 때 칠성산 1096호분 다음 단계로 비정되므로 4세기 말로 비정됨.
마선구1호묘에 나타난 벽화는 묘주인의 생전 생활을 주제로 하였는데, 의복과 관대는 고구려 전·중기 벽화묘에서 보이는 공통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음. 다만 시녀 비녀(頭簪), 뵤요, 창고, 날아가는 구름, 비조 등의 도안은 드물게 보이는 사례임. 이 묘의 벽화에 대해 기술이 졸렬하다고 말하고 있으나 어떠한 부분은 기교성 있는 처리에 속하기도 함. 예를 들어, 춤추는 사람의 나부끼는 긴 소매,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등 움직이는 것들의 표현 방면은 다른 고구려 전·중기의 벽화와 비교해 볼 때, 기교가 매우 높음. 이 외에 벽화표층에서 탈락된 일부 부분에서 윤곽흑선까지 색채를 덮은 현상을 볼 수 있고, 어떤 부분에서는 초고의 빨간 선이 노출되어 있는데, 이것은 당시 벽화를 그리는 순서를 드러내 주는 것으로, 당시 회화예술에 대해 전면적인 이해를 증진시켜 줌.
출토유물을 보면, 금제장식과 금동공예기술은 매우 수준이 높음. 황색시유도기의 질은 고운 태토로 단단하고, 유색은 선명한데, 이는 제작기술과 소성기술의 수준을 보여줌. 출토된 철기는 당시 철의 사용이 보편적이었음을 알려 줌. 현재 알려진 것 가운데 고구려의 시유도기는 대부분 무덤에서 출토되었는데, 집안 유적지 조사 중에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음. 오로지 순장명기로 추정됨.
넓은 묘실, 수려한 벽화, 아름답고 정교한 많은 유물, 벽화 중에 표현된 가옥 毗連과 시비들의 무리, 연회 및 가무 등은 묘주인 생활의 사치스러움을 보여주는 것임.
축조연대를 보면, 方起東(1964년)은 묘의 천정구조는 층층 중첩하였을 뿐만 아니라, 작은 말각석을 더하여 설치하였고, 더욱이 이실 중에 2중의 말각조성식 천정이 출현하는데, 이 점은 무용묘와 각저묘에 비해 확연히 진보하였고, 통구12호묘와 더불어 조금 늦은 시기에 축조된 삼실묘와 유사한 것이 많다고 봄. 벽화를 분석해 보면, 주제·풍격·천정장식 등이 통구 12호묘와 거의 유사함. 심지어 무용도에 보이는 춤을 추는 사람, 개마도에 보이는 중장기병, 수렵도에 보이는 弓馬步獸, 연화문과 능형운문도안 등의 모습 역시 통구 12호묘에서 거의 다 찾아 볼 수 있음. 다만 움직이는 것들의 표현은 약간 더 진보하였다고 추정함. 이로 볼 때, 묘의 축조연대는 무용묘와 각저묘보다는 늦고, 통구12호묘에 비해서는 비슷하거나 약간 늦을 거승로 추정되므로, 약 5세기에 해당한다고 보았음.
魏存成(1994년)은 이실의 퇴화, 불교와 관련된 연화문 등이 등장하는데, 불교는 4세기 후엽에 고구려에 전파되었으므로 불교소재의 광범위한 전파는 이보다 늦을 것이기 때문에 5세기 대로 추정함.
方起東, 劉萱堂(2002년)은 집안에서 발견된 벽화묘의 연대 및 분기와 관련하여 4기로 나누어 살펴보면서 1기로 파악함. 제 1기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단실묘이고 연도 양측에 이실이 축조되어 있다는 구조를 들 수 있음. 묘실은 궁륭식과 사아식 혹은 여러 층의 고임 및 네 모서리에 간혹 작은 말각석이 더해진 천정을 갖추고 있음. 그리고 묘방향은 서쪽을 향하고 있음. 벽화의 내용으로는 묘주인의 생전생활이나 연화 혹인 王자 문양으로 조성된 문양 등을 그렸음. 묘실 네 모서리에는 나무 구조물을 그려 넣었고, 능형문 혹은 螭문양을 그리기도 하였으며, 천정부분에는 주로 연화와 운문을 그렸음. 이 시기의 전형적인 벽화묘로는 마선구 1호묘, 통구 12호묘, 산성하 332호묘, 장천 1호묘 등이 있다고 파악함. 축조시기는 4세기 중엽~말엽으로 추정함.
고분에 부장된 행엽이나 호록 등 마구류나 사이전연호의 형태상의 특징을 볼 때 칠성산 1096호분 다음 단계로 비정되므로 4세기 말로 비정됨.
자연환경
마선묘구 북부에 위치. 마선구는 압록강 중류 북안 일대의 충적지로, 동서 길이는 2㎞, 남북 길이는 약 1.5㎞임. 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보고 있고, 동쪽으로 집안현성과 4㎞ 떨어져 있음. 마선하는 깊은 계곡 안에서 흘러와서 분지의 중부를 거쳐 압록강으로 들어감. 마선구 고분군에는 1000여기의 적석묘와 봉토묘가 분포함.
마선구 1호묘는 분지 북부 산골짜기에 위치.
남쪽으로 약 3㎞ 떨어진 지점에 압록강이 있음(『集安高句麗墓葬』과 『高句麗古墓壁畵硏究』에서는 4㎞ 떨어졌다고 기록).
동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지점에 마선하가 있음.
마선구 1호묘는 분지 북부 산골짜기에 위치.
남쪽으로 약 3㎞ 떨어진 지점에 압록강이 있음(『集安高句麗墓葬』과 『高句麗古墓壁畵硏究』에서는 4㎞ 떨어졌다고 기록).
동쪽으로 약 100m 떨어진 지점에 마선하가 있음.
유물정보
金器 3점, 金銅 杏葉 1점 外 馬具類 22점, 骨飾 2점, 鐵器 37점, 壶 2점, 竈 1점, 碗 1점, 遺骨 등
참고문헌
· 方起東, 「吉林輯安麻線溝一號壁畵墓」『考古』 1964-2, 1964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편, 『조선유적유물도감』 5, 1990
· 魏存成,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方起東·劉萱堂, 「集安下解放第31號高句麗壁畵墓」『北方文物』 2002-3, 2002
· 尹國有, 『高句麗壁畵硏究』, 吉林文學出版社, 2003
· 吳廣孝, 『集安高句麗壁畵』, 山東畵報出版社, 2006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耿鐵華, 『高句麗古墓壁畵硏究』, 吉林大學出版社, 2008
· 전호태, 「고구려 집안권 벽화고분의 현황과 과제」『蔚山史學』 14, 蔚山大學校史學會, 2009
· 吉林省文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4
·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편, 『조선유적유물도감』 5, 1990
· 魏存成,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1994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方起東·劉萱堂, 「集安下解放第31號高句麗壁畵墓」『北方文物』 2002-3, 2002
· 尹國有, 『高句麗壁畵硏究』, 吉林文學出版社, 2003
· 吳廣孝, 『集安高句麗壁畵』, 山東畵報出版社, 2006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耿鐵華, 『高句麗古墓壁畵硏究』, 吉林大學出版社, 2008
· 전호태, 「고구려 집안권 벽화고분의 현황과 과제」『蔚山史學』 14, 蔚山大學校史學會,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