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선구 2100호묘(麻線溝 2100號墓)
출토지
집안시 서쪽의 마선향 홍성촌 남쪽에 위치. 동쪽으로는 집안시와 약 3㎞ 떨어져 있음.
판차령 지맥 서쪽 기슭의 동에서 서로 펼쳐진 평탄한 대지에 위치.
지세는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음.
묘장 중심지리좌표는 동경 126°8'44.32", 북위 41°6'2.74"이며, 해발고도 200.1m임.(集安市 西쪽의 麻線鄕 紅星村 南쪽에 위치. 東쪽으로는 集安市와 약 3㎞ 떨어져 있음.
板岔嶺 支脈 西쪽 기슭의 東에서 西로 펼쳐진 平坦한 大地에 위치.
地勢는 東쪽은 높고 西쪽은 낮음.
墓葬 中心地理座標는 東經 126°8'44.32", 北緯 41°6'2.74"이며, 海拔高度 200.1m임)
판차령 지맥 서쪽 기슭의 동에서 서로 펼쳐진 평탄한 대지에 위치.
지세는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음.
묘장 중심지리좌표는 동경 126°8'44.32", 북위 41°6'2.74"이며, 해발고도 200.1m임.(集安市 西쪽의 麻線鄕 紅星村 南쪽에 위치. 東쪽으로는 集安市와 약 3㎞ 떨어져 있음.
板岔嶺 支脈 西쪽 기슭의 東에서 西로 펼쳐진 平坦한 大地에 위치.
地勢는 東쪽은 높고 西쪽은 낮음.
墓葬 中心地理座標는 東經 126°8'44.32", 北緯 41°6'2.74"이며, 海拔高度 200.1m임)
연대
동진 시기.
4세기 중기에 해당.
조사내용
연도 | 조사기관 | 조사현황 |
1966 | 길림성박물관, 집안현문물보관소 (吉林省博物館, 集安縣文物保管所) | 통구고분군에 대한 일제 조사 및 측량이 실시되면서 해당고분을 마선구 제2100호묘(JMM2100)로 편호함. |
2003 | 길림성문물고고연구소, 집안시문물보관소(왕지민, 왕보생, 왕신춘)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縣文物保管所(王志敏, 王寶生, 王新春)) | 조사기간은 4월 ~ 7월말임. 집안 고구려유적의 환경복원 작업중에 마선구 2100호묘의 상세한 조사, 측량 및 발굴이 진행되었는데 총 58일이 소요됨. 조사 및 정리과정에서 금기, 금동기, 청동기, 철기, 도기, 기와 등 총 550여건이 출토됨. |
구조특징
고분의 방향은 남측 묘변의 방향이 218°로 남편서 38°(이하 ‘남편서’를 ‘남’으로 칭함)임. 동변 길이 33m, 서변 길이 32.2m, 남변 길이 29.6m, 북변 길이 33m임.
묘정은 현재 평대이며, 남북 길이 18m, 동서 너비 11m 정도임. 대체로 장방형을 이루며 중간은 사면 둘레보다 낮으며 서측 북단에는 너비가 근 2m의 입구가 있음.
묘정 입구는 고분 아래로부터 정상부까지 연결되며, 내부의 자갈이 대량의 흑토와 섞여 있고, 돌과 흙더미에서는 상당한 수량의 금동기와 순금 장식물을 선별해 냈음. 이 입구는 오래 전의 도굴구덩이로 분석됨. 구덩이 안에는 부식토가 비교적 두텁고 상면에는 관목이 가득 차 있고 뿌리는 단단하게 돌틈 사이에 깊히 뚫고 들어가 있음. 이로써 도굴 구덩이는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 추측됨.
제1단 계단의 아래에는 한 층의 잘 다듬어진 기초석을 깔아 놓았음. 기초석은 반쯤 지하에 위치.
지표 경사가 다르기 때문에 노출된 높이는 0.6~0.7m로 일정치 않음. 기초석 구덩이 깊이는 0.4~0.6m임.
기초석은 대부분 산돌을 사용하였고 일부 화강암도 있음. 비교적 큰 석재로 견고함이 더함. 산돌은 일반적으로 상, 하, 밖 3면을 홈을 내었고, 화강암은 비교적 정연한 장대석과 방대석, 방대석의 모서리돌에 홈을 많이 내었음. 기초석은 비교적 가지런히 쌓아졌는데 위쪽 표면은 기본적으로 가지런함.
기초석 바깥쪽과 무덤 네 둘레를 절단한 단면을 보면, 구덩이 상층은 황토이고 하층은 황갈색토임. 구덩이 위로 지표면에는 작은 강자갈을 한겹깔았음. 묘장 자체의 압력과 장기적인 동결과 해빙 등의 요인에 영향을 받아 현재 서북과 동남 양 모서리의 기초석은 이미 빠져나가 안쪽이 아래로 함몰하여 바깥으로 뒤틀리는 현상이 나타남.
고분 북측 동단의 기초석 밖 0.5m 정도에는 무덤 기초와 수직하는 돌이 하나 있는데 길이 1.3m의 세워 놓는 석판으로 지표에서 반쯤 노출되었으나 아직 발굴이 진행되지 않아 그 성격은 분명하지 않음.
제1단 계단은 기초석을 포함해 모두 6층으로 쌓았으며 계단돌 안은 강자갈로 메움. 계단석은 점차 안으로 들여쌓았으며, 상면은 작은 강자갈로 덮혔음.
남, 서, 북 3면은 보존이 상대적으로 온전하여 높이 1.8~2.2m임.
계단은 부분적으로 밖으로 벌어지는 변형이 있는데 남측 서단의 외장은0.9m, 동단 외장은 0.3m이며, 북측 서단의 외장은 0.8m, 서측 북쪽 모서리 외장은 최대로 약 1.3m임.
동남 모서리와 서남 모서리는 비교적 심각하게 파괴되었으나 높이 0.6m 정도의 기초 모서리돌은 남아 있음. 동측의 보존이 가장 좋은 곳에는 현재 4층이 남아 있는데, 지표로부터 높이가 약 1.6m임.
계단을 쌓는데 사용된 석재는 대부분 산돌을 약간 가공하였음. 큰 모서리돌과 장대석은 화강암 석질임. 가공을 거친 석재는 일반적으로 길이 1m 정도이며, 작은 것은 0.5~0.8m 사이이며, 두께는 0.3~0.7m로 고르지 않으며, 가장 큰 것이 길이 1.8m임.
석재의 축조법상 보통 아래 돌이 크고, 윗 돌이 작으며, 정상에는 일반적으로 석판을 사용함. 다만 서남 모서리 5~6m 떨어진 곳의 남측 제2층 가공석재 중에 길이 1m, 높이 0.7m의 가공석재가 있는데 두께가 대체로 그 양옆의 3층 축조석에 맞물려 있어 제1단 계단은 여러 층이 동시에 수축된 것을 알 수 있음.
석재의 크기와 두께는 고르지 않아 형식이 아주 가지런하지 않아서 비교적 커다란 틈새들에는 소형의 판상 메움돌을 사용하여 각 층의 축조석이 견고하고 가지런하도록 함.
묘장 서면의 계단 북단에는 너비 2m여의 도굴갱 입구가 있는데 남측 상하에는 각기 장대석의 단면이 밖을 향하도록 함.
단면상 장대석은 다른 한쪽이 고분 내 자갈층에 삽입되어 있음. 이것은 ‘힘줄을 끌어당기는 것’과 유사하게 작용하여 계단과 내부의 메운돌을 충분히 서로 접하게 하여 견고함을 더하여서 붕괴를 방지함. 이 현상은 칠성산 211호묘의 서변에도 발견됨.
제2단 계단은 높이 0.9m이며, 제1단 계단에 비해 0.5m 안으로 들여쌓았음.
계단은 6~7층으로 축조되었으며, 아래쪽 석재는 화강암 소형 가공석재를 사용하였고, 위에는 장방형의 작은 석판을 쌓았음. 석질은 석회암이 다수를 차지하며, 그 나머지는 침적암과 혈암임.
계단 내부는 커다란 강자갈로 메워졌으며, 상면에는 돌을 덮음. 서측 남단 계단석의 담장에 기대어 6개의 소형 입석이 배열되어 있는데 입석은 판상을 띠고 있는데 높이 0.6m, 너비 0.3m, 두께 0.1m 정도이며, 재질은 짙은 회색의 침적암임.
6개의 석판은 모두 제1단 계단의 평면 위에 세워져 있으며 바깥면은 작은 강자갈 또는 깬돌로 덮여 있는데, 상면 일부가 노출되어서 일부러 놓아둔 것이나 의도가 명확치 않음. 유사한 정황은 남측 서단 제1단 계단 외측에서 보이는데, 이곳 역시 높이 1m 정도의 같은 재질의 입석판 하나가 계단석에 기대어 있음. 다만 외측에는 무덤 위에서 돌이 떨어져 내려서 사람이 놓아둔 것인지 상면에서 미끄러 떨어진 것인지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음.
제3단 계단은 제2단 계단 위에 안으로 들여쌓았으며, 남측은 안으로 0.9m 들여쌓았고, 북측은 안으로 1.4m 들여 쌓았음. 서측 북단은 1, 2단 계단의 전체가 밖으로 옮겨져 그 사이 간격이 1.7m에 이르며, 동측은 이미 파괴됨.
제3단 계단의 높이는 0.9m임.
석재와 축조 정황은 제2단 계단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계단 위에 돌이 덮혀 있음.
제4단 계단은 남측은 안으로 1.6m 들여 쌓았고, 북측은 안으로 1.4m 들여 쌓았음. 동측과 서측은 이미 남아 있지 않으나 잔류한 계단을 보면 그 높이와 사용된 석재는 2, 3단 계단과 기본적으로 동일함.
분구 정상에서 약 2m 떨어져 있는데 그 사이에 돌이 경사져 덮혀있어서 계단석이 드러나지 않음. 아직 덮힌 돌을 정리하지 않음. 앞의 4단 계단의 들여쌓기 한 폭을 보면 봉석 안에는 아직 2단 또는 3단 계단이 무덤 정상까지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묘정과 네 개 비탈에서 기와 조각이 산재하지만 수량이 확실히 묘장 사면 둘레의 낙석 속에 기와조각들이 포함되어진 것에 미치지 못함.
고분 아래에는 기와조각이 서면, 남면, 북면 등 3면이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북측과 서측 북단에는 여전히 권운 비금문 와당이 발견됨.
해당 고분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 특징에 따라 기와조각의 분포상황을 분석한다면 그 묘상 건축구조물 대부분이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무너진 것으로 추정됨.
묘정은 현재 평대이며, 남북 길이 18m, 동서 너비 11m 정도임. 대체로 장방형을 이루며 중간은 사면 둘레보다 낮으며 서측 북단에는 너비가 근 2m의 입구가 있음.
묘정 입구는 고분 아래로부터 정상부까지 연결되며, 내부의 자갈이 대량의 흑토와 섞여 있고, 돌과 흙더미에서는 상당한 수량의 금동기와 순금 장식물을 선별해 냈음. 이 입구는 오래 전의 도굴구덩이로 분석됨. 구덩이 안에는 부식토가 비교적 두텁고 상면에는 관목이 가득 차 있고 뿌리는 단단하게 돌틈 사이에 깊히 뚫고 들어가 있음. 이로써 도굴 구덩이는 비교적 오래된 것으로 추측됨.
제1단 계단의 아래에는 한 층의 잘 다듬어진 기초석을 깔아 놓았음. 기초석은 반쯤 지하에 위치.
지표 경사가 다르기 때문에 노출된 높이는 0.6~0.7m로 일정치 않음. 기초석 구덩이 깊이는 0.4~0.6m임.
기초석은 대부분 산돌을 사용하였고 일부 화강암도 있음. 비교적 큰 석재로 견고함이 더함. 산돌은 일반적으로 상, 하, 밖 3면을 홈을 내었고, 화강암은 비교적 정연한 장대석과 방대석, 방대석의 모서리돌에 홈을 많이 내었음. 기초석은 비교적 가지런히 쌓아졌는데 위쪽 표면은 기본적으로 가지런함.
기초석 바깥쪽과 무덤 네 둘레를 절단한 단면을 보면, 구덩이 상층은 황토이고 하층은 황갈색토임. 구덩이 위로 지표면에는 작은 강자갈을 한겹깔았음. 묘장 자체의 압력과 장기적인 동결과 해빙 등의 요인에 영향을 받아 현재 서북과 동남 양 모서리의 기초석은 이미 빠져나가 안쪽이 아래로 함몰하여 바깥으로 뒤틀리는 현상이 나타남.
고분 북측 동단의 기초석 밖 0.5m 정도에는 무덤 기초와 수직하는 돌이 하나 있는데 길이 1.3m의 세워 놓는 석판으로 지표에서 반쯤 노출되었으나 아직 발굴이 진행되지 않아 그 성격은 분명하지 않음.
제1단 계단은 기초석을 포함해 모두 6층으로 쌓았으며 계단돌 안은 강자갈로 메움. 계단석은 점차 안으로 들여쌓았으며, 상면은 작은 강자갈로 덮혔음.
남, 서, 북 3면은 보존이 상대적으로 온전하여 높이 1.8~2.2m임.
계단은 부분적으로 밖으로 벌어지는 변형이 있는데 남측 서단의 외장은0.9m, 동단 외장은 0.3m이며, 북측 서단의 외장은 0.8m, 서측 북쪽 모서리 외장은 최대로 약 1.3m임.
동남 모서리와 서남 모서리는 비교적 심각하게 파괴되었으나 높이 0.6m 정도의 기초 모서리돌은 남아 있음. 동측의 보존이 가장 좋은 곳에는 현재 4층이 남아 있는데, 지표로부터 높이가 약 1.6m임.
계단을 쌓는데 사용된 석재는 대부분 산돌을 약간 가공하였음. 큰 모서리돌과 장대석은 화강암 석질임. 가공을 거친 석재는 일반적으로 길이 1m 정도이며, 작은 것은 0.5~0.8m 사이이며, 두께는 0.3~0.7m로 고르지 않으며, 가장 큰 것이 길이 1.8m임.
석재의 축조법상 보통 아래 돌이 크고, 윗 돌이 작으며, 정상에는 일반적으로 석판을 사용함. 다만 서남 모서리 5~6m 떨어진 곳의 남측 제2층 가공석재 중에 길이 1m, 높이 0.7m의 가공석재가 있는데 두께가 대체로 그 양옆의 3층 축조석에 맞물려 있어 제1단 계단은 여러 층이 동시에 수축된 것을 알 수 있음.
석재의 크기와 두께는 고르지 않아 형식이 아주 가지런하지 않아서 비교적 커다란 틈새들에는 소형의 판상 메움돌을 사용하여 각 층의 축조석이 견고하고 가지런하도록 함.
묘장 서면의 계단 북단에는 너비 2m여의 도굴갱 입구가 있는데 남측 상하에는 각기 장대석의 단면이 밖을 향하도록 함.
단면상 장대석은 다른 한쪽이 고분 내 자갈층에 삽입되어 있음. 이것은 ‘힘줄을 끌어당기는 것’과 유사하게 작용하여 계단과 내부의 메운돌을 충분히 서로 접하게 하여 견고함을 더하여서 붕괴를 방지함. 이 현상은 칠성산 211호묘의 서변에도 발견됨.
제2단 계단은 높이 0.9m이며, 제1단 계단에 비해 0.5m 안으로 들여쌓았음.
계단은 6~7층으로 축조되었으며, 아래쪽 석재는 화강암 소형 가공석재를 사용하였고, 위에는 장방형의 작은 석판을 쌓았음. 석질은 석회암이 다수를 차지하며, 그 나머지는 침적암과 혈암임.
계단 내부는 커다란 강자갈로 메워졌으며, 상면에는 돌을 덮음. 서측 남단 계단석의 담장에 기대어 6개의 소형 입석이 배열되어 있는데 입석은 판상을 띠고 있는데 높이 0.6m, 너비 0.3m, 두께 0.1m 정도이며, 재질은 짙은 회색의 침적암임.
6개의 석판은 모두 제1단 계단의 평면 위에 세워져 있으며 바깥면은 작은 강자갈 또는 깬돌로 덮여 있는데, 상면 일부가 노출되어서 일부러 놓아둔 것이나 의도가 명확치 않음. 유사한 정황은 남측 서단 제1단 계단 외측에서 보이는데, 이곳 역시 높이 1m 정도의 같은 재질의 입석판 하나가 계단석에 기대어 있음. 다만 외측에는 무덤 위에서 돌이 떨어져 내려서 사람이 놓아둔 것인지 상면에서 미끄러 떨어진 것인지는 여전히 확실하지 않음.
제3단 계단은 제2단 계단 위에 안으로 들여쌓았으며, 남측은 안으로 0.9m 들여쌓았고, 북측은 안으로 1.4m 들여 쌓았음. 서측 북단은 1, 2단 계단의 전체가 밖으로 옮겨져 그 사이 간격이 1.7m에 이르며, 동측은 이미 파괴됨.
제3단 계단의 높이는 0.9m임.
석재와 축조 정황은 제2단 계단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며, 계단 위에 돌이 덮혀 있음.
제4단 계단은 남측은 안으로 1.6m 들여 쌓았고, 북측은 안으로 1.4m 들여 쌓았음. 동측과 서측은 이미 남아 있지 않으나 잔류한 계단을 보면 그 높이와 사용된 석재는 2, 3단 계단과 기본적으로 동일함.
분구 정상에서 약 2m 떨어져 있는데 그 사이에 돌이 경사져 덮혀있어서 계단석이 드러나지 않음. 아직 덮힌 돌을 정리하지 않음. 앞의 4단 계단의 들여쌓기 한 폭을 보면 봉석 안에는 아직 2단 또는 3단 계단이 무덤 정상까지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음.
묘정과 네 개 비탈에서 기와 조각이 산재하지만 수량이 확실히 묘장 사면 둘레의 낙석 속에 기와조각들이 포함되어진 것에 미치지 못함.
고분 아래에는 기와조각이 서면, 남면, 북면 등 3면이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북측과 서측 북단에는 여전히 권운 비금문 와당이 발견됨.
해당 고분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지형 특징에 따라 기와조각의 분포상황을 분석한다면 그 묘상 건축구조물 대부분이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무너진 것으로 추정됨.
내부규모 및 특징
묘정은 심각하게 파괴되어 오늘날 중앙부에는 얕은 구덩이가 있으며, 묘실은 이미 흔적도 없음.
묘정의 낮은 함몰된 지점을 관찰해보면 중앙부는 희미하게 동서향의 질서 있게 놓여진 자갈이 한줄 배열되어 있는데 마치 격벽의 기초의 흔적 같음. 이런 격벽은 우산 992호묘, 만보정 242호묘 등의 고분에서 일찍이 발견되었으며, 묘실이 그 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음.
묘상 또는 묘하를 막론하고 모두 커다란 석재가 발견되지 않아 천정 막음에 작은 돌이 쓰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해당 고분의 묘실은 커다라 개석이 올려지지 않은 광실구조에 속한다고 추정됨.
묘정의 낮은 함몰된 지점을 관찰해보면 중앙부는 희미하게 동서향의 질서 있게 놓여진 자갈이 한줄 배열되어 있는데 마치 격벽의 기초의 흔적 같음. 이런 격벽은 우산 992호묘, 만보정 242호묘 등의 고분에서 일찍이 발견되었으며, 묘실이 그 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음.
묘상 또는 묘하를 막론하고 모두 커다란 석재가 발견되지 않아 천정 막음에 작은 돌이 쓰였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해당 고분의 묘실은 커다라 개석이 올려지지 않은 광실구조에 속한다고 추정됨.
역사적 의미
마선 2100호묘의 현상은 원래 규모가 아니며, 원래는 현재의 복두형보다 높음. 이 묘장의 규모 및 현존 계단의 정황을 보면 현재 4단 계단이지만, 원래는 7단이었을 것이며, 낮아도 5단 이상이었을 것임.
묘장 형식상 마선 2100호묘는 우산 992호묘와 비슷하며, 계단적석묘로의 과도기 형태임.
현재 해당 고분은 서남 모서리와 서북 모서리가 주로 파괴되었는데 그 원인은 지세가 서쪽으로 경사지고, 기초가 얕고 하층 토질의 지탱력이 약하기 때문임. 묘장 본체의 압력이 가해져 외장과 외이, 부분적 훼손이 초래됨. 동측의 파괴는 주로 도로 수축과 석재 채취가 구조와 외형의 파괴를 가져옴.
묘상 기와는 기와조각의 무지를 정리해 쌓아 올린 것이 약 7m³가 되며 아직 수집되지 않고 깊게 매몰되거나 유실 또는 훼손된 부분을 제외하면 그 총량은 약 9m³을 넘지 않을 것으로 추측됨. 다시 기와의 연결 및 빈틈 등의 요인을 제거하면 그 실제 복개 면적은 약 80~90m²로 추산됨. 이로써 추측해보면 묘상의 복개면적은 약 80m² 정도임.
묘장에서 나온 철경의 조형 및 문식, 밀집파상선문 시유도기호 등은 명확한 시대 특징을 지님.
해당 고분에서는 도굴 때 사라진 황금 장식품이 대량 출토되었는데 순금 보요식은 많게는 20여 건에 달함. 아직도 금동 갑편, 금장식한 철도, 옻칠된 철제 거울 등은 족히 묘주인의 신분을 설명할 수 있는 진귀한 문물이 있음. 그 가운데 옻칠한 철경과 금장식된 철도는 삼국에서 위진 시기까지 중원 귀족의 표지성 물품이며 기와와 와당의 사용은 고구려 왕릉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이 고분은 왕릉임이 틀림 없음.
묘장 위치를 보면 천추묘와는 동일한 남북 축선에 놓여 거리 역시 가장 가까움. 묘상에서 출토된 비학운문 와당은 천추묘 동일 와당과 매우 유사하며, 통구 고분군 중 유일한 예로 두 묘주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설명해줌. 와당 연호부에는 비학이 시문되고 간지 기년이 보이지 않으므로 비교적 우산 992호묘와 서대묘의 기년 와당에 비해 늦어야만 함.
해당 고분의 묘주에 대해 魏存成은 기원 371년~384년의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張福有는 해당고분의 입지가 ‘봉산’이며 출토 유물이 3세기말 또는 4세기초에 해당한다고 보아 봉상왕에 비정하고 있으며, 東潮는 전연으로부터 빼앗겼다가 돌려받은 미천왕 시신을 재매장한 능으로 설정하며, 桃崎祐輔는 출토 유물의 분석상 서대총보다 후대 고분이라는 점에서 소수림왕에 비정함.
묘장 형식상 마선 2100호묘는 우산 992호묘와 비슷하며, 계단적석묘로의 과도기 형태임.
현재 해당 고분은 서남 모서리와 서북 모서리가 주로 파괴되었는데 그 원인은 지세가 서쪽으로 경사지고, 기초가 얕고 하층 토질의 지탱력이 약하기 때문임. 묘장 본체의 압력이 가해져 외장과 외이, 부분적 훼손이 초래됨. 동측의 파괴는 주로 도로 수축과 석재 채취가 구조와 외형의 파괴를 가져옴.
묘상 기와는 기와조각의 무지를 정리해 쌓아 올린 것이 약 7m³가 되며 아직 수집되지 않고 깊게 매몰되거나 유실 또는 훼손된 부분을 제외하면 그 총량은 약 9m³을 넘지 않을 것으로 추측됨. 다시 기와의 연결 및 빈틈 등의 요인을 제거하면 그 실제 복개 면적은 약 80~90m²로 추산됨. 이로써 추측해보면 묘상의 복개면적은 약 80m² 정도임.
묘장에서 나온 철경의 조형 및 문식, 밀집파상선문 시유도기호 등은 명확한 시대 특징을 지님.
해당 고분에서는 도굴 때 사라진 황금 장식품이 대량 출토되었는데 순금 보요식은 많게는 20여 건에 달함. 아직도 금동 갑편, 금장식한 철도, 옻칠된 철제 거울 등은 족히 묘주인의 신분을 설명할 수 있는 진귀한 문물이 있음. 그 가운데 옻칠한 철경과 금장식된 철도는 삼국에서 위진 시기까지 중원 귀족의 표지성 물품이며 기와와 와당의 사용은 고구려 왕릉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이 고분은 왕릉임이 틀림 없음.
묘장 위치를 보면 천추묘와는 동일한 남북 축선에 놓여 거리 역시 가장 가까움. 묘상에서 출토된 비학운문 와당은 천추묘 동일 와당과 매우 유사하며, 통구 고분군 중 유일한 예로 두 묘주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설명해줌. 와당 연호부에는 비학이 시문되고 간지 기년이 보이지 않으므로 비교적 우산 992호묘와 서대묘의 기년 와당에 비해 늦어야만 함.
해당 고분의 묘주에 대해 魏存成은 기원 371년~384년의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張福有는 해당고분의 입지가 ‘봉산’이며 출토 유물이 3세기말 또는 4세기초에 해당한다고 보아 봉상왕에 비정하고 있으며, 東潮는 전연으로부터 빼앗겼다가 돌려받은 미천왕 시신을 재매장한 능으로 설정하며, 桃崎祐輔는 출토 유물의 분석상 서대총보다 후대 고분이라는 점에서 소수림왕에 비정함.
자연환경
고분 동쪽 산기슭에는 홍성촌 3조 거민구와 향경로원이 있으며, 마선은 석묘촌로 통하는 향로가 묘장 동변을 통과함.
묘장의 남북 양측 모두 평탄한 골짜기로 남변은 경작지이며, 북측은 원 마선중학교가 있음.
서측 대지 아래에는 탁 트인 마선하곡이 있으며, 북에서 내려오는 마선하는 고분 서남 500m 정도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감.
통구 고분군 마선묘구 가운데 대형 묘장의 하나로 주위에는 여러 기의 대형 고구려 왕릉이 있는데 서남의 마선 626호묘는 1.7㎞ 떨어져 있고, 정남의 천추묘는 800m 떨어져 있고, 동남의 마선향 2378호묘는 1.2㎞ 떨어져 있음.
묘장의 남북 양측 모두 평탄한 골짜기로 남변은 경작지이며, 북측은 원 마선중학교가 있음.
서측 대지 아래에는 탁 트인 마선하곡이 있으며, 북에서 내려오는 마선하는 고분 서남 500m 정도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으로 들어감.
통구 고분군 마선묘구 가운데 대형 묘장의 하나로 주위에는 여러 기의 대형 고구려 왕릉이 있는데 서남의 마선 626호묘는 1.7㎞ 떨어져 있고, 정남의 천추묘는 800m 떨어져 있고, 동남의 마선향 2378호묘는 1.2㎞ 떨어져 있음.
유물정보
步搖 14점 外 金器 6점, 札甲片 11점, 鏤空飾 7점 외 金銅器 23점.
鐵鏡 1점 外 鐵器 35점, 四耳釉陶壺 6점 外 土器 3점, 瓦當 3점 外 瓦 17점.
鐵鏡 1점 外 鐵器 35점, 四耳釉陶壺 6점 外 土器 3점, 瓦當 3점 外 瓦 17점.
참고문헌
· 吉林省博物志編委會, 『集安縣文物志』, 1983
· 國家文物局 編, 『中國文物地圖集』 吉林分冊, 中國地圖出版社, 1993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通溝古墓群1997年調査測繪報告』, 科學出版社, 2002
· 傅佳欣, 『集安高句麗王陵』, 文物出版社, 2004
· 孫仁杰·遲勇, 『集安高句麗墓葬』, 香港亞洲出版社, 2007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要報」『東北史地』 2007-4, 2007
· 張福有·孫仁傑·遲勇, 『高句麗王陵通考』, 香港亞洲出版社, 2007
· 魏存成, 「集安高句麗大形積石墓王陵硏究」『社會科學戰線』 2007-4, 2007
· 임기환, 「고구려의 장지명 왕호와 왕릉비정」『고구려 왕릉 연구』, 동북아역사재단,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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