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화락성(阿伙洛城)
출토지
요녕성 신빈현 영릉진 하방촌 아화락촌(遼寧省 新賓縣 永陵鎭 下房村 阿伙洛村)
연대
명대
조사내용
연도 | 조사기관 | 조사현황 |
1930년대 | 도변삼삼, 고교광사랑 (渡邊三三, 高橋匡四郞) | 高橋匡四郞, 1941,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其報』2, 建國大學硏究院 으로 발표함. |
1990년 초반 | 무순시사회과학원(전파 등) (撫順市社會科學院(傳波 等)) | 혁도아랍성(赫圖阿拉城)을 중심으로 그 주위의 이전창평지성(二磚廠平地城), 온가요서산성(温家窑西山城), 영릉후보동산성(永陵後堡東山城), 두도립자성(頭道砬子城), 나가보자성(羅家堡子城), 위가보성(魏家堡城), 역마도반성(驛馬道班城), 주자산성(珠子山城), 달자영성(達子营城), 두도보성(頭道堡城), 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점장대성(点將臺城), 그리고 아화락성(阿伙洛城) 등 10여개의 후금시기의 성(漢, 고구려시기에 축조되어 후금시기에 계속 사용된 성 포함)을 조사함. 이들 성들은 혁도아랍성에서 가까우면 2.5㎞, 멀어도 10㎞ 안에 위치하고 있음. |
구조특징
아화락성(阿伙洛城)은 사람들에 의한 훼손이 적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함.
성은 동부가 높고 서부가 낮음. 성의 평면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좁은 타원형임.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나눌 수 있음(傳波, 1994; 여호규, 1999; 王禹浪·王宏北, 2007).
아화락성은 소자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북부는 비교적 개활한데, 개활한 땅의 돌출부에 위치함. 동쪽과 서쪽은 모두 이어진 산들로 막혀 있음. 한편 네 주위에는 봉화(烽火)·돈대(墩臺)가 없음. 성은 단지 북쪽으로 소자하도(蘇子河道)를 볼 수 있을 뿐임.
외성의 성벽은 상태가 비교적 양호함. 토석을 섞어서 축조함(土石杂筑). 현재 높이는 1~3m임.
내성의 평대(平臺)는 상하 2층으로 이루어져 있음. 상대(上臺)는 길이 20m, 너비 15m임. 상대와 하대의 구릉 길이는 11m임. 정상 중심부에는 지역주민들이 보물을 찾는다고 파내면서 구덩이가 형성됨.
성은 동부가 높고 서부가 낮음. 성의 평면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좁은 타원형임.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나눌 수 있음(傳波, 1994; 여호규, 1999; 王禹浪·王宏北, 2007).
아화락성은 소자하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북부는 비교적 개활한데, 개활한 땅의 돌출부에 위치함. 동쪽과 서쪽은 모두 이어진 산들로 막혀 있음. 한편 네 주위에는 봉화(烽火)·돈대(墩臺)가 없음. 성은 단지 북쪽으로 소자하도(蘇子河道)를 볼 수 있을 뿐임.
외성의 성벽은 상태가 비교적 양호함. 토석을 섞어서 축조함(土石杂筑). 현재 높이는 1~3m임.
내성의 평대(平臺)는 상하 2층으로 이루어져 있음. 상대(上臺)는 길이 20m, 너비 15m임. 상대와 하대의 구릉 길이는 11m임. 정상 중심부에는 지역주민들이 보물을 찾는다고 파내면서 구덩이가 형성됨.
역사적 의미
성은 고구려시기에 축조되어 명~청 사이의 후금여진(後金女眞)이 중수한 후 계속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됨(王禹浪·王宏北, 2007). 특히 환인지역에 거주하던 건주여진(建州女眞)이 1433년과 1437년 조선의 침략을 받고 1438년 소자하 방면으로 피신하여 아화락촌 동쪽의 호란합달(呼蘭哈達; 지금의 烟突山) 아래에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이 무렵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음(高橋匡四郞, 1941). 한편 아화락성에 대하여 고구려유물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성의 입지선택과 성벽구조 모두 전형적이지 않기 때문에 고구려산성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도 있음(肖景全·鄭辰, 2007).
영릉진 분지에 위치한 영릉진고성·비아랍성, 이들의 북쪽에 위치한 나가보산성(羅家堡山城)·두도립자산성(頭道砬子山城)·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서쪽에 위치한 온가요서산성(溫家窯西山城)·아화락성(阿伙洛城) 등의 위치관계와 규모를 고려하면, 아화락성은 대체로 영릉진고성·비아랍성의 소형 위성으로 추정됨. 특히 소자하 하류방면에서 영릉진 분지로 진입하던 적군의 동향을 관찰하던 초소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위치비정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張德玉·張正巖·李榮發·單鈴(1996)는 아화락성을 후금대 육조성(六祖城) 가운데 하나로 추정함. 육조성은 혁도아랍성(赫图阿拉城)을 중심으로 그 성을 지키기 위해 축조한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위성성(衛星城)임. 5개의 성은 혁도아랍성으로 통하는 골짜기(溝谷)의 요충지를 통제하고 있는데, 험준함을 이용하여 쌓았고 수렵 및 농경생활을 영위하는데도 유리함. 또한 각 지역을 차지하면서 성들끼리 서로 호응 및 지원함으로써 방어력을 더욱 강화하였음. 주위의 나머지 10여개의 후금 성들은 ‘六城十二处’의 ‘十二处’가 됨.
高橋匡四郞(1941)은 성의 위치로 보아 실록 도기(圖記)에 보이는 아합화락성채(阿合伙洛城寨)에 부합된다는 점에서 육조의 한 사람, 즉 흥조(興祖)의 차자(次子) 유천(劉闡)의 성채(城寨)인 아합화락성채(阿合伙洛城寨)로 추정함. 지금 명칭인 아화락(阿伙洛)이란 말도 아합화락(阿哈伙洛)에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음.
傳波(1994)는 육조성 가운데 복만(福滿)의 차자 유천(劉闡)이 살았던 아합화락성으로 추정함. 육조는 청태조 노이합적(努尔哈赤)의 증조 복만에게서 태어난 여섯 아들인데, “여섯 아들이 여섯 곳에 각각 성지(城池)를 세워 육왕을 칭하였고, 곧 육조이다(『靑太祖武皇帝實錄』권1, 2項)”라고 함. 육조가 살았던 여섯 개의 성채 모두 소자하 상류의 영릉일대에 위치하고 있음. 유천이 살았던 곳이 아합화락성이라는 점에서 성의 명칭(城名)과 지명(地名)이 서로 부합하고 있음. 혁도아랍성까지의 거리가 10㎞ 정도라는 점에서도 부합됨.
영릉진 분지에 위치한 영릉진고성·비아랍성, 이들의 북쪽에 위치한 나가보산성(羅家堡山城)·두도립자산성(頭道砬子山城)·삼도보동산성(三道堡東山城), 서쪽에 위치한 온가요서산성(溫家窯西山城)·아화락성(阿伙洛城) 등의 위치관계와 규모를 고려하면, 아화락성은 대체로 영릉진고성·비아랍성의 소형 위성으로 추정됨. 특히 소자하 하류방면에서 영릉진 분지로 진입하던 적군의 동향을 관찰하던 초소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위치비정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음.
張德玉·張正巖·李榮發·單鈴(1996)는 아화락성을 후금대 육조성(六祖城) 가운데 하나로 추정함. 육조성은 혁도아랍성(赫图阿拉城)을 중심으로 그 성을 지키기 위해 축조한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위성성(衛星城)임. 5개의 성은 혁도아랍성으로 통하는 골짜기(溝谷)의 요충지를 통제하고 있는데, 험준함을 이용하여 쌓았고 수렵 및 농경생활을 영위하는데도 유리함. 또한 각 지역을 차지하면서 성들끼리 서로 호응 및 지원함으로써 방어력을 더욱 강화하였음. 주위의 나머지 10여개의 후금 성들은 ‘六城十二处’의 ‘十二处’가 됨.
高橋匡四郞(1941)은 성의 위치로 보아 실록 도기(圖記)에 보이는 아합화락성채(阿合伙洛城寨)에 부합된다는 점에서 육조의 한 사람, 즉 흥조(興祖)의 차자(次子) 유천(劉闡)의 성채(城寨)인 아합화락성채(阿合伙洛城寨)로 추정함. 지금 명칭인 아화락(阿伙洛)이란 말도 아합화락(阿哈伙洛)에서 바뀐 것으로 볼 수 있음.
傳波(1994)는 육조성 가운데 복만(福滿)의 차자 유천(劉闡)이 살았던 아합화락성으로 추정함. 육조는 청태조 노이합적(努尔哈赤)의 증조 복만에게서 태어난 여섯 아들인데, “여섯 아들이 여섯 곳에 각각 성지(城池)를 세워 육왕을 칭하였고, 곧 육조이다(『靑太祖武皇帝實錄』권1, 2項)”라고 함. 육조가 살았던 여섯 개의 성채 모두 소자하 상류의 영릉일대에 위치하고 있음. 유천이 살았던 곳이 아합화락성이라는 점에서 성의 명칭(城名)과 지명(地名)이 서로 부합하고 있음. 혁도아랍성까지의 거리가 10㎞ 정도라는 점에서도 부합됨.
자연환경
신빈현 영릉진 하방촌 아화락촌 남측 봉황산(鳳惶山) 서단(西端)의 산허리 대지 위에 위치함. 산성이 위치한 영릉진 일대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이지만 북쪽의 초창하(草蒼河)·협하구(夾河溝)와 남쪽의 이도하(二道河)가 소자하(蘇子河)와 합류하면서 넓은 충적평지를 형성하고 있음.
북쪽에서 0.5㎞ 떨어진 지점에 아화락촌(阿伙洛村)이 있음. 아화락촌의 원래 이름은 아합화락(阿哈伙洛)임. 아합화락은 만주어인데, 한어(漢語)로 ‘노예산구(奴隶山溝)’ 혹은 ‘궁산구(窮山溝)’를 의미함.
아화락촌 남쪽은 대보구(臺寶沟)이고, 골짜기 바깥 서쪽 산 아래는 하방자촌(下房子村)인데, 하방자촌에서 아화락촌까지 거리는 1㎞임. 대보구의 작은 시내는 두 촌 사이에서 북쪽으로 흘러 소자하로 유입됨. 아화락촌에서 북쪽으로 1.5㎞ 떨어진 소자하 건너편에는 신빈~심梁 간 도로가 동서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고, 이 도로를 따라 10㎞ 정도 가면 영릉진 시가지가 나옴. 동쪽으로 10㎞ 떨어진 지점에 혁도아랍성(赫图阿拉城)이 있음.
성에서 1.5㎞ 떨어진 지점에 소자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고, 그 양안에는 좁고 기다란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음. 사방에 골짜기를 끼고 있음.
산성 동쪽으로는 연돌산(烟突山) 북사면의 구릉지와 소자하 남안의 충적평야가 펼쳐지며, 동남쪽 산등성이를 따라가면 연돌산 정상이 나옴. 산성은 동서로 길께 뻗은 연돌산 산줄기의 서북단에 자리 잡고 있는데, 동북단의 온가요산성(溫家窯山城)과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음. 그 동쪽으로 환인~영릉진고성, 소자하 지류인 이도하(二道河)가 있음. 서쪽 대보구 골짜기 건너편에는 험준한 산줄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음.
성의 동·서·남 세 방면은 연돌산 산줄기가 천연장벽을 이루고 있음. 오직 북문을 통해 소자하 유역으로 진입한 후 하곡(河谷)을 따라 소자하통도(蘇子河通道)로 진입할 수 있음.
북쪽에서 0.5㎞ 떨어진 지점에 아화락촌(阿伙洛村)이 있음. 아화락촌의 원래 이름은 아합화락(阿哈伙洛)임. 아합화락은 만주어인데, 한어(漢語)로 ‘노예산구(奴隶山溝)’ 혹은 ‘궁산구(窮山溝)’를 의미함.
아화락촌 남쪽은 대보구(臺寶沟)이고, 골짜기 바깥 서쪽 산 아래는 하방자촌(下房子村)인데, 하방자촌에서 아화락촌까지 거리는 1㎞임. 대보구의 작은 시내는 두 촌 사이에서 북쪽으로 흘러 소자하로 유입됨. 아화락촌에서 북쪽으로 1.5㎞ 떨어진 소자하 건너편에는 신빈~심梁 간 도로가 동서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고, 이 도로를 따라 10㎞ 정도 가면 영릉진 시가지가 나옴. 동쪽으로 10㎞ 떨어진 지점에 혁도아랍성(赫图阿拉城)이 있음.
성에서 1.5㎞ 떨어진 지점에 소자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고, 그 양안에는 좁고 기다란 충적대지가 펼쳐져 있음. 사방에 골짜기를 끼고 있음.
산성 동쪽으로는 연돌산(烟突山) 북사면의 구릉지와 소자하 남안의 충적평야가 펼쳐지며, 동남쪽 산등성이를 따라가면 연돌산 정상이 나옴. 산성은 동서로 길께 뻗은 연돌산 산줄기의 서북단에 자리 잡고 있는데, 동북단의 온가요산성(溫家窯山城)과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음. 그 동쪽으로 환인~영릉진고성, 소자하 지류인 이도하(二道河)가 있음. 서쪽 대보구 골짜기 건너편에는 험준한 산줄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음.
성의 동·서·남 세 방면은 연돌산 산줄기가 천연장벽을 이루고 있음. 오직 북문을 통해 소자하 유역으로 진입한 후 하곡(河谷)을 따라 소자하통도(蘇子河通道)로 진입할 수 있음.
유물정보
청화자기편(青花瓷片) 1점
참고문헌
· 高橋匡四郞, 「蘇子河流域に於ける高句麗と後女眞の遺跡」『建國大學硏究院硏究期報』 2, 建國大學硏究院, 1941
· 傳波, 「六祖城」『撫順地區清前遺跡考察紀實』, 遼寧人民出版社, 1994
· 張德玉·張张巖·李榮發·單鈴, 「“寧古塔”與六祖城考辨」『遼海文物學刊』 1996-1, 1996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傳波, 「六祖城」『撫順地區清前遺跡考察紀實』, 遼寧人民出版社, 1994
· 張德玉·張张巖·李榮發·單鈴, 「“寧古塔”與六祖城考辨」『遼海文物學刊』 1996-1, 1996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