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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립산성; 영액문산성; 장춘둔산성; 산성자산성; 성자산산성(雙砬山城 ; 英額門山城; 長春屯山城; 山城子山城; 城子山山城)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893
  • 위치(출토지)
    淸原縣 英額門鎭(鄕) 東側 長春屯村
  • 지역
    무순(撫順市)
  • 유형
    성곽>산성
  • 형태사항
    동서길이 220m, 남북너비 약 100m(陳大爲, 1982; 李殿福, 1994; 여호규, 1999; 王綿厚, 2002; 王禹浪·王宏北, 2007; 國家文物局, 2009)│500m(魏存成, 2002)│600여m(孫進己·馮永謙, 1989; 東潮·田中俊明, 1995; 馮永謙, 1997)  , 12점 
출토지
청원현 영액문진(향) 동쪽 장춘둔촌(淸原縣 英額門鎭(鄕) 東側 長春屯村)
연대
晋 이후(陳大爲 1982). 고구려 말기(李殿福 1994). 晋~唐 대(溫秀榮⋅張波 1996)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63청원현 영액문공사
(淸原縣英額門公社)
청원현 영액문공사가 변문(邊門)유적을 조사할 때, 장춘둔대대(長春屯大隊)를 방문하였는데, 현지주민이 산성의 존재를 알려 주면서 발견함.
1963요녕성박물관
(遼寧省博物館)
요녕성 박물관의 진대위(陳大爲)가 조사함. 산성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서 유물들을 발견하고, 나중에 조사내용을 발표함(陳大爲,1982, 「淸原縣英額門山城子調査記」『遼寧文物』1982-3).
구조특징
산성 정상부는 비교적 평탄함. 성의 동, 남, 북 세면은 가파른 절벽이라 오르기가 힘듦. 서면의 남북 두 구릉은 비교적 완만한데, 서문으로 내려 갈 수 있는 작은 길이 있음. 성 북쪽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지형인데, 지세가 매우 험준함. 평면은 서쪽이 넓고 동쪽이 좁은 표주박형태에 가까움(陳大爲, 1982; 馮永謙, 1997). 왕면후(王綿厚)는 불규칙형이라고 기록함(王綿厚, 2002).
성의 둘레에 대하여 동서길이 220m, 남북너비 약 100m라는 기록(陳大爲, 1982; 李殿福, 1994; 여호규, 1999; 王綿厚, 2002; 王禹浪·王宏北, 2007; 國家文物局, 2009), 500m라는 기록(魏存成, 2002), 600여m라는 기록(孫進己·馮永謙, 1989; 東潮·田中俊明, 1995; 馮永謙, 1997)이 있음.
성벽은 기복이 있는 산세를 따라, 산등성이 위(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축조하였음. 성벽에 대해 흙으로 축조하였다는 기록(陳大爲, 1982·1995; 孫進己·馮永謙, 1989; 李殿福, 1994; 東潮·田中俊明, 1995; 馮永謙, 1997; 王綿厚, 2002; 魏存成, 2002)과 土石으로 축조하였다는 기록(溫秀榮·張波, 1996; 國家文物局, 2009)이 있음. 가장 높은 성벽은 2.5m에 달함. 성벽 기단너비는 4~6m임.
남문, 서문 등 2개의 문이 있음. 산성 서문 근처 은폐된 곳에 비교적 작은 문이 있음. 일반적인 통로이기보다는 기습공격이나 퇴각시에 사용된 문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성 남면 구릉의 과수원에서 땅을 팠을 때, 유물들이 일괄적으로 출토되었음. 벽돌과 기와는 매우 적게 보임.
역사적 의미
성 바깥 남쪽 구릉 아래에서 많은 철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형태가 무순 고이산성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사함(王綿厚, 2002). 또한 성의 입지와 형태를 볼 때, 고구려의 산성으로 볼 수 있음(陳大爲, 1982). 산성은 요하 지류인 시하(柴河)나 청하(淸河)의 상류를 거슬러 혼하방면으로 넘어오는 적군을 방어하는 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추정됨(여호규, 1999). 산성에 대해 『資治通鑑』卷97에 기록된 남, 북도, 즉 요동에서 고구려 국내성으로 들어가는 두 갈래의 길 가운데, 북도에 위치한 산성으로 보기도 함(佟達, 1993).
성의 면적은 그리 크지 않고, 내부면적도 한계가 있으며, 수원도 부족하다는 점에서 보조적인 성격의 소형 산성으로 볼 수 있음. 그렇다면 대형 산성의 위성(衛星)으로 추정되고 있는데(陳大爲, 1982), 무순 고이산성과 유하(柳河) 나통산성(羅通山城)의 위성으로 보기도 함(王綿厚, 2002).
축조시기에 대해선 다양한 견해가 있음.
陳大爲(1982)의 견해. 출토된 철제 보습은 고이산성에서 출토된 유물과 거의 비슷함. 이로 볼 때 축조시기는 늦어도 진(晋) 이후로 추정됨.
李殿福(1994)의 견해. 성 안에서 출토된 금동장식, 철제 낫, 보습, 화살촉 등은 고이산성에서 출토된 유물과 매우 유사함. 성의 구조 및 구축방법을 볼 때, 고구려 말기로 추정됨.
溫秀榮·張波(1996)의 견해. 고구려 초기산성은 대부분 가파른 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았음. 인공벽이 가파른 절벽에 축조된 경우는 드물게 보이고, 주로 결구(缺口)를 막거나 높이가 낮은 산등성이에 축조함. 인공벽의 높이는 3~6m로 높음. 성벽건축재는 주로 쐐기형 돌로 외벽을 구축하였고, 안에는 잡석을 채웠음. 성문옹성의 평면은 대부분 장방형이고, 각요대(角瞭臺)는 명확히 구분됨. 유물은 극히 적게 보이는데, 모래혼입 홍갈색 토기편이 출토되기는 하나, 기와류는 보이지 않음. 그리고 생활용기 등이 출토되기도 함. 이로 볼 때, 태자성 내성(太子城 內城), 흑구산성(黑溝山城), 전수호산성(轉水湖山城), 삼송산성(杉松山城) 등이 초기산성에 속함. 고구려 중기산성의 특징을 살펴보면, 산등성이와 초벽장 위에 일률적으로 돌로 성벽을 축조하였음. 일반적으로 저지대는 성벽을 높게 쌓았음. 반면 초벽과 절벽에는 높이 약 1~1.5m의 낮은 벽을 축조하였는데, 그 기능은 성가퀴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음. 성문은 대부분 안으로 오므라드는 U형 옹문임. 성벽건축재는 쐐기형 돌과 잡석이 대부분을 차지함. 외벽은 초기산성의 외벽과 달리 정연함. 또한 건축재 가운데 쐐기형 돌이 발전한 단조석(短條石)이 출현함. 다만 더욱 정교하게 가공된 두대미세(頭大尾細)의 쐐기형 돌은 여전히 남아 있음. 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초기산성보다 풍부함. 수키와, 암키와, 녹색유약이 발라진 자기편, 철촉, 분(盆), 반(盤), 옹, 단지 등 회색토기편 등이 출토됨. 이 시기 연대는 위진(魏晋) 아래임. 오룡산성(五龍山城)과 태자성 외성이 중기산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음. 고구려 후기산성은 산등성이를 따라 토벽 혹은 토석혼축벽을 쌓았음. 문호(門戶) 혹은 방어취약 부분에는 흙을 다진 성벽을 크고 높게 쌓았고, 석축벽은 볼 수 없음. 각망대(角望臺)는 일률적으로 흙을 다져서 축조한 봉화대로 변화함. 출토유물은 초기와 중기보다 매우 풍부함. 고이산성과 쌍립산성(雙立山城)이 이 시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진(晋)~당(唐)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됨.
孫進己·馮永謙(1989)의 위치 비정. 『晉書』載記 9卷에는 ‘皝 …… 率勁兵四萬人, 入自南陜, 伐高句麗, 又使翰及子垂爲前鋒. 遣长史王寓等勒众萬五千, 从北置而进。高句丽王钊谓燕军之从北路也, 乃遣其弟武统精锐五萬距以北, 躬率弱卒以防南陜’이라는 기록, 『資治通鑑』卷 97에는 ‘將擊高句麗 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阔, 南道险狭’이라는 기록, 호삼성(胡三省)의 주(注)에는 ‘北道從北置而進, 南道从南陕入木底城’이라는 기록이 있음. 이상의 기록을 볼 때 북치(北置)는 모용부(慕容部)가 고구려를 공격했던 북도 상에 있으므로 무순 동쪽 혼하유역에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바로 쌍립산성(雙砬山城)이 북치성(北置城)으로 추정됨.
자연환경
청원현 영액문진(향) 동쪽 장춘둔촌 서쪽 1.5㎞ 지점의 성자산(산성자산) 위에 위치함. 산성 서북쪽에 심양~길림시 간 철도가 지나가고 있음. 산의 남쪽 구릉 아래는 청원~해룡(海龍)간 도로가 지나가고 있음. 동쪽으로 약 4㎞ 떨어진 지점에 영액문진(향)이 있음.
산성 정상부에 올라가면 동, 남, 북 세 면은 먼 곳까지 선명하게 보임. 동쪽으로는 장춘둔(長春屯)과 멀리 영액문공사(英額門公社)를 볼 수 있음. 북쪽으로는 혼하 하곡(河谷)과 그 맞은 편의 소오성구둔(小五城溝屯)을 볼 수 있음. 동북쪽으로는 구릉지대에 위치한 북보촌(北堡村)이 보이는데, 산성과의 거리는 약 1.5~2㎞임.
산성은 혼하 상류의 좌안(남안)에 위치함. 혼하 상류 남부 양안(兩岸)에는 용강산맥(龍崗山脈)의 서북 지맥과 길림 합달령산맥(哈達嶺山脈)의 동남 지맥이 가파른 산줄기를 이루는데, 서로 마주하면서 동서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음. 혼하가 두 산줄기의 골짜기를 따라 서쪽으로 흘러가면서 좁고 기다란 하곡평지를 형성하고 있음.
유물정보
金銅製 梅花形 板(금동제 매화형 판) 1점, 철제장식판(鐵製裝飾板) 7점, 철제화살촉(鐵鏃) 2점, 철제 쌍방울(雙鈴佩) 1점, 철제 낫(鐵鎌) 1점, 철제 보습(鐵耜) 1점
참고문헌
· 陳大爲, 「淸原縣英額門山城子調査記」『遼寧文物』 1982-3, 1982
· 孫進己·馮永謙, 『東北歷史地理』 (二), 黑龍江人民出版社, 1989
· 佟達, 「關于高句麗南北交通道」『博物館研究』 1993-3, 1993
· 李殿福(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遺蹟』, 學硏文化社, 1994
· 東潮·田中俊明,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1995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溫秀榮·張波, 「關于撫順地區的高句麗山城」『博物館研究』 1996-1, 1996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高句麗渤海硏究集成』 高句麗 卷(三), 哈爾濱出版社, 1997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王綿厚,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2002
· 魏存成, 『高句麗遺跡』, 文物出版社, 2002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哈爾濱出版社, 2007
· 肖景全·鄭辰, 「撫順地區高句麗考古的回顧」『東北史地』 2007-2, 2007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上·下), 西安地圖出版社,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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