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창구 1호분(米倉溝 1號墳)
출토지
미창구촌 북쪽 약 500m의 산등성이 가장 높은 곳(米倉溝村 北側 500m 岡 最高位置).
연대
장천 2호분과 동일시기인 약 5세기로 비정됨
구조특징
봉토부-외부 형태는 截尖方錐形. 覆斗狀
-방형의 네 모서리가 불분명하나 방형으로 판단 가능.
-봉토는 북고남저, 남부와 서부는 파괴가 심하고, 나머지는 비교적 양호.
-황토색 모래흙을 다져 쌓았으며, 묘실 가까이에서 목탄과 백회 발견.
-분구의 정상부 동쪽에 너비 3.5m, 길이 19m의 단이 있으며, 단 위는 길이 9m, 너비 8m의 평평함.
-분구 바깥으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반원형의 대가 있음. 길이는 남쪽 토대 21m, 북쪽 토대 36m.
-분구 남단에서 묘실 중심을 향해 10m, 깊이 4.7m되는 지점에서 판석 발견, 판석은 비교적 평평하고 방형에 가까움. 크기는 길이 1.6m, 너비 1.5m, 두께 0.28m. 판석 가운데 길이 0.42m, 너비 0.27m, 깊이 0.12m의 장방형 홈이 있음. 방형 판석 주위는 자갈과 목탄으로 꽉 채워 쌓았으며, 그 북쪽으로 판석에 잇대어 장대석이 놓여있음. 장대석 길이 1.4m, 너비 0.2m, 장대석 주위에도 목탄이 있음.
-판석 위로 동쪽으로 치우쳐 부정형한 삼각형 판석이 있음. 가장 긴 길이 0.9m, 너비 0.8m, 두께 0.3m.
-분구 끝에서 안으로 약 18m들어가서 묘실 외벽에 장대석 1매가 기대어 있음. 장대석은 길이 3.6m, 바닥쪽 너비 0.76m, 위쪽 너비 0.5m. 장대석을 잘 가공하였고, 백회를 바른 흔적이 있음. 장대석 아래 부분에는 자갈, 塊石, 백회로 쌓아 돌렸으며, 그 아래에는 돌 3매가 있는데, 그 중간에 장화형(靴形) 돌이 있음, 장화형 돌의 밑바닥과 목의 뒷면은 반듯한 평면으로 되어 있는데 밑바닥 길이 90㎝, 목 부위 높이 70㎝, 장화형 돌은 이전 무덤에서 보이지 않는 첫 발견.
-분구의 북부는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음.
-묘실은 분구 정상부 아래 8m 되는 곳을 평평하게 다진 후 그 위에 축조.
-묘실 외부의 보강적석에서 북으로 6m 되는 곳은 경사짐.
-경사면 전체는 1m 폭으로 자갈과 목탄을 깔음, 그 북쪽 가장자리에 지름 5㎝ 미만의 작은 돌을 ‘丁’자형으로 깔음, 길이 1m·동쪽으로 펼쳐진 길이 약 5.2m·너비 0.6m, 작은 돌을 깔아 만든 면의 북측에 다시 두 줄의 돌을 깔음. 첫째와 둘째 자갈돌 면 간격은 0.4m~0.5m, 둘째와 셋째 자갈돌면 간격은 0.4m. 둘째 자갈돌 면은 동서 길이 6.8m이며, 양끝은 비교적 좁으며, 가장 폭이 넓은 곳이 0.6m. 셋째 자갈돌 면은 길이 4m, 너비 0.5m, 셋째 자갈돌 면은 비교적 짧고 규칙적이지 못하며, 봉토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음.
-묘실 보강은 미가공의 커다란 돌로 계단식으로 차례로 쌓아 묘실 정상부까지 구축.
-봉토 가장자리에서 2m 떨어진 분구 동쪽에서도 깬돌로 만든 너비 약 1m정도의 면이 있고, 그 서쪽 1.5m 되는 곳에서 남북향으로 약 4m 너비로 분구 경사를 따라 돌을 깔았음. 돌을 깔은 면은 봉토 경사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점차 높아져 가장 높은 곳은 0.8m가 됨. 돌을 깔아 만든 면의 대개 비교적 큰 할석으로 만들었고, 자갈은 극히 드묾.
-방형의 네 모서리가 불분명하나 방형으로 판단 가능.
-봉토는 북고남저, 남부와 서부는 파괴가 심하고, 나머지는 비교적 양호.
-황토색 모래흙을 다져 쌓았으며, 묘실 가까이에서 목탄과 백회 발견.
-분구의 정상부 동쪽에 너비 3.5m, 길이 19m의 단이 있으며, 단 위는 길이 9m, 너비 8m의 평평함.
-분구 바깥으로 남쪽과 북쪽에 각각 반원형의 대가 있음. 길이는 남쪽 토대 21m, 북쪽 토대 36m.
-분구 남단에서 묘실 중심을 향해 10m, 깊이 4.7m되는 지점에서 판석 발견, 판석은 비교적 평평하고 방형에 가까움. 크기는 길이 1.6m, 너비 1.5m, 두께 0.28m. 판석 가운데 길이 0.42m, 너비 0.27m, 깊이 0.12m의 장방형 홈이 있음. 방형 판석 주위는 자갈과 목탄으로 꽉 채워 쌓았으며, 그 북쪽으로 판석에 잇대어 장대석이 놓여있음. 장대석 길이 1.4m, 너비 0.2m, 장대석 주위에도 목탄이 있음.
-판석 위로 동쪽으로 치우쳐 부정형한 삼각형 판석이 있음. 가장 긴 길이 0.9m, 너비 0.8m, 두께 0.3m.
-분구 끝에서 안으로 약 18m들어가서 묘실 외벽에 장대석 1매가 기대어 있음. 장대석은 길이 3.6m, 바닥쪽 너비 0.76m, 위쪽 너비 0.5m. 장대석을 잘 가공하였고, 백회를 바른 흔적이 있음. 장대석 아래 부분에는 자갈, 塊石, 백회로 쌓아 돌렸으며, 그 아래에는 돌 3매가 있는데, 그 중간에 장화형(靴形) 돌이 있음, 장화형 돌의 밑바닥과 목의 뒷면은 반듯한 평면으로 되어 있는데 밑바닥 길이 90㎝, 목 부위 높이 70㎝, 장화형 돌은 이전 무덤에서 보이지 않는 첫 발견.
-분구의 북부는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음.
-묘실은 분구 정상부 아래 8m 되는 곳을 평평하게 다진 후 그 위에 축조.
-묘실 외부의 보강적석에서 북으로 6m 되는 곳은 경사짐.
-경사면 전체는 1m 폭으로 자갈과 목탄을 깔음, 그 북쪽 가장자리에 지름 5㎝ 미만의 작은 돌을 ‘丁’자형으로 깔음, 길이 1m·동쪽으로 펼쳐진 길이 약 5.2m·너비 0.6m, 작은 돌을 깔아 만든 면의 북측에 다시 두 줄의 돌을 깔음. 첫째와 둘째 자갈돌 면 간격은 0.4m~0.5m, 둘째와 셋째 자갈돌면 간격은 0.4m. 둘째 자갈돌 면은 동서 길이 6.8m이며, 양끝은 비교적 좁으며, 가장 폭이 넓은 곳이 0.6m. 셋째 자갈돌 면은 길이 4m, 너비 0.5m, 셋째 자갈돌 면은 비교적 짧고 규칙적이지 못하며, 봉토 가장자리에 자리하고 있음.
-묘실 보강은 미가공의 커다란 돌로 계단식으로 차례로 쌓아 묘실 정상부까지 구축.
-봉토 가장자리에서 2m 떨어진 분구 동쪽에서도 깬돌로 만든 너비 약 1m정도의 면이 있고, 그 서쪽 1.5m 되는 곳에서 남북향으로 약 4m 너비로 분구 경사를 따라 돌을 깔았음. 돌을 깔은 면은 봉토 경사를 따라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점차 높아져 가장 높은 곳은 0.8m가 됨. 돌을 깔아 만든 면의 대개 비교적 큰 할석으로 만들었고, 자갈은 극히 드묾.
내부규모 및 특징
-묘실은 잘 가공된 거석으로 축조되었고, 甬道(연도), 左·右 耳室, 主室로 구성,
墓道는 용도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묘도 입구는 돌을 쌓아 폐쇄. 폐쇄석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자갈. 1m 정도 남아있음, 묘도 길이는 5.5m, 너비 3~4m, 가장 좁은 곳은 2.5m, 묘도 입구는 장방형이며, 양 벽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커다란 돌을 올려 천장을 만듬. 천장돌은 길이 3m, 두께 0.8~1m, 묘도 중간은 큰 돌로 폐쇄, 이미 훼손되어 아래쪽에 봉한 돌이 남아 있음. 봉한 돌의 너비는 묘도의 너비와 거의 같은 두께 0.48m. 중간 폐쇄는 묘도 입구로부터 2.5m, 주실 문에서 3.05m, 좌우 이실과 0.4m 떨어져 있음, 중간 폐쇄석 밖으로도 자갈과 백회를 부어 쌓음.
-좌우 이실은 연도 양쪽에 자리하고 있고, 규모는 서로 같음. 너비 1.17m, 길이 1.6m, 높이 1.65m, 이실 바닥은 연도 바닥보다 0.15m 높음.
-묘도와 연도의 길이 3.05m, 너비 1.4m, 묘도와 연도의 천정부는 3개의 비교적 커다란 장대석으로 쌓음. 주실쪽 천정석이 낮고, 이실이 있는 연도, 연도 입구 순으로 높아져서 계단을 이룸.
-묘도 가장 바깥의 천정석(제1단 천정석)은 길이 2.5m, 중간으로부터 계산한 높이 0.9m, 너비 3m, 제2단 천정석 길이 1.65m이며, 드러난 계단부분이 0.2m, 제3단 천정석은 길이 1.05m.
-연도와 주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주실 중앙에 묘문이 있음, 묘문의 너비 1.27m, 높이 1.5m, 방향은 북쪽으로 15° 치우친 서향, 문턱(門楣)의 너비 0.2m, 높이 0.11m. 문틀(門框)은 直立條石으로 두께 0.2m, 문 밖 네 모서리에는 각 1개의 둥근 구멍이 있는데, 구멍은 직경 0.1m, 깊이 0.07m로 문확(門臼)으로 보여짐, 연도 중간에 2개의 돌문(扇石門)이 바닥에 눕혀져 있으며, 형식은 서로 같아 너비 0.68m, 길이 1.5m, 두께 0.05m.
-주실 평면은 정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 3.56m, 묘실 바닥에서 천정부까지의 높이 3.5m, 벽 높이 2.2m, 바닥에는 커다란 판석이 깔려 있고 묘실 좌우 양측에는 각 1개의 관대가 있음. 관대는 장방형이며 크기는 서로 같음. 길이 2.54m, 너비 1.22m, 두께 0.4m. 관대 사이의 거리는 0.6m.
-관대는 가공한 장대석으로 만들었음, 두 관대의 동부 내측에는 각기 한 모서리가 없음,
-벽은 매끄럽고 평평하며 표면에 백회를 한 겹 바르고, 그 위에 유채색 연화를 그림, 벽 높이 1.5m 지점에는 1열로 약 20군데에 걸쳐 못구멍이 뚫려 있음, 못구멍 간의 거리는 0.5m이고 일부 구멍 안에는 절단된 철제 못이 있음, 못구멍은 만장을 걸기 위한 못자리로 추정
-벽 상부에는 주홍색으로 들보를 그리고, 들보 가운데에는 둘씩 서로 만나는 용모양의 도안을 그림.
-천장가구는 벽 위에는 3단의 평행고임을 한 후 1매의 돌을 덮어 총 4단의 평행고임 천장이 됨, 천장 고임부는 아래로부터 제1단은 길이 3.38m·높이 0.48m, 제2단은 길이 2.8m·높이 0.4m, 제3단은 길이 2.06m·높이 0.34m, 천정부 길이 1.36m·높이 0.26m.
-고임 각 단에는 측면연화(側視蓮花)를 그림, 천장 막음돌에는 9송이의 평면연화(正視蓮花)를 그림. 현재는 이미 탈락되었음, 고임돌 밑면에는 流雲王字의 연속 기하문 도안을 그림, 하부 제1단의 고임돌 정면에는 연화 꽃봉오리의 줄기와 가지의 기하문 연속 도안.
墓道는 용도와 서로 연결되어 있고, 묘도 입구는 돌을 쌓아 폐쇄. 폐쇄석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자갈. 1m 정도 남아있음, 묘도 길이는 5.5m, 너비 3~4m, 가장 좁은 곳은 2.5m, 묘도 입구는 장방형이며, 양 벽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커다란 돌을 올려 천장을 만듬. 천장돌은 길이 3m, 두께 0.8~1m, 묘도 중간은 큰 돌로 폐쇄, 이미 훼손되어 아래쪽에 봉한 돌이 남아 있음. 봉한 돌의 너비는 묘도의 너비와 거의 같은 두께 0.48m. 중간 폐쇄는 묘도 입구로부터 2.5m, 주실 문에서 3.05m, 좌우 이실과 0.4m 떨어져 있음, 중간 폐쇄석 밖으로도 자갈과 백회를 부어 쌓음.
-좌우 이실은 연도 양쪽에 자리하고 있고, 규모는 서로 같음. 너비 1.17m, 길이 1.6m, 높이 1.65m, 이실 바닥은 연도 바닥보다 0.15m 높음.
-묘도와 연도의 길이 3.05m, 너비 1.4m, 묘도와 연도의 천정부는 3개의 비교적 커다란 장대석으로 쌓음. 주실쪽 천정석이 낮고, 이실이 있는 연도, 연도 입구 순으로 높아져서 계단을 이룸.
-묘도 가장 바깥의 천정석(제1단 천정석)은 길이 2.5m, 중간으로부터 계산한 높이 0.9m, 너비 3m, 제2단 천정석 길이 1.65m이며, 드러난 계단부분이 0.2m, 제3단 천정석은 길이 1.05m.
-연도와 주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주실 중앙에 묘문이 있음, 묘문의 너비 1.27m, 높이 1.5m, 방향은 북쪽으로 15° 치우친 서향, 문턱(門楣)의 너비 0.2m, 높이 0.11m. 문틀(門框)은 直立條石으로 두께 0.2m, 문 밖 네 모서리에는 각 1개의 둥근 구멍이 있는데, 구멍은 직경 0.1m, 깊이 0.07m로 문확(門臼)으로 보여짐, 연도 중간에 2개의 돌문(扇石門)이 바닥에 눕혀져 있으며, 형식은 서로 같아 너비 0.68m, 길이 1.5m, 두께 0.05m.
-주실 평면은 정방형으로 한 변의 길이 3.56m, 묘실 바닥에서 천정부까지의 높이 3.5m, 벽 높이 2.2m, 바닥에는 커다란 판석이 깔려 있고 묘실 좌우 양측에는 각 1개의 관대가 있음. 관대는 장방형이며 크기는 서로 같음. 길이 2.54m, 너비 1.22m, 두께 0.4m. 관대 사이의 거리는 0.6m.
-관대는 가공한 장대석으로 만들었음, 두 관대의 동부 내측에는 각기 한 모서리가 없음,
-벽은 매끄럽고 평평하며 표면에 백회를 한 겹 바르고, 그 위에 유채색 연화를 그림, 벽 높이 1.5m 지점에는 1열로 약 20군데에 걸쳐 못구멍이 뚫려 있음, 못구멍 간의 거리는 0.5m이고 일부 구멍 안에는 절단된 철제 못이 있음, 못구멍은 만장을 걸기 위한 못자리로 추정
-벽 상부에는 주홍색으로 들보를 그리고, 들보 가운데에는 둘씩 서로 만나는 용모양의 도안을 그림.
-천장가구는 벽 위에는 3단의 평행고임을 한 후 1매의 돌을 덮어 총 4단의 평행고임 천장이 됨, 천장 고임부는 아래로부터 제1단은 길이 3.38m·높이 0.48m, 제2단은 길이 2.8m·높이 0.4m, 제3단은 길이 2.06m·높이 0.34m, 천정부 길이 1.36m·높이 0.26m.
-고임 각 단에는 측면연화(側視蓮花)를 그림, 천장 막음돌에는 9송이의 평면연화(正視蓮花)를 그림. 현재는 이미 탈락되었음, 고임돌 밑면에는 流雲王字의 연속 기하문 도안을 그림, 하부 제1단의 고임돌 정면에는 연화 꽃봉오리의 줄기와 가지의 기하문 연속 도안.
역사적 의미
고분 연대
장천 2호묘와의 비교 : 미창구 장군묘의 형상·구조·벽화내용·출토유물 등은 모두 길림 집안 장천 2호벽화묘와 유사함. 고분 구조는 모두 방형 평면의 4단 고임천정의 묘실과 墓道·左右 耳室·甬道로 이루어진 봉토석실묘이며, 황록색의 시유 화덕, 황색 시유 사이전연호, 장식문을 위주로 측면연화와 流雲王字 도안등으로 미루어 미창구 장군묘는 장천 2호분과 동일시기의 고분임. 『長川二號墓發掘紀要』에 의하면 장천2호분을 약 5세기로 비정하였음.
출토품 : 장군묘 출토품인 鎏金銅八瓣花形飾件, 銅帶扣 등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보이지 않으며, 3~4세기로 비정되는 羅通山城에서 이런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음.
고구려 벽화내용 : 이전복의 고구려 고분벽화의 시기구분 안에 따르면, 초기 벽화의 내용은 도안이 간단하고 묘주인이 생전의 각종 생활장면이 주요 제재가 되고 그 외 日月星辰, 奇獸飛禽·飛仙 등이 도안으로 사용되며 연대는 대체로 3세기중엽에서 4세기중엽에 해당. 중기 벽화의 내용은 묘주인의 생활과 더불어 불교내용과 사신도상이 출현하며 연대는 대체로 4세기중엽에서 5세기중엽에 해당. 말기 벽화는 벽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며, 사신도가 주요 제재.
장군묘는 벽화내용 장식문 위주로 인물·산수의 화법이 보이지 않고 연화만 그려져 있지 않음. 연화문은 불교와 관련되나 아직 불교와 유관한 도안이 직접 그려져 있지 않아 불교가 처음 보급되는 단계로 보임. 문헌에는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가 고구려에 전파되었다고 하므로, 장군묘는 중기에 조금 앞서는 시기로 비정하는 것이 합당할 것임.
고분형식 : 장군묘와 같은 봉토석실묘는 고구려시대 만기의 고분형식으로 대체로 4세기에 출현하여 5세기에 성행함. 특히 장군묘와 같은 구조는 무용총, 각저총, 집안 통구 산성하 332호묘 등이 대표적임. 무용총의 벽화에는 장천 2호묘와 미창구 장군묘의 측면연화와 유사한 도안이 있음. 이들 고분의 연대는 모두 4세기임.
이상과 같이 보고문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환인 미창구 장군묘의 시대는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해당되지만, 장천 2호분은 구조와 벽화내용, 부장유물과 출토 기와들을 종합해 볼 때 4세기말이나 5세기초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음.
벽화의 의의
장식무늬 화법 : 장군묘는 耳室을 제외하고 주실 전체를 연화로 장식함. 연화는 측면연화로 이런 장식무늬 위주의 화법은 비교적 단조로우며 파악이 쉽지 않고, 일정 회화 수준에서 그리기 어렵지 않음. 그러나 전체 화면에서 본다면 배치가 합리적이고 구조가 정연하며 천장 고임부의 측면연화는 가로·세로, 좌·우 모두 열을 이룬 장식무늬위주의 화법은 지금까지 드물어서, 고구려민족의 회화예술사를 연구하는데 새로운 자료임.
불교적 세계관-연화문 : 장군묘 벽화의 주제인 연화문는 당시 고구려인의 불교 숭배와 관련됨. 불교가 고구려에 전파된 후 왕족 및 귀족를 거쳐 민간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 특히 장군묘 묘실 안 전체를 연화로 장식한 것은 묘주인의 불교 신앙과 숭배를 반영한 것이며, 연화정토의 경계에 대한 갈구를 표현한 것임. 이는 불교가 당시 사회에서 성행했던 사실을 보여주며, 중국내 고구려 벽화고분 20여기 가운데에 연화가 표현된 것은 16기인데, 장군묘 이외에 집안 舞踊墓, 장천 1호묘, 오회분 4호묘 등이 있음.
묘실의 고임돌의 변형연화는 火焰狀과 같고 물결이 움직이는 듯한 형상이며, 바닥부 형상은 개구리 발과 같으며 둘씩 서로 붙어 있음. 이 도안은 묘주인 부부가 받침과 연꽃같이 떨어지지 않고 연화정토속에서 화생하여 극락세계에 함께 이르는 것을 상징함. 이런 연화 도안 역시 벽화에서 최초로 발견되어 벽화예술에 신자료를 제공함.
묘주의 신분과 중원문화의 영향-용무늬·流雲王字 도안 : 용무늬는 묘실 네 벽에는 들보가 그려져 있는데, 그 위의 용무늬를 장식은 이전의 벽화에서 볼 없는 최초의 예로, 고구려에서도 용의 형상과 그 의미에 대해 이미 이해하고 있던 것을 보여줌. 중원지구에서 용의 형상은 비교적 일찍 출현하는데 용은 富貴·吉祥·神權 등을 대표하며, 용의 형상은 더욱 복잡해지고, 제왕에게 독점되어 권력의 상징이 됨. 이 고분벽화의 용무늬는 고구려민족이 끊임없이 중원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사실과 용을 부귀의 길상물로 여겼던 사실을 보여주며, 동시에 묘주인이 고구려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졌다고 짐작케 함, 流雲王字는 고임돌의 하부와 이실 안의 流雲王字 도안은 장천2호묘 벽화에 이미 발견되었음. 이 유운왕자 도안은 權貴를 상징하므로, 王字 역시 묘주인의 특수한 신분과 지위를 보여주는 사례로, 장군묘 봉토는 高大하여 묘주인의 권세와 특수한 신분을 보여줌.
죽음에 대한 인식-장고무늬 : 용무늬의 사이에 장고형 도안은 최초의 예로 가장 이른 시기의 장고 형상으로 오늘날 한국의 악기인 장고와 유사함. 장고 도안은 묘주가 연화가 가득한 정토속에서 화생하여 歌舞太平의 극락세계에 도달하는 것을 표현함. 또한 『北史』 고려전에 고구려인이 사후 장사지낼때 “鼓舞以作樂 以送之”하는 습속이 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장고는 고구려인이 죽음은 일종의 초탈이며 인간세상의 고해에서 벗어나 극락세계에 오르는 기쁜 일임을 상징함.
고분의 주인공
장군묘의 축조규모는 웅장하며, 구조는 빈틈없고, 제작은 정밀하고, 묘실벽은 모두 가공을 거친 대석으로 축조함. 두 관대 역시 온전한 대석을 가공하여 만들었음. 부장품은 적으나 대다수가 鎏金임. 이로 미루어 묘주는 적어도 왕족·귀족의 일원일 것임.
보고자는 『삼국지』 고구려전에 의하면, 206년 이이모와 발기의 왕위쟁탈과정에서 이이모가 왕위에 오르자 발기는 公孫康에 내투하였다가 돌아가 비류수 가에 머물었다는 기록과 결부시켜 묘주를 국내(집안)에서 졸본(환인)으로 옮겨간 발기세력과 유관하다고 추정함.
任傳興은 장군묘를 2차 遷葬한 주몽과 왕후의 합장묘로 보는 견해를 제시함, 寧會學은 주몽이 죽은 해와 고분이 축조된 시기 차이가 크고, 묘제가 맞지 않으며, 연화문 벽화는 불교수용이후 축조되었을 것이며, 고구려 매장습속에 ‘遷葬’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비판하고, 장군묘의 주인공을 고국양왕 부부로 비정하고 함. 장군묘는 연화문벽화로 고분벽화의 내용에 따른 시기구분상 대략 기원 370~380년에 해당되며 이 시기는 소수림왕과 고국양왕대로, 고구려왕의 시호는 장지명을 따르고 있는데, 여러 왕들에게서 보이는 ‘故國’이란 시호 역시 ‘고국’이란 장지에 의해 붙여진 것임. 즉 ‘고국’은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를 지칭한 표현으로 오늘날 환인지역으로, 장군묘 건축시기 ‘고국’이란 장지명 시호를 가진 ‘고국양왕’이 장군묘의 묘주라고 주장.
수공제작술과 고분제작술의 발달
수공업제작술 : 장군묘에 부장된 鎏金銅飾件, 細如蠶絲의 金線, 대량의 철제공구 등은 고구려의 수공제작·冶鐵鍛造 기술이 일정 발전했던 것을 보여주며, 고구려시기의 경제상황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실물자료 제공함.
분구 축조술 : 봉토분구가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고구려인이 건축방면에서 상당한 수준의 기술에 이르렀던 사실을 보여줌. 묘실 외부를 거석으로 보강하고 목탄·백회·진흙 등으로 깔은 방수시설, 황토 모래로 다져 지표면의 수분과 토사가 유실되지 않도록 하였으며, 봉토 동쪽과 북쪽의 부석시설은 묘실을 보강과 함께 종교와 예속 방면의 의미를 내포함.
매장습속
장군묘에서는 黃釉四耳展沿罐 3건이 출토된 것이 3이라는 홀수조합을 보여주는 사례가 고구려 장속의 하나인지는 좀 더 많은 발견을 기다려 볼 필요가 있음.
장군묘 남부의 봉토 중에 묘실 벽에 바짝 붙어서 大條石이 발견되었고, 하부에는 뒤집어진 靴形石 및 帶方孔의 판석이 확인됨. 이는 묘주인의 후손이 묘주인에게 비를 세워 공덕을 노래하기 위해 준비했으나 어떤 이유로 글자를 새기지 못하고 흙속에 묻었던 것으로 보임. 봉토 속에서 출토된 화형석는 고구려 장속의 일종으로, 장군묘 부근 5호묘의 墓道口 위에도 역시 화형석이 있으나 가공이 비교적 거칠음.
장군묘 주위의 소형묘들이 장군묘의 주위를 둘러싸고 분포한다는 점에서 장군묘의 배장묘로 보임. 배장묘는 장군묘와 동일시기 또는 장군묘보다 늦은 시기임. 배장묘는 刀形墓(6·7호)와 鏟形墓로 나뉨. 도형묘와 산형묘는 시기의 선후관계를 가진다고 봄. 소형묘는 두기씩 짝을 이루고 있으며(6·7호묘, 11·12호묘, 2·3호묘), 이것은 고구려 장속연구를 위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함.
장천 2호묘와의 비교 : 미창구 장군묘의 형상·구조·벽화내용·출토유물 등은 모두 길림 집안 장천 2호벽화묘와 유사함. 고분 구조는 모두 방형 평면의 4단 고임천정의 묘실과 墓道·左右 耳室·甬道로 이루어진 봉토석실묘이며, 황록색의 시유 화덕, 황색 시유 사이전연호, 장식문을 위주로 측면연화와 流雲王字 도안등으로 미루어 미창구 장군묘는 장천 2호분과 동일시기의 고분임. 『長川二號墓發掘紀要』에 의하면 장천2호분을 약 5세기로 비정하였음.
출토품 : 장군묘 출토품인 鎏金銅八瓣花形飾件, 銅帶扣 등은 비교적 늦은 고분에서 보이지 않으며, 3~4세기로 비정되는 羅通山城에서 이런 종류의 유물이 출토되었음.
고구려 벽화내용 : 이전복의 고구려 고분벽화의 시기구분 안에 따르면, 초기 벽화의 내용은 도안이 간단하고 묘주인이 생전의 각종 생활장면이 주요 제재가 되고 그 외 日月星辰, 奇獸飛禽·飛仙 등이 도안으로 사용되며 연대는 대체로 3세기중엽에서 4세기중엽에 해당. 중기 벽화의 내용은 묘주인의 생활과 더불어 불교내용과 사신도상이 출현하며 연대는 대체로 4세기중엽에서 5세기중엽에 해당. 말기 벽화는 벽면에 직접 그림을 그리며, 사신도가 주요 제재.
장군묘는 벽화내용 장식문 위주로 인물·산수의 화법이 보이지 않고 연화만 그려져 있지 않음. 연화문은 불교와 관련되나 아직 불교와 유관한 도안이 직접 그려져 있지 않아 불교가 처음 보급되는 단계로 보임. 문헌에는 소수림왕 2년(372)에 불교가 고구려에 전파되었다고 하므로, 장군묘는 중기에 조금 앞서는 시기로 비정하는 것이 합당할 것임.
고분형식 : 장군묘와 같은 봉토석실묘는 고구려시대 만기의 고분형식으로 대체로 4세기에 출현하여 5세기에 성행함. 특히 장군묘와 같은 구조는 무용총, 각저총, 집안 통구 산성하 332호묘 등이 대표적임. 무용총의 벽화에는 장천 2호묘와 미창구 장군묘의 측면연화와 유사한 도안이 있음. 이들 고분의 연대는 모두 4세기임.
이상과 같이 보고문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환인 미창구 장군묘의 시대는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해당되지만, 장천 2호분은 구조와 벽화내용, 부장유물과 출토 기와들을 종합해 볼 때 4세기말이나 5세기초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음.
벽화의 의의
장식무늬 화법 : 장군묘는 耳室을 제외하고 주실 전체를 연화로 장식함. 연화는 측면연화로 이런 장식무늬 위주의 화법은 비교적 단조로우며 파악이 쉽지 않고, 일정 회화 수준에서 그리기 어렵지 않음. 그러나 전체 화면에서 본다면 배치가 합리적이고 구조가 정연하며 천장 고임부의 측면연화는 가로·세로, 좌·우 모두 열을 이룬 장식무늬위주의 화법은 지금까지 드물어서, 고구려민족의 회화예술사를 연구하는데 새로운 자료임.
불교적 세계관-연화문 : 장군묘 벽화의 주제인 연화문는 당시 고구려인의 불교 숭배와 관련됨. 불교가 고구려에 전파된 후 왕족 및 귀족를 거쳐 민간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 특히 장군묘 묘실 안 전체를 연화로 장식한 것은 묘주인의 불교 신앙과 숭배를 반영한 것이며, 연화정토의 경계에 대한 갈구를 표현한 것임. 이는 불교가 당시 사회에서 성행했던 사실을 보여주며, 중국내 고구려 벽화고분 20여기 가운데에 연화가 표현된 것은 16기인데, 장군묘 이외에 집안 舞踊墓, 장천 1호묘, 오회분 4호묘 등이 있음.
묘실의 고임돌의 변형연화는 火焰狀과 같고 물결이 움직이는 듯한 형상이며, 바닥부 형상은 개구리 발과 같으며 둘씩 서로 붙어 있음. 이 도안은 묘주인 부부가 받침과 연꽃같이 떨어지지 않고 연화정토속에서 화생하여 극락세계에 함께 이르는 것을 상징함. 이런 연화 도안 역시 벽화에서 최초로 발견되어 벽화예술에 신자료를 제공함.
묘주의 신분과 중원문화의 영향-용무늬·流雲王字 도안 : 용무늬는 묘실 네 벽에는 들보가 그려져 있는데, 그 위의 용무늬를 장식은 이전의 벽화에서 볼 없는 최초의 예로, 고구려에서도 용의 형상과 그 의미에 대해 이미 이해하고 있던 것을 보여줌. 중원지구에서 용의 형상은 비교적 일찍 출현하는데 용은 富貴·吉祥·神權 등을 대표하며, 용의 형상은 더욱 복잡해지고, 제왕에게 독점되어 권력의 상징이 됨. 이 고분벽화의 용무늬는 고구려민족이 끊임없이 중원문화의 영향을 받았던 사실과 용을 부귀의 길상물로 여겼던 사실을 보여주며, 동시에 묘주인이 고구려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졌다고 짐작케 함, 流雲王字는 고임돌의 하부와 이실 안의 流雲王字 도안은 장천2호묘 벽화에 이미 발견되었음. 이 유운왕자 도안은 權貴를 상징하므로, 王字 역시 묘주인의 특수한 신분과 지위를 보여주는 사례로, 장군묘 봉토는 高大하여 묘주인의 권세와 특수한 신분을 보여줌.
죽음에 대한 인식-장고무늬 : 용무늬의 사이에 장고형 도안은 최초의 예로 가장 이른 시기의 장고 형상으로 오늘날 한국의 악기인 장고와 유사함. 장고 도안은 묘주가 연화가 가득한 정토속에서 화생하여 歌舞太平의 극락세계에 도달하는 것을 표현함. 또한 『北史』 고려전에 고구려인이 사후 장사지낼때 “鼓舞以作樂 以送之”하는 습속이 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장고는 고구려인이 죽음은 일종의 초탈이며 인간세상의 고해에서 벗어나 극락세계에 오르는 기쁜 일임을 상징함.
고분의 주인공
장군묘의 축조규모는 웅장하며, 구조는 빈틈없고, 제작은 정밀하고, 묘실벽은 모두 가공을 거친 대석으로 축조함. 두 관대 역시 온전한 대석을 가공하여 만들었음. 부장품은 적으나 대다수가 鎏金임. 이로 미루어 묘주는 적어도 왕족·귀족의 일원일 것임.
보고자는 『삼국지』 고구려전에 의하면, 206년 이이모와 발기의 왕위쟁탈과정에서 이이모가 왕위에 오르자 발기는 公孫康에 내투하였다가 돌아가 비류수 가에 머물었다는 기록과 결부시켜 묘주를 국내(집안)에서 졸본(환인)으로 옮겨간 발기세력과 유관하다고 추정함.
任傳興은 장군묘를 2차 遷葬한 주몽과 왕후의 합장묘로 보는 견해를 제시함, 寧會學은 주몽이 죽은 해와 고분이 축조된 시기 차이가 크고, 묘제가 맞지 않으며, 연화문 벽화는 불교수용이후 축조되었을 것이며, 고구려 매장습속에 ‘遷葬’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비판하고, 장군묘의 주인공을 고국양왕 부부로 비정하고 함. 장군묘는 연화문벽화로 고분벽화의 내용에 따른 시기구분상 대략 기원 370~380년에 해당되며 이 시기는 소수림왕과 고국양왕대로, 고구려왕의 시호는 장지명을 따르고 있는데, 여러 왕들에게서 보이는 ‘故國’이란 시호 역시 ‘고국’이란 장지에 의해 붙여진 것임. 즉 ‘고국’은 고구려의 첫번째 수도를 지칭한 표현으로 오늘날 환인지역으로, 장군묘 건축시기 ‘고국’이란 장지명 시호를 가진 ‘고국양왕’이 장군묘의 묘주라고 주장.
수공제작술과 고분제작술의 발달
수공업제작술 : 장군묘에 부장된 鎏金銅飾件, 細如蠶絲의 金線, 대량의 철제공구 등은 고구려의 수공제작·冶鐵鍛造 기술이 일정 발전했던 것을 보여주며, 고구려시기의 경제상황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실물자료 제공함.
분구 축조술 : 봉토분구가 지금까지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고구려인이 건축방면에서 상당한 수준의 기술에 이르렀던 사실을 보여줌. 묘실 외부를 거석으로 보강하고 목탄·백회·진흙 등으로 깔은 방수시설, 황토 모래로 다져 지표면의 수분과 토사가 유실되지 않도록 하였으며, 봉토 동쪽과 북쪽의 부석시설은 묘실을 보강과 함께 종교와 예속 방면의 의미를 내포함.
매장습속
장군묘에서는 黃釉四耳展沿罐 3건이 출토된 것이 3이라는 홀수조합을 보여주는 사례가 고구려 장속의 하나인지는 좀 더 많은 발견을 기다려 볼 필요가 있음.
장군묘 남부의 봉토 중에 묘실 벽에 바짝 붙어서 大條石이 발견되었고, 하부에는 뒤집어진 靴形石 및 帶方孔의 판석이 확인됨. 이는 묘주인의 후손이 묘주인에게 비를 세워 공덕을 노래하기 위해 준비했으나 어떤 이유로 글자를 새기지 못하고 흙속에 묻었던 것으로 보임. 봉토 속에서 출토된 화형석는 고구려 장속의 일종으로, 장군묘 부근 5호묘의 墓道口 위에도 역시 화형석이 있으나 가공이 비교적 거칠음.
장군묘 주위의 소형묘들이 장군묘의 주위를 둘러싸고 분포한다는 점에서 장군묘의 배장묘로 보임. 배장묘는 장군묘와 동일시기 또는 장군묘보다 늦은 시기임. 배장묘는 刀形墓(6·7호)와 鏟形墓로 나뉨. 도형묘와 산형묘는 시기의 선후관계를 가진다고 봄. 소형묘는 두기씩 짝을 이루고 있으며(6·7호묘, 11·12호묘, 2·3호묘), 이것은 고구려 장속연구를 위한 새로운 자료를 제공함.
자연환경
정북 방향 약 10㎞ 거리에 환인현성이, 미창구 장군묘에서 동북 16㎞ 거리에 오녀산 산성이 있고, 서북 13㎞ 거리의 육도하자향에는 하고성자성터, 그 북쪽에는 상고성자 고분군이 자리함, 서북방향으로 동선영촌과 강을 마주보고 있으며, 동선영에는 고구려 시기 적석총이 있음.
유물정보
시유도기(釉陶器) 4건, 금동기류(銅器)類 15건(금동제 띠고리(鎏金銅帶扣) 1건, 금동제 운주(鎏金銅鈴形飾件) 2건, 금동제 관장식(鎏金銅八瓣花形飾件) 2건, 금동제 띠고리(鎏金銅扣飾件) 1건, 금동제 단추장식(鎏金銅泡飾件) 1건, 금동제 장식(鎏金銅錢形飾件) 1건, 금동제 장조형장식(鎏金銅長條形飾件) 1건, 금동제 장식(鎏金銅䤩尾 1건, 금동제 비녀(鎏金銅簪) 1건, 동제장식(桃形銅飾片) 1건, 동제 단추장식(銅泡飾件) 1건, 동제 못(銅釘) 2건), 금기류(金器類) 2건(금제 요엽(桃形金搖葉) 1건, 금제 단추장식(金泡形飾件) 1건), 철기류(鐵器類) 7건(철제 날(鐵鍘刀) 1건, 철제 삽(鐵鏟) 1건, 철제 송곳(鐵穿頭) 1건, 철제 등잔(鐵燈碗) 1건, 철제 못(方帽鐵釘) 1건, 철제 못(鐵扒釘) 1건), 화형석(靴形石) 1건, 목제안장편(木馬鞍橋殘塊) 1건, 회색토기 대상파수(灰陶橋狀耳) 1건 등.
참고문헌
·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編纂委員會, 『桓仁滿族自治縣文物志』, 1990
· 武家昌·魏運亨, 「桓仁發現高句麗壁畵大墓」『中國文物報』 9, 1992
· 武家昌, 「遼寧桓仁高句麗壁畵墓」『中國文物報』 18, 1993
· 辛占山, 「桓仁米倉溝高句麗“將軍墓”」『東北亞文明的源流的考古學硏究』, 1993
· 劉伊丹, 「淺談桓仁米倉溝高句麗將軍墓壁畵」『遼海文物學刊』 副刊, 1994
· 武家昌, 「桓仁米倉溝將軍墓壁畵初探」『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李春琴·孫雪蓮, 「桓仁高句麗壁畵」『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출판사, 2000
· 武家昌·梁志龍·王俊輝, 「桓仁米倉溝高句麗壁畵墓」『遼寧考古文集』, 遼寧民族出版社, 2003
· 寧會學, 「桓仁米倉溝將軍墓墓主考」『博物館研究』 2004-3, 2004
· 寧會學, 「桓仁米倉溝將軍墓所葬何人」『東北史地』 2004-4, 2004
· 武家昌·魏運亨, 「桓仁發現高句麗壁畵大墓」『中國文物報』 9, 1992
· 武家昌, 「遼寧桓仁高句麗壁畵墓」『中國文物報』 18, 1993
· 辛占山, 「桓仁米倉溝高句麗“將軍墓”」『東北亞文明的源流的考古學硏究』, 1993
· 劉伊丹, 「淺談桓仁米倉溝高句麗將軍墓壁畵」『遼海文物學刊』 副刊, 1994
· 武家昌, 「桓仁米倉溝將軍墓壁畵初探」『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李春琴·孫雪蓮, 「桓仁高句麗壁畵」『高句麗歷史與文化』, 吉林文史出版社, 2000
·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출판사, 2000
· 武家昌·梁志龍·王俊輝, 「桓仁米倉溝高句麗壁畵墓」『遼寧考古文集』, 遼寧民族出版社, 2003
· 寧會學, 「桓仁米倉溝將軍墓墓主考」『博物館研究』 2004-3, 2004
· 寧會學, 「桓仁米倉溝將軍墓所葬何人」『東北史地』 2004-4,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