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사(龍潭寺)
유적명
적산산성(赤山山城)
구조특징
‘용담사(龍潭寺)’는 도교와 관련이 있는 사원으로, 그 이름은 사원 동남쪽에 있는 ‘용담(龍潭)’이라고 불리는 저수지 이름에서 유래함. 용담사는 네 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면적이 비교적 큰 높은 고지 위에 자리 잡고 있음.
사원의 방향은 북쪽에 자리 잡고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현재 정전 1칸(正殿 1間), 배전 2칸(配殿 2間), 행랑채 4칸(廂房 4間), 산문(山門)이 있음. 정원 안에는 다수의 비석과 돌로 만든 절구 등의 유물이 있음. 사원 안에는 기공비(凯捷碑(1963년 개주시 인민정부는 현급문물보호단위로 공포함))와 청조 광서(淸朝 光緖) 4년의 “重修赤山龍潭寺三淸殿碑” 등 청대 석비 5통(淸代 石碑 5通)이 있음. 이 외에 『명대중수용담사조불안선비(明代重修龍潭寺造佛安禪碑)』1통이 있음. 『영구시문물지(營口市文物志)』에 비명(碑銘)이 기재되어 있음. 명문의 내용은 “重修龍潭寺造佛安禪記 / 賞聞山不在高有仙則名 / 水不在深有龍則灵 / 陟此山之巅 / 玩此山之景 / 其名且灵靡可殚述 / 姑举一二以鸣兵盛 / 城坦屏翰於外 / 其即曰肢之荣卫矣乎 / 龙潭停毓於中 / 其即心渊之活泼矣乎 / 至若回光返照之志 / 明示末路之當当 / 有悬并潆回之异 / 熟非歌器之戒 / 盈卓哉 / 佳境不可无禅林 / 而禅林不可不美大也 / 忆昔唐貞觀十九年 / 有太宗因盖苏文弑君虐民 / 又阻新罗入贡 / 不奉诏命 / 遂亲征高丽驻跸此山 / 谓薛仁贵曰 / 朕不愿得辽东 / 愿得一卿也 / 仍望山头石人 / 视曰 / 雪耻酬有王 / 除凶报千古 / 艳上暴晚 / 照行幸上 / 随遣职方郎中陈大德建 / 因班师而名曰凯旋寺 / 彼时庵仅三间 / 草创未备 / 岁久因循 / 座生荆棘 / 迨刘普明诚普欠充拓 / 思绵力未之何 / 齐心默祷感动檀那 / 始也 / 生员曹公讳中式肄业於此 / 率众以建昔阁 / 继也 / 致侍严君讳愈庆 / 新增殿宇 / 雯诚以造□宝莲佛圣像鳞集规模丕振矣 / 安禅百日图报神人矣 / 而又为之感众 / 以修盘道助工以勤修缮 / 虽十方响应者不可枚举 / 而主持引领者□(아래 파손)/ 明万历四十四年”임. 이 비문은 주로 적산 용담사(赤山 龍潭寺)와 관련 있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지만, 적산산성(赤山山城)과 관련하여 중요한 정보도 담고 있음. 당 태종(唐太宗)이 정관(貞觀) 19년(645) 고구려 원정을 떠났을 때 주필산(駐蹕山)에 머물렀는데, 교지를 내려 개첩사(凯捷寺)를 축조하였다고 함. 즉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나갈 때 이 산에 머물렀다는 것임. 이 기록은 고구려 원정 당시, 당군이 적산(赤山)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보여줌.
사원의 방향은 북쪽에 자리 잡고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현재 정전 1칸(正殿 1間), 배전 2칸(配殿 2間), 행랑채 4칸(廂房 4間), 산문(山門)이 있음. 정원 안에는 다수의 비석과 돌로 만든 절구 등의 유물이 있음. 사원 안에는 기공비(凯捷碑(1963년 개주시 인민정부는 현급문물보호단위로 공포함))와 청조 광서(淸朝 光緖) 4년의 “重修赤山龍潭寺三淸殿碑” 등 청대 석비 5통(淸代 石碑 5通)이 있음. 이 외에 『명대중수용담사조불안선비(明代重修龍潭寺造佛安禪碑)』1통이 있음. 『영구시문물지(營口市文物志)』에 비명(碑銘)이 기재되어 있음. 명문의 내용은 “重修龍潭寺造佛安禪記 / 賞聞山不在高有仙則名 / 水不在深有龍則灵 / 陟此山之巅 / 玩此山之景 / 其名且灵靡可殚述 / 姑举一二以鸣兵盛 / 城坦屏翰於外 / 其即曰肢之荣卫矣乎 / 龙潭停毓於中 / 其即心渊之活泼矣乎 / 至若回光返照之志 / 明示末路之當当 / 有悬并潆回之异 / 熟非歌器之戒 / 盈卓哉 / 佳境不可无禅林 / 而禅林不可不美大也 / 忆昔唐貞觀十九年 / 有太宗因盖苏文弑君虐民 / 又阻新罗入贡 / 不奉诏命 / 遂亲征高丽驻跸此山 / 谓薛仁贵曰 / 朕不愿得辽东 / 愿得一卿也 / 仍望山头石人 / 视曰 / 雪耻酬有王 / 除凶报千古 / 艳上暴晚 / 照行幸上 / 随遣职方郎中陈大德建 / 因班师而名曰凯旋寺 / 彼时庵仅三间 / 草创未备 / 岁久因循 / 座生荆棘 / 迨刘普明诚普欠充拓 / 思绵力未之何 / 齐心默祷感动檀那 / 始也 / 生员曹公讳中式肄业於此 / 率众以建昔阁 / 继也 / 致侍严君讳愈庆 / 新增殿宇 / 雯诚以造□宝莲佛圣像鳞集规模丕振矣 / 安禅百日图报神人矣 / 而又为之感众 / 以修盘道助工以勤修缮 / 虽十方响应者不可枚举 / 而主持引领者□(아래 파손)/ 明万历四十四年”임. 이 비문은 주로 적산 용담사(赤山 龍潭寺)와 관련 있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지만, 적산산성(赤山山城)과 관련하여 중요한 정보도 담고 있음. 당 태종(唐太宗)이 정관(貞觀) 19년(645) 고구려 원정을 떠났을 때 주필산(駐蹕山)에 머물렀는데, 교지를 내려 개첩사(凯捷寺)를 축조하였다고 함. 즉 당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나갈 때 이 산에 머물렀다는 것임. 이 기록은 고구려 원정 당시, 당군이 적산(赤山)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을 보여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