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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문화유산자료

마가채산성(馬家寨山城)

  • 구분
    유적
  • 시대
    고구려
  • 위치
  • 유물번호
    S000898
  • 위치(출토지)
    遼寧省 開原市 馬家寨村
  • 지역
    철령(鐵嶺市)
  • 유형
    성곽>산성
출토지
요녕성 개원시 마가채촌(遼寧省 開原市 馬家寨村)
조사내용
연도조사기관조사현황
1980철령시문물관리소
(鐵嶺市文物管理所)
1980년대 이래 철령시 문물관리소에서 여러 차례 조사함.
1985 1985년 9월 1일 철령시 문물보호단위로 공포됨.
구조특징
마가채산성의 지세는 험준하며, 산성의 북쪽은 높고 남쪽이 낮으며, 말발굽 모양의 산세를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음. 전체 둘레는 약 1,488m(약 1.5㎞)임. 네 성벽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함.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구간은 남벽의 동단, 동벽의 중단, 북벽의 서단, 서벽의 남쪽 구간 등임. 산 정상에서 하천변까지 외곽 성벽(토벽)을 쌓았음.
성벽은 산등성이를 따라 축조하였고, 성벽의 축조는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남벽과 동벽은 마사토와 깬돌(쇄석)을 혼합하여 다져 축조하였음. 벽체는 대부분 허물어졌으며 산등성이와 일체를 이루어 구별하기 어려움. 북벽과 서벽은 대부분 쐐기형 돌로 축조하였는데, 일찍이 벽체를 마사토로 다져 축조한 적이 있음. 자세히 조사한 결과 돌로 쌓은 벽체를 확인할 수 있음(북방문물; 철령의 고고와 역사 225).
동벽 바깥은 마가채 댐임. 댐을 아직 건설하지 않았을 때, 그 아래는 자하(紫河)지류인 사하(沙河)가 흐르고 있었으며, 성벽은 높은 곳에 임해 아래에 잇닿아있는데 수직 고도가 약 30m에 가까움. 지세가 특히 험함. 동벽 부분의 벽체 구간은 돌출한 암벽을 이용한 천연 벽체임. 다만 연결해서 쌓은 곳은 현재 선명하지 못함. 동벽의 남단에서 벽체 위에 4개의 서로 연결된 트인 곳(豁口)이 남아 있음. 트인 곳(豁口)의 평균 너비는 2~3m임. 그 내측은 성을 둘러싼 회곽도이며, 회곽도의 너비 3~6m로 균일하지 않음. 남벽 구간의 성문 통로와 서로 연결되어 비상시에 통로를 이용하였을 것임.
북벽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며, 특히 서쪽 구간(西段)이 가지런하게 잘 남아있음. 기단부 너비 2.5m, 잔고(殘高) 2m이며, 성벽 최대 잔존 높이는 약 5m임.
서벽은 대부분 산등성이 바깥쪽에 조축하였음. 성벽 내측의 산등성이에서 돌과 흙을 채취하여 성벽을 축조하였는데 외벽의 높이가 높을 뿐 아니라 내벽도 흙을 채취해서 벽체의 높이를 높게 할 수 있었음. 또한 흙을 채취한 다음 형성된 도랑은 통신 연락용 회곽도 및 방어진지로 사용할 수 있었음. 다만 성 내측의 도랑 조성 시기는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음. 1990년대 조사 당시 성벽과 산등성이 사이 도랑(溝)의 너비는 약 10m, 깊이 2m, 길이 34m였음.
남벽 서쪽과 동쪽 구간은 산등성이 바깥쪽 또는 산등성이를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음. 골짜기 입구인 남벽 중단의 평탄지에는 황갈색 사질토(砂質土)와 회갈색 니토(泥土)를 번갈아가며 판축하였음. 외벽의 허물어진 단면을 통해 사질토층(7~8㎝), 점토층(2.5~3㎝), 간층(0.5㎝) 등을 번갈아 판축한 층위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음. 성벽 단면은 사다리꼴로서 기단부 너비 8m, 높이 4.6m, 윗면 너비 1.5m, 전체 길이 40m 전후임. 종전에 마가채 중학교 정문이 있던 자리에도 높이 5m, 길이 10m의 토축성벽이 있었다고 함.
북벽 동단의 바깥쪽 비탈 아래에 남북방향의 골짜기(溝谷) 입구(谷口)에 토벽을 가로로 구축해 놓았는데, “차단벽(墻外墻)”임. 차단벽은 산성의 성벽과 접속해서 구축한 것이 아님. 남북 방향의 골짜기(溝谷) 길이는 약 300m 이고, 차단벽의 규모는 높이 15m, 길이 80m 정도임.
산성 서벽과 남벽이 만나는 곳에 서향으로 뻗어있는 벽체 하나가 있고, 벽체의 양측에 마을 주민들이 “고려호(高麗壕)”라 부르는 깊은 참호(溝)가 파여 있음. 성벽의 서남모서리에서 시작된 토벽은 동서방향의 산등성이를 따라 가다가 ‘V’자형으로 꺾여 해발 187.9m의 산봉우리 정상까지 이어짐. 그런 다음 이 산봉우리의 남측 산비탈을 따라 내려와 마가채촌 소학교 서벽 외측을 지나 계속 남향으로 사하(沙河)(정리자 주: 원문의 자하는 사하의 착오로 판단됨)까지 이어짐. 사하의 남안에서 토벽(土墻)이 다시 출현하여 서남방향으로 뻗어 가다 삼가촌(三家村) 북산의 서쪽 산비탈까지 이어짐. 보존상태를 살펴 보면 마가채 소학교 서쪽 바깥에 성벽 기초부와 벽체가 남아 있음. 잔고는 1.6m, 기초 너비 2m, 윗 너비 0.5m임. 재료나 구축방법은 산성 남벽 중단의 토축성벽과 유사함.
역사적 의미
대형산성의 과도성(過渡城), 위성성(衛星城)설이 있음. 마가채산성은 아랍하(阿拉河)와 청하, 두 하천이 만나는 곳의 구릉산지 서단(西端)에 있어 특별히 중요한 지리적 위치에 자리하고 있음. 전쟁 발생 시 대성과 호응하여 대성을 호위, 공제하는 작용을 하며 또 중·소형 산성에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성도 병사를 파병하는 등 군사적 지원을 함. 고성자산성은 마가채산성, 용담사산성과 마찬가지로 철령 최진보산성과 서풍 성자산산성 2기의 대형산성 사이에 위치하므로, 지리위치상 2개의 대형산성과 방어체계상 연관 관계가 있을 것임(주향영·조준위·이아빙, 1996).
군사방어 및 지방거점성설이 있음. 마가채산성은 철령 청룡산산성, 개원 용담사산성, 개원 고성자산성 등 요하 상류 일대 고구려산성과 여러 측면에서 유사함. 입지조건에서 보면, 마가채산성을 비롯한 요하 상류 일대의 고구려 성들은 송료대평원에서 요하 지류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하천과 나란히 달리던 산줄기에서 하천 연안의 충적평지 쪽으로 돌출한 지형에 자리잡고 있음. 축성방식에 있어서도 산성으로 진입하는 입구에는 제방과 같은 거대한 토축성벽을 구축한 반면, 성을 둘러싼 산등성이에는 대체로 흙을 성토(盛土)한 토벽 혹은 토석혼축성벽을 쌓았음. 그러므로 마가채산성은 요하 상류일대의 다른 고구려산성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고, 성격과 기능도 유사하였다고 추정됨. 입지조건을 볼 때 마가채산성은 송요대평원에서 사하연안으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하였다고 추정됨. 더욱이 마가채산성에서 사하 상류를 따라가면 혼하상류나 휘발하 일대로 통하는 시하 연안이 나온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함. 그리고 산성 서쪽 산등성이와 소항시 연안의 토벽이나 북벽 바깥쪽 골짜기의 토벽 등은 마가채산성이 사하 하류에서 상류로 진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줌. 한편 마가채산성은 둘레 1.5㎞로 서풍 성자산산성, 철령 최진보산성 등의 대형산성보다 한 등급 아래인 중형산성으로 분류되지만 주거용 공간은 비교적 넓은 편임. 성 중앙에는 사찰이 들어설 정도로 평탄한 대지가 있으며, 산등성이 안쪽 경사면에도 계단상 대지를 만들어 주거용 공간으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됨. 따라서 마가채산성도 다른 고구려산성처럼 군사방어뿐 아니라 지방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 기능하였다고 추정됨. 마가채산성은 송료대평원에서 사하·시하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를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함께 사하·자하 연안일대를 지배하기 위한 지방 거점성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였다고 추정됨(여호규, 1999)
고구려 연진성(延津城)설이 있음. 고구려 멸망이후 당이 요동지역의 고구려고지에 연진주를 설치하였는데, 『요사(遼史)』지리지에는 동경도(東京道) 은주(銀州) 연진현(延津縣)(발해의 부수현(富壽縣)) 경내에 연진고성(延津故城)이 있다고 나옴. 요대(遼代)의 은주는 철령이므로 연진주(延津州)는 대체로 철령 동북방 10㎞ 거리에 위치한 마가채산성으로 비정됨(왕면후, 1986; 왕면후, 1994; 풍영겸, 1994)
자연환경
개원시 동남쪽 27㎞ 떨어진 마가채촌 북쪽 약 100m의 요(凹)자형 산골짜기에 위치함. 마가채산성 내부에는 마가채 중학교가 있었는데 2006년에 구정용천사(九鼎龍泉寺)라는 사원이 들어섰음.
마가채산성은 서북에서 동남 방향으로 길게 뻗은 산줄기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음. 산줄기로 이어지는 서북을 제외한 나머지 방면은 하천이나 충적 평지와 잇닿아 돌출지형을 이루고 있음. 동쪽과 남쪽으로는 사하(沙河)가 구불구불한 물길(流路)을 따라 산성의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강 연안에는 폭 1~2㎞의 충적평지가 기다랗게 펼쳐져 있음. 산성의 서쪽으로는 단자산(担子山)에 접해 있으며, 동벽 아래에는 마가채 댐이, 남쪽으로는 마가채촌이 넓게 펼쳐져 있음. 사하는 소규모 하천으로 서쪽으로 10㎞ 정도 흘러가다가 개원·철령 경계지점에서 사하 본류와 합류한 다음 곧바로 요하로 유입됨. 그리하여 사하 연안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면 송료대평원에 도달하며, 송료대평원을 통해 요하 하류나 상류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음. 또 동쪽으로 사하 상류를 따라 10㎞ 정도 가면 자하(紫河) 연안이 나옴. 자하는 길림합달령산맥(吉林哈達嶺山脈) 서쪽 사면에서 발원하 요하의 지류 가운데 비교적 큰 하천으로 각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가 잘 발달하였음. 특히 마가채산성을 기준으로 볼 때, 동쪽으로 자하 상류를 거슬러 혼하(渾河) 상류나 휘발하 방면으로 나아갈 수 있음. 마가채산성은 송료대평원에서 사하를 거쳐 자하 연안으로 진입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음.
유물정보
능형격자문암키와(菱形格文板瓦) 1점, 격자문암키와(方格文板瓦) 1점, 철촉(鐵鏃) 1점
참고문헌
· 王綿厚, 「隋唐遼寧建置地理述考」『東北地方史硏究』 1986-1, 1986
· 王禹浪·王宏北, 『高句麗·渤海古城址硏究匯編』 (上), 합이빈출판사, 1994
· 曹桂林·王鐵軍, 「鐵嶺境內五座高句麗山城簡介」『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王綿厚, 「鴨綠江右岸高句麗山城硏究」『遼海文物學刊』 1994-2, 1994
· 馮永謙, 「高句麗城址輯要」『北方史地硏究』, 中州古籍出版社, 1994
· 陳大爲, 「遼寧高句麗山城再探」『北方文物』 1995-3, 1995
· 周向永·俊偉·李亞氷, 「遼寧開原境內的高句麗城址」『北方文物』 1996-1, 1996
· 余昊奎, 『高句麗 城』 Ⅱ(遼河流域篇), 國防軍史硏究所, 1999
· 李龍彬, 「鐵嶺境內高句麗山城的幾個問題」『東北史地』 2008-4, 2008
· 國家文物局, 『中國文物地圖集』 遼寧分冊, 西安地圖出版社, 2009
· 周向永·許超, 『鐵嶺的考古與歷史』, 遼海出版社, 2010
· 魏存成, 「中國境內發現的高句麗山城」『社會科學戰線』 2011-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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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채산성(馬家寨山城) 자료번호 : ku.d_0001_0130_0010_00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