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내로 떠밀려간 한국인들
강제동원 노동자 82%가 갱내 노동
사도광산의 갱에서 암반을 뚫고 기둥을 세우며 광석을 나르는 중노동은 대부분 한국인 노동자의 몫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광산 현장에 익숙하지 않았던 농민들이었습니다.
[통계] 사도광산 직종별 배치상황(1943년 5월 현재)
연도 | 동원수 | 상세내용 |
1940 | 646 | 2월 98명 / 5월 248명 / 12월 300명 |
1941 | 280 | 6월 153명 / 10월 127명 |
1942 | 79 | 3월 79명 |
1944 | 263 | 1월경 / 7월 등 |
1945 | 251 | 1월 / 3월 |
합계 | 1,519 |
사도광업소 「반도노무관리에 대하여」 1943
위험한 갱내 작업을 대신하기 위해 동원된 한국인
한국인이 동원되기 전 갱내 노동은 일본인이 담당했습니다. 사도광산 노무동원 담당자는 한국인을 동원한 이유를 “일본인 갱내 노동자 중 규폐(진폐) 환자가 많아서 광산 채굴 실적이 기대에 못 미치고 일본 청년들은 차례로 군대에 가야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사도광산은 징병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한 원인도 있지만, 건강을 위협하는 갱내 노동을 한국인 동원으로 해결하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사도광산은 1930년대 중반까지 중간착취자가 다수의 광부를 통제하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헤야제도(部屋制度)’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일본인 노동자들이 사도광산의 무리한 노무관리에 항의하고 파업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폭력적인 노무 시스템과 광산병이 속출하는 현장으로 한국인들이 떠밀려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