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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 발행자
    동북아역사재단
  • 발행일
    2024년 3월 16일

1790년 5월 27일 청나라 수도 북경을 방문하기 위해 출발한 조선 사신단.
압록강을 건너기 전인 6월 21일 청나라에서 한 통의 공문을 받습니다.
조선국 사신은 7월 10일 이전까지 열하에 도착하여 연회에 참석하라.
원래대로라면 8월 13일 북경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건륭제의 생일을 맞아 열하에서 잔치를 베풀고 각국 사신들을 초청할 예정이니 조선 사신도 이곳에 와서 참석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신단의 경로가 바뀌게 됩니다. 심양에서 일행을 나눠 급하지 않은 짐들은 큰길을 따라 연경으로 향하게 하고, 나머지는 가벼운 몸으로 열하로 향하게 된 것이죠. 조선 사신단으로서는 처음 가보는 길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실학자 유득공이 포함되어 있었는데요, 그는 열하까지 갔던 여정을 기록해 『열하기행시주 』를 저술하였습니다. 처음 가는 길이었기에 다음에 올지도 모를 사람들을 위한 이정표로 삼고자 한 것이죠.
유득공은 이전에도 청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첫 사행길에 요동 땅을 지나며 발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발해고』를 남기기도 했죠.
유득공은 발해가 고구려인이 고구려 땅에 세운 나라라고 여겼고, 신라와 아울러 남북국사로 봐야 한다고 여겼죠. 발해의 역사를 뺀 것은 우리 민족의 반쪽짜리 역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발해고』를 쓰게 된 것이죠.
유득공은 세 번에 걸쳐 청나라에 다녀왔는데, 이런 경험은 그의 역사 저술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1790년의 사행은 두 번째 청 방문이었죠. 그는 사신의 구실에 대해서도 의견을 남겼습니다.
『예기』에 이르길, “잘하는구나! 타국의 형편을 엿봄이여”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사신의 직분이다. (중략) 번갈아 서로 속이니, 어느 겨를에 눈이 되고 귀가 될 수 있으랴!
사신단은 고하를 막론하고 자기 직분에 충실해야 함에도, 사리사욕을 앞세우거나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이가 있다면서 한탄한 말입니다.
그는 사행길을 통해 듣고 보는 것 또한 사행의 목적이자 정보수집이라 여겼기에 타국의 언어에도 관심이 많았죠. 단순히 청에 오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외교관으로서 나라에 도움 될 만한 방안들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여러 기록을 남겼습니다. 열하에서 만난 여러 지역의 왕이나 사신에 대해 인물평을 남기기도 했고, 이를 통해 각 지역의 긴장 관계나 권력 구조를 유추해 보기도 했죠. 또 연경에서는 청나라 신하 가운데 실세가 누구인지 조심스레 탐문해보기도 했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해외 첩보 활동을 한 셈입니다. 이 과정에서 그의 능숙한 중국어 실력이 유용했습니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오는 사행길 막바지, 봉황성에 이르러 그의 역사 인식이 다시 한 번 드러나게 됩니다.
봉황성 동쪽으로 압록강이 둘렀고, 서쪽은 요양과 심양을 엿본다. 북쪽으로 건주를 누르고, 남쪽으로 큰 바다를 끌어당기고 있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땅이다.
유득공은 고려와 거란이 압록강을 경계로 삼았기에 거란이 압록강을 넘어 침입할 수 있었다고 여겼습니다. 압록강이 아닌 그 너머 봉황성을 차지했으면 그럴 일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죠. 이에 봉황성이 우리나라의 입구여야 마땅하다고 보았습니다.
『발해고』에서 그는 우리나라의 근본이 고구려라 하고, 고구려와 발해는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금이 망했을 때 압록강 서쪽을 고려가 얻을 만했다고 여겼죠. 그럼에도 고려의 서쪽 경계가 압록강에 그친 현실을 안타까워 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진심을 드러낸 것을 보고도 진심을 표현하지 않아도 되겠는가? (중략) 역대의 사변, 싸우고 지킴의 강약, 산천의 요새, 성읍의 연혁을 깊이 이해하는 것을 말함이다.
당시 요동의 정세는 평화로웠지만 청이 봉황성, 거류하 등지에 성을 쌓는 등 관심을 쏟고 있는 만큼 우리도 주의가 필요하다는 당부도 잊지 않습니다.
유득공은 사행 이후로도 국제 정세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조선을 비롯한 청, 몽골, 일본뿐 아니라, 지금의 오키나와 지역인 유구국, 러시아, 네덜란드, 영국 등에 관한 생각도 『고운당필기』에 남겼죠.
유득공은 주자서의 좋은 판본을 구하라는 정조의 명으로 다시 한번 사행을 떠납니다. 하지만 구할 수 없었죠. 조선과 달리 청에서는 주자학의 학문이 통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0여 년 뒤 청나라는 영국과 싸움에서 패하고 서구열강과의 통교를 시작하게 됩니다. 조선의 앞날 또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되죠.
세상은 넓고 나라는 많으니, 이를 적극적으로 경험하는 것과 모르는 체 현상유지를 도모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조선을 넘어 보다 넓은 세상을 마주한 유득공은 조선의 앞날을 어떻게 전망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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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사 전문 외교관, 유득공 자료번호 : ismm.d_0000_0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