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쉬이 못 오는 귀향
1937년 중일전쟁을 시작으로 1945년까지 아시아와 태평양 일대를 침략했던 일본은 전쟁을 수행할 사람과 자원이 끊임없이 필요했습니다.
조선인과 조선의 자원 또한 일방적으로 동원되기 시작합니다. 청년과 학생, 부녀자들까지 예외가 없었는데요. 이때 연인원 약 780만 명이 강제 동원되었고(출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이 중 최소 약 125만 명이 조선 땅을 떠나 아시아와 태평양 곳곳으로 강제 동원됩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각지로 동원된 조선인들이 고국으로 귀국했지만, 일부는 죽어서, 또 일부는 살아서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조선인과 조선의 자원 또한 일방적으로 동원되기 시작합니다. 청년과 학생, 부녀자들까지 예외가 없었는데요. 이때 연인원 약 780만 명이 강제 동원되었고(출처: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이 중 최소 약 125만 명이 조선 땅을 떠나 아시아와 태평양 곳곳으로 강제 동원됩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각지로 동원된 조선인들이 고국으로 귀국했지만, 일부는 죽어서, 또 일부는 살아서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합니다.
구소련, 지금은 러시아의 영토인 사할린.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사할린 남부를 손에 넣습니다.
군사적 요충지였던 사할린은 석탄과 산림 등의 자원이 풍족했지만, 극복하기 힘든 문제가 있었는데요. 바로 엄청나게 추운 날씨와 폭설입니다.
이처럼 가혹한 환경에서 노동력을 동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이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 의해 사할린에 강제 동원됩니다. 이때 동원된 사람의 수가 최소 3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사할린 남부를 손에 넣습니다.
군사적 요충지였던 사할린은 석탄과 산림 등의 자원이 풍족했지만, 극복하기 힘든 문제가 있었는데요. 바로 엄청나게 추운 날씨와 폭설입니다.
이처럼 가혹한 환경에서 노동력을 동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고, 이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 의해 사할린에 강제 동원됩니다. 이때 동원된 사람의 수가 최소 3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사할린 강제 동원 한인들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지역에 동원된 조선인들과 달리, 사할린 한인들은 살아있음에도 고향에 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패망으로 남사할린을 되찾은 소련은, 이곳에 있었던 한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려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사할린에 남겨졌던 자국민 송환에만 열을 올리고, 강제로 끌어왔던 한인들을 이제는 일본인이 아니라며 방치합니다. 심지어 일본은 미·소 협정 과정에서는 한인들의 귀환을 반대하기도 했죠.
고향은 너무나 멀었고, 남은 한인들이 갈 곳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할린에 남겨졌고, 고된 노동은 계속됐습니다. 단지 노동을 강제하는 주체만 일본에서 소련으로 바뀌었을 뿐이죠.
일본의 패망으로 남사할린을 되찾은 소련은, 이곳에 있었던 한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려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사할린에 남겨졌던 자국민 송환에만 열을 올리고, 강제로 끌어왔던 한인들을 이제는 일본인이 아니라며 방치합니다. 심지어 일본은 미·소 협정 과정에서는 한인들의 귀환을 반대하기도 했죠.
고향은 너무나 멀었고, 남은 한인들이 갈 곳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할린에 남겨졌고, 고된 노동은 계속됐습니다. 단지 노동을 강제하는 주체만 일본에서 소련으로 바뀌었을 뿐이죠.
또한 일본의 퇴각 과정에서 한인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45년 8월 20일, 현재의 포자르스코예, 당시 미즈호라 불린 마을에선 소련군에 협조하는 스파이라는 이유로 스물일곱 명의 한인이 학살됐습니다.
사할린을 비롯한 소련 점령지역에 남겨진 한인 중에는 일본군의 병사나 군무원으로 동원되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포로 신분으로 시베리아 각지 수용소로 보내져 강제 노동을 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10%가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사망했다고 하니 얼마나 가혹한 환경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할린을 비롯한 소련 점령지역에 남겨진 한인 중에는 일본군의 병사나 군무원으로 동원되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포로 신분으로 시베리아 각지 수용소로 보내져 강제 노동을 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10%가 추위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사망했다고 하니 얼마나 가혹한 환경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인들은 소련 치하에서 끊임없는 감시와 견제를 받으며 숨죽여 지냈지만, 언젠간 고향에 돌아갈 것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귀환길이 완전히 막혀버리고 맙니다.
남북이 갈리게 되고, 냉전 시기를 맞으며 1990년에 이르러야 한국과 소련은 국교를 맺습니다. 그제야 사할린 한인 문제를 두고 양국 간 대화의 창이 열리게 된 것이죠.
이 과정에서 사할린에 강제동원 되었던 박노학 씨 와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사할린 한인 문제가 한·일 정치권의 관심과 정부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고, 90년 한·소 수교를 계기로 비로소 고향 방문이 이뤄지게 됩니다.
광복 이후 무려 반세기, 고향 땅을 밟기까지 걸린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사이 많은 한인 1세대들이 낯선 이국땅에 묻혀 잠들었습니다. 그들에겐 너무 늦게 열린 귀향길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귀환길이 완전히 막혀버리고 맙니다.
남북이 갈리게 되고, 냉전 시기를 맞으며 1990년에 이르러야 한국과 소련은 국교를 맺습니다. 그제야 사할린 한인 문제를 두고 양국 간 대화의 창이 열리게 된 것이죠.
이 과정에서 사할린에 강제동원 되었던 박노학 씨 와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사할린 한인 문제가 한·일 정치권의 관심과 정부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고, 90년 한·소 수교를 계기로 비로소 고향 방문이 이뤄지게 됩니다.
광복 이후 무려 반세기, 고향 땅을 밟기까지 걸린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사이 많은 한인 1세대들이 낯선 이국땅에 묻혀 잠들었습니다. 그들에겐 너무 늦게 열린 귀향길이었던 것입니다.
현재, 남사할린 전역에 걸쳐 약 1만 5천 기의 한인 묘가 확인됐습니다.
강제 동원된 사할린 한인의 수는 3만 명.
반세기가 지나도록, 아직도 많은 이들이 사할린에 잠들어 있습니다.
강제 동원된 사할린 한인의 수는 3만 명.
반세기가 지나도록, 아직도 많은 이들이 사할린에 잠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