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도성체계
1장 도성체계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주몽이 졸본(卒本), 즉 흘승골성(紇升骨城)에 고구려를 세웠고, 유류왕(유리왕)이 22년(3년)에 도읍을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겼다. 이후 장수왕이 15년(427년)에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다시 평원왕이 28년(586년)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나, 보장왕 27년(668년)에 멸망하였다. 물론, 문헌에는 도읍을 옮긴 기사(移都, 遷都, 移居 등)가 더 확인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시기에 대한 논란도 있으나, 왕도의 위치에 따라 졸본, 국내, 평양으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국의 고대 도성은 일반적으로 평지에 황제나 왕이 머무르는 궁을 보호하는 내성(內城)과 거주민의 취락 등을 둘러싼 외곽(外郭)으로 구성되어, 기본적으로는 방형 평면의 큰 성곽도시 형태를 취하였다. 그렇지만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은 고구려에는 중기까지도 도읍을 둘러싼 대형 성곽 구조가 확인되지 않으며, 6세기 후반 장안성으로 천도한 이후에야 도시를 감싸는 외성(外城)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장안성 역시 자연지형에 맞춰 석축 성벽을 쌓은 관계로 성벽의 축조방식이나 평면형태, 세부구조 등에서 중국의 도성과 큰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 도성제에 대한 그간의 연구들은 『주서(周書)』에 기록된 평양성의 내용과 개별 유적의 분포양상을 근거로 평지의 왕궁과 위급 시 사용된 배후의 산성으로 이루어졌다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914)의 주장에 대체로 동조해 왔다. 그러나 이 주장은 개별 왕성(또는 궁성)유적의 축조 및 활용 시점에 대한 고고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기 보다는 후대까지 보존된 도읍의 왕성유적을 시간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평지성과 방어용 산성이라는 고정된 틀에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다(양시은, 2021).
그렇지만 천도 기사에 등장하는 여러 성의 위치 비정이나 도성의 구조에 대해 여전히 의견이 분분한 만큼, 다음에서는 고고학 조사 내용과 그간의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고구려 도성에 대해 살펴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