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성곽
2장 성곽
고구려는 일찍부터 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독특한 방어체계를 갖추었는데, 이는 평지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고대 중원 왕조와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것이다. 건국 당시부터 한나라의 평지 토성을 접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석축 산성을 축조하였다. 군사방어를 위해 구축된 대부분의 산성은 왕도로 향하는 주요 길목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고구려 초기에는 험준한 산 정상부 위에 방어 목적의 성을 주로 축조하였으나, 영토가 확장된 중기 이후부터는 효율적인 지방 지배를 위해 거점별로 치소성도 필요하게 되었다. 고구려가 지방을 다스리기 위한 행정거점으로 성을 활용하였음은 “요동(遼東)이나 현도(玄菟) 등 수십 성에 모두 관청(官司)을 설치하여 통치(統攝)하였다”는 『주서(周書)』의 기록과 고구려가 멸망할 당시 “5부(部) 176성(城) 69만 7천 호(戶)”였다는 『구당서(舊唐書)』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들 치소성은 고구려가 요동 지역으로 진출하게 된 이후 본격적으로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특히 하곡평야(河谷平野)에 입지한 포곡식 산성은 넓은 평지가 포함된 계곡부를 감싸고 있는 경우가 많아, 위급 시에 주민을 성 내부로 피신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주민의 접근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행정 치소로서의 역할 수행이 가능하다.주 006 또 이러한 포곡식 산성에는 고구려 기와가 다량으로 수습되는 곳이 많은데, 이는 “사찰(佛寺)·신묘(神廟) 및 왕궁·관부(官府)만이 기와를 사용하였다”는 『구당서』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한편, 『한원(翰苑)』에는 고구려 지방통치의 중심지인 대성(大城)에 최고 지방관인 욕살(褥薩)이 파견되었는데, 이는 당의 지방관인 도독(都督)에 해당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욕살이 파견된 고구려 성으로는 책성(柵城)과 오골성(烏骨城)이 있다. 책성은 현재 중국 연변 혼춘(琿春) 지역으로, 오골성은 중국 봉성(鳳城)의 봉황산산성(鳳凰山山城)으로 비정되고 있다.
봉황산산성은 전체 둘레가 16km에 달하는 요동 일대에서 가장 규모가 큰 포곡식 산성으로, 쐐기형 성돌을 이용하여 정연하게 석축 성벽을 쌓았다. 요동평원에서 평양으로 진격하기 위해서는 단동(丹東) 일대에서 압록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반드시 봉성을 거쳐야 하는 만큼 산성은 교통로의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망대와 성내 대형 건물지 등에서는 연화문와당을 포함한 다량의 고구려 기와가 발견되고 있어 산성에 관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1 | 봉성 봉황산산성 - 1. 위성사진(ⓒ구글 어스, 2021년 3월)

사진1 | 봉성 봉황산산성 - 2. 북벽(ⓒ양시은, 2016년)

지도1 | 전체 고구려 성의 분포(ⓒ양시은)
고구려 성은 현재 중국의 동북지역과 북한 전역, 그리고 남한의 일부 지역에 분포한다. 중국에는 최소 150개가 넘는 고구려 성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둘레가 1km 넘는 중형급 이상의 산성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북한 지역은 정보의 부족으로 전체 숫자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지만, 지금까지 50여 기가 알려져 있다. 북한 내 고구려 성은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활용되면서 증축 및 개축된 곳이 많다. 남한 지역에도 약 50여 기가 분포하고 있는데, 둘레가 300m 미만인 소규모의 보루가 대부분이다(양시은, 2013).
북한을 제외한 중국과 남한 지역의 고구려 산성은 고구려 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관련 연구에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다수의 고구려 산성이 오랜 기간이 지났음에도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한 점, 백제나 신라의 여러 성에서 고구려의 축성술이 확인되는 점(백종오, 2017), 그리고 수·당과의 전쟁에서 중국의 대군이 고구려 성을 쉽게 점령하지 못하였다는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고구려의 우수한 축성기술과 이를 바탕으로 한 효율적인 방어체계를 짐작해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