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내용 바로가기하단 바로가기
상세검색
  • 디렉토리 검색
  • 작성·발신·수신일
    ~
고구려통사

3장 적석총

적석총은 지상에 돌을 깔고 주검을 안치한 후 그 위에 다시 돌을 덮어 매장을 마감한 무덤이다. 돌로 쌓은 지상의 분구가 적석총의 큰 특징이어서, 북한에서는 돌무지무덤 또는 돌각담무덤이라고 하고 중국에서는 적석묘(積石墓)라고 한다. 남한 학계에서는 적석총 또는 적석묘로 부른다. 그러나 적석총의 분구가 크고 높아서 청동기시대의 적석묘와 구별하기 위해서 적석묘보다는 적석총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적석총이 고구려 고유 무덤 형식이었음은 중국의 여러 역사 기록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조(高句麗條)와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고구려조(高句麗條)에서 “고구려에서는 돌을 쌓아 무덤을 봉하고, 무덤 둘레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다(積石爲封 列種松柏)”고 하여서, 오래전부터 압록강 중하류 유역과 혼강을 비롯한 압록강 지류 유역에 집중 분포하는 적석총을 고구려 무덤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적석총은 중국 동북의 여타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아서 고구려를 대표하는 무덤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혼강과 압록강 중하류와 그 지류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 적석총을 고구려 전기 묘제로 이해하고 있다.
조선시대 지리서나 문집에 의하면, 만포에서 압록강을 넘어가면 오국성(五國城)이 있고 그 주위에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무덤(塚)이 있다고 하거나, 태왕릉이나 장군총과 같은 거대한 적석총을 황제의 무덤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다(그림1). 이렇듯 적석총에 대한 관심은 오래되었지만, 이에 대한 조사는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는 만주 진출을 선점하기 위해 강점 이전부터 이 일대를 조사하면서 〈광개토왕릉비〉와 함께 주변의 거대한 적석총에 관심을 가졌다. 특히 높고 큰 적석총의 기원과 변천에 관심을 두었다. 중국이나 만주 일대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적석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는 전파론적 시각에서 유적, 유물을 해석하려 하였던 당시 고고학적 인식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림1 | 〈광여도(廣輿圖)〉 평안도 강계부(ⓒ규장각한국학연구소)
이후 적석총의 기원과 변천은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적석총 연구의 주된 주제가 되었다. 적석총의 변천에 대해서는, 분구가 무기단에서 기단, 계단으로 변화하고, 매장부는 주검 1인이 안치되는 단인장의 수혈식 구조에서 2인의 추가 합장이 가능한 횡혈식 구조로 변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적석총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 현재 고구려 적석총은 중국 요동반도 남단의 신석기시대 말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축조되었던 적석무덤에서 기원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다수의 견해이지만, 아직까지 청동기시대에서부터 고구려 적석총이 축조되는 300~400여 년 중 요동반도 남단에서 압록강 중하류 유역에 이르는 지역에서 적석총의 기원을 보여줄 만한 무덤 자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적석총의 기원은 족속과 결부되기도 하는 민감한 문제이므로 향후 관심을 갖고 신중을 기해야 할 연구과제이다.
최근에 들어서 적석총에 대한 관심은 왕릉 비정에 있다. 특히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서 중국에서는 집안 통구분지에 있는 초대형 적석총 13기를 정비하고, 그중 12기를 국내도성의 고구려 왕릉으로 비정하였다. 국내도성 초대형분의 왕릉 비정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도 결부될 소지가 있는 만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국내에서도 왕릉 비정에 대한 관심과 함께 고구려 능제로 연구관심이 확대되었고, 이와 함께 도성과 왕릉이 그려내는 국내도성의 경관 등도 새로운 연구주제로 부각되었다.
오류접수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였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세요. 처리 현황은 오류게시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화번호, 이메일 등 개인정보는 삭제하오니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3장 적석총 자료번호 : gt.d_0008_0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