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불교조각
7장 불교조각
고구려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소수림왕 2년(372년)으로 당시 오호십육국의 하나로 북중국의 거의 전역을 차지했던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를 사신과 함께 파견하면서 불상과 경전을 고구려로 보내왔다. 그러나 동진(東晉)의 승려 지둔(支遁, 道林, 314~366년)이 고구려 도인(高麗道人)에게 서신을 보낸 기록 등으로 볼 때 불교는 그 이전에 이미 고구려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소수림왕 4년(374년)에는 승려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왔고, 그 이듬해 초문사(肖門寺, 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세워 순도와 아도를 각각 머물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고국양왕은 불법을 숭신(崇信)하여 복을 구하라는 칙령을 내리고, 광개토왕 영락 3년(393년)에는 9개 사찰이 평양에 세워졌다.
화북 지역뿐 아니라 남조로부터 불교문화가 고구려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동진 승려 지둔과 고구려 도인(道人)의 서신 왕래를 통해서 엿볼 수 있는데, 여기서 ‘도인’이라는 칭호는 남조에서 널리 쓰였던 승려를 가리키는 표현이어서 ‘고구려 도인’은 불교 공전 이전에 동진에서 활약한 고구려 승려였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다. 또한 광개토왕 때에 동진의 승려 석담시(釋曇始)가 경률(經律) 수십 부를 가지고 고구려의 요동 지역에 와서 십여 년간 불법을 펴고 교화하다가 돌아갔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고구려 불교문화의 형성에 남조(南朝) 불교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불교가 고구려에 전래되고 사찰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면 불전(佛殿)과 함께 예배의 대상인 불상과 불화, 의례에 필요한 불교의식구 등이 갖추어졌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 시기 불교미술에 대한 자료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현재 전하는 고구려의 불교미술, 특히 예배존상인 불상들은 대부분 평양 천도 이후 6세기에 제작된 소형상에 불과하여 삼국 가운데 가장 수준 높은 불교문화를 꽃피웠을 고구려의 불교미술을 이해하기에는 미흡한 수준이다.
이와 같은 자료의 영세성 때문에 지금까지 고구려 불교조각 연구는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북위–동위–북제)와의 불교문화 교류를 통한 ‘불상 양식과 도상의 전래와 수용’이라는 전제 아래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최근 중국 강소성 남경(南京)과 사천성 성도(成都) 일대에서 남조의 남제(南齊)·양(梁) 시기 불상이 출토되면서 기존에 이루어졌던 고구려 불교조각에 대한 연구는 전체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할 상황에 이르렀다. 한편, 그동안 삼국의 경계지역에서 수습되었던 고구려계 불상과 새롭게 출토된 고구려계 불상에 대한 검토, 일본 열도에 전해진 삼국시대 불상 가운데 고구려 작품으로 추정되는 몇몇 불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점차 고구려 불교조각의 연구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