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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오국사신(五國使臣)을 조선에서 견책하고 다른 관원으로 바꾸어 파견한 것은 자주(自主)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문서

韓出使五國趙臣熙, 擅自回國, 韓廷已加罪譴, 並改派他員, 顯見居心自主, 欲去中·韓使節體制.
  • 발신자
    北洋大臣 李鴻章
  • 수신자
    總理衙門
  • 날짜
    1890년 2월 17일 (음)(光緖十六年二月十七日) , 1890년 3월 8일 (光緖十六年二月十七日)
  • 문서번호
    2-1-3-89 (1509, 2744a-2745b)
二月十七日, 北洋大臣直隸總督李鴻章文稱:
 
二月十四日, 據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升用道補用知府袁世凱稟稱:
竊照朝鮮五國全權使臣趙臣熙擅自回國, 即由韓廷治罪, 並派員替代各情形, 業經隨時電稟憲台鑒核各在案. 伏查趙臣熙淹留香港兩年有餘. 時經韓王嚴促西行, 不遵三端定章辦理. 而臣熙惟以“請先刪改三端, 乃可不遵”等語相執論. 韓王多方嘗試, 期改三端, 究未能如所望, 亦復無如臣熙何, 憎怒甚切. 同在香之閔泳翊, 尤與臣熙牴牾. 適以朴定陽違章至成爭端, 厯年詰駁, 未能結束, 臣熙愈有可藉詞, 而韓王尤無可為計. 自去秋臣熙定陽回韓後迭經卑府責問, 王終不能顯拒中國, 遺笑遠近, 大局堪危, 復深知三端之未易刪改, 因迭次電稱病沉, 請王允回. 而王方以圖改三端, 念終未泯, 且知臣熙病係托故, 堅執不允. 而臣熙竟不通知泳翊, 藉事由香港潛經日本回韓. 正月十一日至釜山, 而韓廷猶未之聞, 逾日聞之. 王意甚怒, 誓誅臣熙以示懲戒, 經卑府婉轉呵護乃免. 十二日夜驟升朴齊純內務協辦之職, 並傳教經稱臣熙因病許褫差, 改派朴齊純往代. 時臣熙猶未抵仁川, 其所以立即派代者. 盖欲使各國見五國全權, 雖因病回, 亦未嘗一日虛位, 冀存其自立虛體耳.
十三日, 臣熙率隨員南宮檍 주 001
각주 001)
남궁억(南宮檍. 1863~1939)은 서울 출생으로 본관은 함열(咸悅)이며,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이다. 1883년에 영어학교(英語學校)에 1년간 다닌 후 묄렌도르프의 견습생으로 있다가, 1887년 전권 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원으로 상해에 갔다. 1893년 칠곡 부사(漆谷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1895년 내부 토목 국장이 되어 탑골 공원 공사를 맡았다. 그 후 흥화학교(興化學校)의 교사로서 영문법과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였다가 투옥되었고, 석방되자 이해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 사장이 되었다. 1905년에 성주 목사(星州牧使), 1906년 양양 군수(襄陽郡守)로 있으면서 양양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 이듬해 대한협회장(大韓協會長)이 되고, 이후 교육가로 활동하였다. 1933년 무궁화와 우리나라 역사 사건으로 체포되어 복역 중 1935년 병으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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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蔡賢植 주 002
각주 002)
한·러밀약 당시 러시아어 통역으로 일한 하급 관리로 宮內府種牧課長, 內藏院種牧課長蔡賢植, 中樞院議官, 咸鏡北道交界官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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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商在,주 003
각주 003)
이상재(李商在. 1850~1927)는 본관은 한산(韓山). 호 월남(月南)이며, 본명 계호(季皓)로 충남 서천(舒川) 출생이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과 사귀어 그의 식객 노릇을 하다가, 1881년 그가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으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이 되어 도일(渡日)하였다. 1884년 우정국 총판(郵政局總辦)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 후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였으나, 이듬해 사신 일행과 함께 귀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고, 이어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로 학무국장(學務局長)을 겸임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지내고, 중추원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1898년 독립협회 사건으로 구금되었으며, 1902년 개혁당(改革黨) 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904년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韓圭卨)·이상설(李相卨)의 집을 왕래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회장이 되었고, 이듬해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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及前派充駐美參贊之美人醫生阿倫等同抵仁川. 臣熙即疏請治以擅回之罪, 自繫仁川, 敬待王命. 王經數日不能決其所宜, 迭使人訪商於德尼等. 嗣知各國人均知臣熙棄命擅回, 寔非因病, 掩耳盜鈴之計, 未足欺人. 至十六日, 王復傳教云:“御命出疆, 何等慎重. 雖病勢難雖,주 004
각주 004)
雖는 强의 오기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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而使事未竣, 徑先回還, 揆以事體, 駭妄極矣. 五國公使趙臣熙施以竄配之典.” 等語. 次日臣熙進至郊外, 即定以全羅道 咸悅縣為配所,주 005
각주 005)
咸悅縣은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일대에 설치된 조선 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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臣熙即由郊外行. 識者惜之, 而各國人仍不免騰口貽笑. 昨晤英署總領事禧在明,주 006
각주 006)
힐리어(1849~1927, Walter C. Hillier, 禧在明)는 영국 출신의 외교관이자 중국 전문가다. 1867년 주중 영국 영사관에서 통역 업무를 담당하면서부터 대중국 외교의 일선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1879년부터는 북경에서 서기에 임명되었으며 1883년에는 주중 영국 대사 파크스와 함께 조영 조약을 맺기 위해 수행하였다. 1889년에는 애스턴(William George Aston)의 뒤를 이어 주한 영국 총영사(Consul-General)로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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據云:
韓派全權直同兒戲, 不如勸其毋再派往. 如或不然, 可令其派三·四等公使, 最為妥便. 似此全權, 派往何用?
等語. 惟查韓王近年來視派全權為自主發軔之基, 自經三端節制, 殊失興會, 三年來惟此一事, 橫亘於衷. 此外謬妄詭計, 且因此不遑他及, 斷不肯改派三·四等公使, 並不肯飭遵三端. 意可想見, 其派齊純者, 亦一時倉卒權宜之計, 必不飭其即行. 要惟力圖設法請改三端, 倘終不蒙允, 當必乘隙相機另派柔媚昧事之員, 前往違章辦理. 卑府前晤齊純, 探其去否, 據云:“須商請中國改刪三端, 再去為妥.” 其見亦與臣熙差同. 特齊純不如臣熙之強項耳.
再. 韓駐日本使金嘉鎮於本月二十一日乘美兵船回抵仁川, 次日來漢. 王頗倖近, 惟嘉鎮亦小人, 尤必不能安愚息事, 變擾多端, 誠在在堪虞也.
謹將韓使趙臣熙回國各情形, 縷晰密陳. 為此肅稟鈞鑒.
等情. 到本閣爵大臣. 據此. 相應密咨貴衙門, 請煩查照.

  • 각주 001)
    남궁억(南宮檍. 1863~1939)은 서울 출생으로 본관은 함열(咸悅)이며,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이다. 1883년에 영어학교(英語學校)에 1년간 다닌 후 묄렌도르프의 견습생으로 있다가, 1887년 전권 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원으로 상해에 갔다. 1893년 칠곡 부사(漆谷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1895년 내부 토목 국장이 되어 탑골 공원 공사를 맡았다. 그 후 흥화학교(興化學校)의 교사로서 영문법과 국사를 가르치고, 독립협회에 가입하였다가 투옥되었고, 석방되자 이해 황성신문사(皇城新聞社) 사장이 되었다. 1905년에 성주 목사(星州牧使), 1906년 양양 군수(襄陽郡守)로 있으면서 양양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 이듬해 대한협회장(大韓協會長)이 되고, 이후 교육가로 활동하였다. 1933년 무궁화와 우리나라 역사 사건으로 체포되어 복역 중 1935년 병으로 석방되었다. 바로가기
  • 각주 002)
    한·러밀약 당시 러시아어 통역으로 일한 하급 관리로 宮內府種牧課長, 內藏院種牧課長蔡賢植, 中樞院議官, 咸鏡北道交界官 등을 지냈다. 바로가기
  • 각주 003)
    이상재(李商在. 1850~1927)는 본관은 한산(韓山). 호 월남(月南)이며, 본명 계호(季皓)로 충남 서천(舒川) 출생이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서울에서 박정양(朴定陽)과 사귀어 그의 식객 노릇을 하다가, 1881년 그가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으로 일본에 갈 때 수행원이 되어 도일(渡日)하였다. 1884년 우정국 총판(郵政局總辦) 홍영식의 권유로 우정국 주사(主事)가 되어 인천에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 후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에 임명되자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1등서기관으로 근무하였으나, 이듬해 사신 일행과 함께 귀국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후 박정양이 내무독판(內務督辦)이 되자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이 되었고, 이어 학무아문참의(學務衙門參議)로 학무국장(學務局長)을 겸임하였다. 1895년 학부참사관(學部參事官)·법부참사관(法部參事官)을 지내고, 중추원1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을 거쳐 의정부(議政府) 총무국장이 되었다. 서재필(徐載弼)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이 되어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고, 1898년 독립협회 사건으로 구금되었으며, 1902년 개혁당(改革黨) 사건으로 3년간 복역하는 동안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1904년 특사로 출옥, 1905년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밀사 파견 준비차 내밀히 한규설(韓圭卨)·이상설(李相卨)의 집을 왕래하던 중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2개월 후 석방되었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1921년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회장이 되었고, 이듬해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 초대 회장에 추대되었으나 곧 병사하였다. 바로가기
  • 각주 004)
    雖는 强의 오기로 보인다. 바로가기
  • 각주 005)
    咸悅縣은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읍 일대에 설치된 조선 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이다. 바로가기
  • 각주 006)
    힐리어(1849~1927, Walter C. Hillier, 禧在明)는 영국 출신의 외교관이자 중국 전문가다. 1867년 주중 영국 영사관에서 통역 업무를 담당하면서부터 대중국 외교의 일선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하였다. 1879년부터는 북경에서 서기에 임명되었으며 1883년에는 주중 영국 대사 파크스와 함께 조영 조약을 맺기 위해 수행하였다. 1889년에는 애스턴(William George Aston)의 뒤를 이어 주한 영국 총영사(Consul-General)로 부임하였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李鴻章, 袁世凱, 趙臣熙, 趙臣熙, 臣熙, 臣熙, 閔泳翊, 臣熙, 朴定陽, 臣熙, 臣熙, 定陽, 臣熙, 泳翊, 韓廷猶, 臣熙, 朴齊純, 臣熙, 南宮檍, 蔡賢植, 李商在, 阿倫, 臣熙, 德尼, 趙臣熙, 臣熙, 臣熙, 禧在明, 齊純, 臣熙, 金嘉鎮, 趙臣熙
지명
香港, 香港, 釜山, 仁川, 仁川, 全羅道, 咸悅, 仁川, 嘉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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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오국사신(五國使臣)을 조선에서 견책하고 다른 관원으로 바꾸어 파견한 것은 자주(自主)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북양대신이 총리아문에 보낸 문서 자료번호 : cj.d_0002_0030_0880